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리고 말았다. 눈앞에서 살해 용의자를 놓치고, 용의자의 말만 믿고 기약없이 기다리다 결국 제주경찰은 차가운 시신만 마주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제주경찰이 살해 용의자에게 철저히 유린당했다. 엉터리 초동수사는 물론 공항경찰대와 공조체계도 없었고, 허둥지둥하는 등의 부실수사의 전형을 연출했다.
14일 제주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한씨가 제주를 떠나기 전인 지난 10일 오후 7시께 신원조회 등을 통해 그가 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사실을 파악했다. 당일 한낮에 그를 만나고서도 한참이나 지나 신원조회를 한 결과다.
하지만 경찰은 사실만 파악한 데서 그쳤다. 한씨가 아직은 제주에 있었을 시간이었지만 경찰은 한씨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도피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경찰은 한씨의 기소 사실을 확인하고 한씨에게 전화을 걸었다. 전화를 받은 한씨는 “탑동 주변에 있다”며 “오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게스트하우스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한씨의 말만 그대로 믿었다. 그저 한씨가 게스트하우스에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한씨는 경찰과 통화를 하던 시간에 이미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찰은 10일 오후 7시19분 공항에 있던 한씨를 뒤늦게 확인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11시가 돼도 한씨가 게스트하우스에 나타나지 않자 그제서야 한씨의 위치를 추적했다. 결국 다음날 새벽 1시가 돼서야 경찰은 한씨가 제주를 벗어나 서울 신림동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경찰이 한씨가 제주를 벗어나기 6시간 전인 10일 오후 2시10분께 그를 만나고서도 그의 도주는 아예 꿈도 꾸지 않은 것이다.
결국 20대 여성관광객 피살사건을 놓고 경찰의 초동수사 부실이 도마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초동수사 부실은 물론 공조수사 체계도 '실종' 그 자체였다.
한씨의 기소 사실을 파악한 순간 한씨가 제주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공항경찰대에 연락, 그의 제주이탈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공조는 아예 없었다.
경찰은 이에 대해 “한씨를 용의자로 특정한 것은 피해자인 A씨의 시신을 발견한 이후였다”며 “실종신고 접수 초기에는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를 했다. 때문에 A씨의 시신을 찾는 것이 늦어졌고 한씨를 용의자로 특정하는 것도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수사 초기에 단순 가출과 자살의심 등의 가능성도 고려하면서 수사를 하면서 게스트하우스를 중심으로 인력들이 배치돼 있었기 때문에 한씨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인력배치가 부족했다”는 설명도 했다.
경찰은 수사 부실 지적에 대해 “결론적으로 봤을 때는 부실하게 보일 수도 있다”며 “하지만 당시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서도 한씨 및 게스트하우스 스테프 및 투숙객에 의한 범죄 가능성을 고려, 제주도를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다.
경찰의 대응이 좀더 적극적이었다면 한씨가 제주를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제주에 여행 온 20대 여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던 한씨는 14일 오후 3시1분께 충남 천안시 동남구 신부동 한 모텔의 객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눈앞에서 유력 용의자를 놓친 경찰을 비웃듯 사흘여간 서울.수원.천안 등지를 돌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