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생존수형인과 유족이 국가로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사실상 4·3 생존 수형인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제주지방법원 민사2부(류호중 부장판사)는 7일 양근방(89)씨 등 4.3 생존 수형인과 유족 등 38명이 국가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4.3희생자 본인 1억원, 구금 당시 배우자와 자녀에게 각각 5000만원, 1000만원을 지급하라”면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다만 원고 측이 이미 받은 형사보상금은 공제한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이번 재판에 참여한 4.3 수형인 18명 중 박순석(94)씨만 2000만원 가량의 위자료를 받게 됐다.
제주지법은 앞서 2019년 8월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통해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4·3 생존 수형인 18명에게 구금 일수에 따라 1인당 최저 약 8000만원에서 최고 약 14억7000만원을 지급하는 내용의 형사보상 결정을 내렸다.
형사보상은 구속 재판을 받다 무죄가 확정된 경우 구금일수만큼 보상해주는 제도다.
박씨를 제외한 4·3 수형인들은 당시 모두 1억원 이상의 형사보상금을 받았다. 사실상 이번 판결은 원고 측이 실질적인 국가배상은 받지 못하게 된 셈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 수형인들은 영장 없이 불법재판 이후 구금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당한 희생자도 있었다”면서 “이에 대해선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점을 인정한다. 피고가 주장한 정부의 소멸시효 항변은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은 점, 출소 이후 전과자로서 사회적 낙인 등 명예훼손을 당한 점은 불법행위"라는 일부 원고의 주장에 대해 앞서 인정한 국가배상책임에 포함된 것으로 판단, 별도의 불법행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일부 수형인들이 4.3 당시 체포 및 구금과정에서 가족들이 희생된 점, 출소 이후 사찰당한 점 등에 대해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가족들이 희생된 점에 대해선 만약 증거가 있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부분에 포함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 사건이 해방 이후 격변기 사회적 혼란기 때 발생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라면서 “4·3특별법도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이 목적이지 손해배상 책임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해자 간 구금 기간 차이가 8개월에서 11년까지 적지 않다. 그러나 4·3 수형인별 구금 기간에 따른 형사보상이 지급돼 형평성이 해소됐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일률적으로 위자료를 책정한 사유를 밝혔다.
4.3수형생존자들의 변호를 담당한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재판이 끝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구체적인 판결사유를 확인한 이후에 불복여부를 검토할 것”이라면서 “예상치 못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재판부가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등에 대한 손해배상 선례 등을 참조한 부분에 대해 "4.3사건은 한국전쟁 학살과는 불법의 정도와 양태 등이 다르다"면서 "피해자의 고통을 평면적으로 본 판결"이라고 밝혔다.
그는 “판결이 나기 전 수형생존인 개개인의 피해사실에 근거해서 배상액을 산정하고, 형사보상액과 배상액을 평가해서 법적판단이 이뤄질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에 참석한 4.3 생존수형인 양일화(92)씨는 “4.3때 전국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다 제주로 돌아왔다. 제주에 와서도 힘든 삶을 살아왔는데 재판부가 다 묵살했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4.3생존수형인 오계춘(97)씨의 아들 강은호(65)씨는 “어머니는 4.3 당시 굶어죽은 아들이 생각난다면서 어린 아이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신다”고 전했다.
앞서 생존수형인들과 유족들은 2017년 4월19일 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접수, 2019년 1월17일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제주4.3사건 이후 71년만에 명예가 일부 회복되는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이들은 공소기각 이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에 대한 형사보상을 청구했다. 제주지법은 2019년 8월 21일 53억4000여만원 규모의 배상을 결정했다.
이들은 이후 2019년 11월 불법구금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출소 이후 전과자로 낙인찍힌 명예훼손, 구금 과정에서 자녀 사망 등에 대한 위자료 약 103억여원을 산정,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산정된 금액엔 구금기간 중 노동을 했을 경우 기대할 수 있는 수입도 포함됐다. 이로써 원고 1명 당 3억에서 15억원 수준의 손해배상금이 책정됐다.
정부는 재판 과정에서 각 원고의 개별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3년 12월 4.3 진상보고서가 나왔고, 이미 18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다.
반면 원고인 4.3생존수형인 및 유족 측은 공소기각 판결이 난 2019년 1월 17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제주4·3은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기간 적게는 1만4000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4·3 수형인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 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수감된 이들을 말한다.[제이누리=박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