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습니다. 무죄를 구형합니다”
제주4.3 당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수형인 335명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이 이뤄진 16일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생존수형인 고태삼(92), 이재훈(91) 할아버지는 이날 법정에 직접 섰다. 74년의 세월은 어린 소년의 이마에 ‘전과자’라는 깊고 깊은 주름을 새겼다.
“공소사실의 입증은 검사의 몫입니다. 피고는 범죄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검찰은 증거가 없어 무죄를 구형했습니다. 따라서 범죄의 증명이 없어 무죄를 선고합니다”
재판부는 검찰 구형 후 곧바로 수형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정 안은 환호와 박수, 그리고 이내 눈물바다로 변했다.
“오늘 이 선고로 피고인들과 유족에게 덧씌워졌던 굴레가 벗겨지고, 앞으로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이런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구순을 넘긴 나이가 돼서야 ‘무죄’를 정식 인정받았다. 70년 넘도록 전과자 신세로 살아온 누명이 벗겨진 순간이었다.
고태삼 할아버지와 이재훈 할아버지는 “늙고 늙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지만 이제는 한을 풀고 명예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환히 웃었다.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장찬수 부장판사)는 이날 불법 일반.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행방불명 수형인과 생존 수형인 335명에 대해 연이어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살던 고태삼 할아버지는 종달리 6.6사건의 당사자다. 6.6사건은 1947년 6월6일 마을 청년들이 경찰 3명을 집단폭행한 사건이다.
고 할아버지는 18세였던 1947년 6월6일, 동네청년 모임에 나갔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 집회장소를 덮친 경찰관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경찰관을 때렸다는 혐의로 징역 장기 2년에 단기 1년 형을 선고받았다.
고 할아버지는 경찰관을 폭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끌려간 경찰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의 폭행과 모진 고문을 당하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그렇게 제대로 된 조사도 받지 못한 채 인천형무소로 갔다.
1년간 복역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주신 학교도 더 다니지 못했다. 직장생활도 못 했다. 성인이 돼서도 아들은 원양어선 승선을 거부당하고 딸은 교사 발령이 늦춰지는 등 그에게 붙은 연좌제로 또 다른 고통을 겪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 출신인 이재훈 할아버지는 ‘북촌 8.13 삐라 사건’의 당사자다. 당시 17세 청소년이었던 이 할아버지는 1947년 8월 제주경찰서소속 경찰들이 쏜 총에 북촌마을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은 현장 인근에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함덕으로 몰려갈 때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경찰의 “어디에 사냐”는 질문에 “북촌”이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바로 구금됐다.
경찰서로 끌려간 이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물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이겨 "삐라(북한 선전물)를 봤다"고 허위자백을 할 때까지 경찰의 구타와 고문을 받았다. 이 할아버지 역시 제대로된 기소나 재판 절차도 없이 단기 1년에 장기 2년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 수감, 1년을 복역했다.
이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어머니는 함덕에서 총살되고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 간 후 행방불명인된 후였다. 7남매 중 둘째 누나도 총살을 당해 고인이 된 터였다.
장찬수 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스무살도 넘지 못한 청소년을 상대로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명목으로 실형을 선고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면서 “피고인들도 그동안 하소연 한 번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부터 편하게 주무시길 바란다”고 위로를 건넸다.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은 제주에선 아픔의 계절이다. 4.3 당시 희생된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간 계절이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기간 적게는 1만4000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중 4.3수형인은 4.3 당시 불법 군사·일반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가 수형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당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올라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상당수는 숨지거나 행방불명돼 다시는 제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동안 4·3 수형인의 억울함을 푸는 재심 재판은 계속 이어져 왔다. 재심 재판이란 확정된 유죄 판결에 대해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경우 당사자 또는 기타 청구권자의 청구에 의해 해당 사건을 다시 심리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법원은 70년 전 군사재판의 불법성을 인정, 2019년 1월 양근방(88)옹 등 4·3 생존 수형인 18명에 대해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이후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일반·군사 재판 수형인 362명에 대한 재심 청구가 이뤄졌다.
지난해 12월 일반재판 수형인 김두황(93)옹에 대해 '무죄'가 선고된 데 이어 김정추(90) 여사 등 군사재판 수형인 7명도 죄를 벗었다. 지난달엔 행불 수형인 10명도 무죄선고를 받았다.
현재까지 36명의 4·3 수형인이 재심을 통해 '공소기각' 또는 '무죄' 판결로 죄를 벗었다.
70여년의 행방불명인 333명과 생존인 2명을 포함한 4·3 일반·군사재판 수형인 335명에 대한 대규모 ‘릴레이 무죄 선고’가 이어진 2021년 3월16일, 행정안전부는 재심 선고에 앞서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고 선포했다.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21년 만이다.
새 법안에서는 4·3사건 당시 군사재판을 통해 형(刑)을 선고 받은 2500여 명의 수형인에 대해 특별재심을 통해 명예회복이 가능하게 됐다. 희생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할 수 있는 근거도 명시했다. 희생자 및 유족의 신체적·정신적 피해 치유 및 공동체 회복 지원을 위한 국가의 의무도 명문화했다. 새 법안은 오는 6월 시행될 예정이다.
“나오시오”해서 마당에 나갔다가 총격에 고인이 된 이, 17세에 “육지 물질을 가자”는 서류에 사인을 했다가 수감생활을 한 이, 전신주 보수공사에 동원됐다가 경찰에 끌려간 이.
한떨기 꽃다운 나이였던 그들의 그 긴 모진 세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74년간의 해묵은 한이 ‘무죄’ 선고로 조금이나마 풀어지기를, 가슴을 치며 떠난 저승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73주년 4.3추념식을 약 보름 앞둔 2021년 3월16일. 이날은 제주에 역사로 기록됐다. 시리고도 긴 겨울을 보내고 봄을 틔운 날로 말이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