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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잉글리시 페이션트 (4)

 

헝가리 출신의 사막 탐사가 알마시와 영국의 유부녀 캐서린은 황량한 리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눈이 맞는다.’ 알마시는 헤로도투스의 「역사(Histories)」에 나오는 칸다울레스의 전설을 읊조리는 캐서린에 꽂히고, 캐서린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글쓰기를 고집하면서 사물의 본질에 충실하고 사막 같은 무공해의 알마시에 꽂힌다.

알마시가 시장 구경에 나선 캐서린의 뒤를 밟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갖기 시작하고, 알마시와 캐서린 단둘이 사막에 고립돼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서로에게 더욱 끌린다. 결국 유부녀 캐서린과 알마시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여기까진 불륜 드라마의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그런데 알마시의 숙소에서 캐서린과 알마시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달달한 대화를 하던 중 무언가 꼬이기 시작한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쇄골을 어루만지면서 그것을 ‘알마시의 협곡’이라고 명명한다.

자신이 아름다운 캐서린 쇄골의 최초의 발견자라고 한다. 미국 대륙에 인디언이란 본래 주인이 있었지만 콜럼버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들어가서 그곳에 자기들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캐서린의 쇄골에 굳이 주인이 있다면 법적인 남편 클리프턴(콜린 퍼스)일 텐데, 알마시는 콜럼버스가 인디안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 클리프턴의 아내 쇄골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클리프턴이 알면 인디언만큼이나 환장할 일이다.

알마시는 캐서린에게 독점적 소유의 욕망을 드러낸다. 캐서린도 알마시가 자신에게 독점적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다. 캐서린도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소유당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런 달달한 대화가 꼬이기 시작한다. 캐서린이 알마시에게 구름, 꽃, 비 따위의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읊고 나서 알마시가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 알마시는 아무 대답이 없다. 공감을 해주지도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분위기가 뻘쭘해진다.

캐서린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 ‘그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알마시가 이 질문에 ‘소유하고 소유당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상황에서 그런 대답을 하는 알마시의 표정이 혼란스럽고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분위기가 수습되지 않는다. 캐서린은 마치 연인에게서 ‘사실 난 연쇄 살인마’란 고백이라도 들은 호러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욕조에서 빠져나간다. 욕조에 혼자 남은 알마시의 표정이 절망적이다. 알마시는 무엇이가를 소유하면 그것에게 소유당하고 구속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화분 하나라도 소유하면 그 화분에 내가 구속당하기 마련이다. 구속당하기 싫어서 소유하지도 않는 것을 신조로 삼아왔는데, 어쩔 수 없이 캐서린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신이 딱하다.

캐서린을 소유하고는 싶지만 그녀에게 구속당하기는 싫다. 세상에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자신이 최악의 남자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셈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 아닐 것이다.

집권여당의 당원들이 대표를 선출하는 경선을 앞두고 여러 말이 오가는 모양이다. 매달 당비를 300만원이나 내는 ‘1호 당원’ 대통령이 당을 ‘소유’하는 주인이지만, 당원들의 뜻에 구속당하기는 싫다는 것이 핵심인 듯하다.

북한 노동당 1호 청사나 공군 1호기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1호 당원’이라는 말은 참으로 생소하다. ‘당비 300만원’이라는 논리도 낯설다. 주주총회에서나 적용하는 보유 주식수에 따른 의결권의 원칙을 정당에 대입한 격이어서다. 

당원들이 원하지만 ‘1호 당원’이 원치 않는 경선 주자들이 하나둘 모두 경선 무대에 아예 발도 들이지 못하거나 슬금슬금 몸을 뺀다. 그 모습들이 ‘너를 소유하지만 너에게 소유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알마시의 말을 듣고 슬금슬금 몸을 가리고 욕조에서 빠져나가는 캐서린의 모습 같다. 

대통령이 금과옥조로 여긴다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선택의 자유’는 ‘1호 당원’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 당원들 ‘따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원들의 유일한 ‘선택지’는 내가 정하고 너희는 그것을 ‘선택’하면 된다.

 

 

“소비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시장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을 때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많은 가게의 경쟁이다. 소비자는 다른 가게에서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야 한 가게에서 농락당하지 않는다. 정말 소비자를 보호해주는 것은 랠프 네이더(Ralph Nader)와 같은 수많은 소비자 보호 단체가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가게다.”

이 말은 대통령이 바이블처럼 여기는 듯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Freedom to Choose)’에 나오는 말이다. 소비자든, 당원이든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독점적 지배다.

미국 방송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이 그의 방송시장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응수했던 한마디가 뼈를 때린다. “독점은 끔찍한 것이다. 단 자기가 독점할 때까지만(Monopoly is a terrible thing, till you have).” 지금 ‘1호 당원’의 독점적 지배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이 나중에 혹시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도 ‘독점은 끔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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