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비행기 추락으로 전신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타버린 알마시(랄프 파인즈)의 회고를 따라간다.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간호사 해나(쥘리엣 비노슈)와 단둘이 남은 알마시는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간호사에게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띄엄띄엄 털어놓는다. 죽음을 앞둔 알마시의 최후진술서다.
알마시의 회고는 리비아 사막에서 제프리와 캐서린 부부(콜린 퍼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와의 합류로 시작한다. 그날 밤 일행은 사막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갖는다. 단합대회 성격인 듯하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팀을 만들면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하다.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주고 경계선을 실선에서 점선으로 바꿔 그리는 데에 술과 노래만 한 것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야 단합이 된다. 우리도 술집에서 1차로 망가지고 노래방에 가서 2차로 망가진다.
알마시 일행의 술자리도 돌아가면서 ‘막춤’과 ‘막 노래’로 이어진다. 제프리 아내인 캐서린의 차례가 돌아오자 캐서린은 참으로 분위기 깨지게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에 기록된 이야기 한 토막을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나긋나긋하게 들려준다. 노래방에서 흥겹기론 첫손가락에 꼽히는 윤수일의 ‘아파트’가 끝나고 갑자기 누군가 바이올린을 들고 나가 찬송가를 연주하는 꼴이다.
캐서린이 들려주는 헤로도토스의 ‘옛날이야기’ 한 토막은 기원전 7세기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Candaules)의 비극이다. 칸다울레스는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내의 미모를 ‘자랑질’하고 자신의 경호실장 가이지스(Gyges)에게도 아내의 성적 매력을 자랑질하는데 그가 썩 동의하지 않는 눈치를 보인다.
칸다울레스는 가이지스에게 ‘침실에 숨어있다가 왕비가 발가벗은 모습을 보라’고 강요한다. 자랑질이 엽기적인 수준에 이른다. 가이지스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다. 가이지스가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봤다는 사실을 알아챈 왕비는 가이지스에게 그 죗값으로 네가 죽든지, 아니면 자신을 훔쳐보게 한 칸다울레스 왕을 죽이든지 선택하라고 명령한다. 가이지스는 칸다울레스 왕을 죽이고 왕비와 결혼한다.
칸다울레스 왕의 비극을 들려주는 캐서린을 바라보는 알마시의 표정이 복잡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알마시가 사막 탐사 중 한순간도 손에서 떼지 않고 읽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일반인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책인데, 그 내용을 캐서린이 읊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슴 철렁하게 하필 칸다울레스 왕의 비극이다.
제프리는 캐서린의 미모를 동료들에게 자랑질하고, 자신이 몰고 온 최신형 경비행기도 장인이 결혼선물로 사준 것이라고 자랑질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그들 앞에 서서 칸다울레스 왕의 비극을 들려준다. 혹시 남편 제프리에게 경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프리는 칸다울레스 왕이고 알마시는 가이지스가 된다. 칸다울레스 왕의 비극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되풀이된다. 아내를 알마시에게 빼앗긴 제프리는 그 둘을 향해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경비행기를 몰아 다 같이 죽자고 한다. 개념 없는 ‘자랑질’의 비극적 결말이다.
6세기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성경 말씀을 종합해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죄악 7가지(7 Deadly Sins)를 ‘자랑(Pride), 질투(Envy), 분노(Wrath), 식탐(Gluttony), 욕정(Lust), 나태(Sloth), 탐욕(Greed)’으로 정리한다. 자랑질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다. 자랑질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질투의 고통에 빠트린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을 보기만 해야 하는 건 고통이다.
왕비의 아름다운 몸을 보기만 해야 하는 건 경호실장 가이지스에겐 고통이다. 제프리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 캐서린을 보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알마시에겐 고통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기 위해서는 또 다른 죄악에 빠지기도 한다. 알마시가 저지르는 죄악이다.
요즘 돌아다니는 SNS를 보노라면 문득 칸다울레스 왕의 비극적인 자랑질이 떠오른다. 변태적인 노출증과 배우자의 벗은 몸까지 남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칸다울리즘(Candaulism)’이라고 한다. 엽기적인 경지에 이른 자랑질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칸다울레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학술용어이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명품, 고급 외제차, 인테리어, 휴양지, 고급식당에서 먹고 마시는 인증샷에 이어 이제는 급기야 자기 ‘몸뚱이’와 배우자의 ‘몸뚱이’까지도 올려버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살아있는 전설이 된 퍼거슨 감독이 온갖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분란을 일으키는 선수들의 SNS를 ‘인생의 낭비’라고 했다. 하지만 교황 그레고리 1세가 환생해 오늘날의 SNS를 본다면 7가지 죄악에 SNS를 추가해 ‘8가지 죄악’으로 다시 정리하든지 아예 SNS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1만권의 책을 읽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서 저절로 문자향(文字香, 문자의 향기)과 서권기(書卷氣, 책의 기운)가 뿜어져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1만점(點)의 명품을 쌓아두고 있으면 굳이 ‘자랑질’하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서 저절로 루이비통의 향과 에르메스의 기운이 느껴질 터이니 너무 안달할 필요 없지 않겠는가.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