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ㆍ1996)’는 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서 9개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3000억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니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한국에선 신통치 않은 성적표를 남겼다.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익숙한 우리나라 관객들이 영국식 영화문법을 다소 낯설 게 느꼈을지 모른다.
같은 영어라도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가 조금 다르듯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는 같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조금은 정적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한국관객들은 정적인 영국풍보다는 할리우드의 ‘역동적’ 전개와 장면들에 더 끌리는 듯하다.
영화는 라즐로 알마시(Laszlo Almasy)라는 실존인물의 행적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에서도 라즐로 알마시라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연기파 배우 랠프 파인즈(Ralph Finnes) 특유의 우울하고 권태로우면서도 짜증스러운 연기가 썩 잘 어울린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라즐로 알마시는 1900년대 전반기를 살았던 실존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소설가나 영화 감독이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라즐로 알마시는 헝가리 귀족 출신으로 독일어ㆍ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영화 속에선 비행기 추락으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타버린 그를 영국군이 병원에서 정성스럽게 간호한다. 헝가리는 당시 영국의 적성국이었는데 뜻밖이다.
영국군은 겨우겨우 내뱉는 라즐로의 몇 마디 영국식 영어 발음으로 미뤄 그를 영국인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이름도 신원도 알 수 없는 그의 치료에 최선을 다한다. 병원에서 그의 이름은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된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잉글리시 페이션트’다. 이 정도면 그를 헝가리인이라고 해야 할지 영국인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라즐로 알마시는 사막탐험가이자 항공기 조종사, 자동차 경주 선수이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영화에도 등장하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The Cave of Swimmers)’의 발견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라즐로가 사막 탐사 중에 발견해서 자신이 명명한 동굴이다. 세상 무엇보다도 ‘사막’에 심취했던 인물인 듯하다.
아마도 밍겔라 감독이 라즐로 알마시라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인물에 꽂힌 이유는 라즐로의 ‘이방인’의 모습이었던 듯하다. 라즐로는 배경 좋고 재주 많은 인물이었지만 어느 세계에도 소속되지 못한다. 조국 헝가리는 불편하고, 독일ㆍ영국 어느 세계도 편하지 못하다. 또한 어느 세계도 그를 따뜻하게 받아주지 않는다. 그런 알마시가 편할 수 있는 곳은 텅 빈 사막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그곳에 혼자 남아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편하다.
리비아 사막의 풀 한 포기 없는 모래 언덕도 그에겐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시원한 강물처럼 안온하다. 모든 것을 말려 죽이고 태워버릴 듯한 사막의 작렬하는 태양도 그에게만은 따사롭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래 바다’를 혼자 배회하는 라즐로 알마시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자기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라즐로 알마시가 사막을 탐험하는 영국 동료들과 함께하면서 사막은 더 이상 편하지 않은 공간으로 전락한다. 사막은 더 이상 그의 세상이 아니다. 이집트에서 열린 영국군 병사들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해서는 뜨거운 햇살에 못 견디며 실내로 숨어들어 창밖으로만 바깥을 내다볼 수밖에 없다. 수도원의 병상 침대도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주는 것을 거부한다. 그 태양은 그의 태양이 아니다. 나의 세상을 비추는 ‘나의 태양’은 따사롭지만 ‘남들의 세상’을 비추는 ‘남들의 태양’은 나에게는 무자비하게 뜨겁고 두렵다.
라즐로 알마시라는 인물은 카뮈(Camus)의 「이방인」에서 태양이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쏘아 죽였다고 법정 진술하는 뫼르소를 닮았다. 뫼르소는 총으로 사람을 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태양을 쏘아버린 것이다. 태양은 세상의 중심이다. 세상의 중심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나를 버렸다고 인식하는 순간 우리 모두 라즐로 알마시나 뫼르소와 같은 ‘이방인’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북한 주민 중에는 태양과 같은 수령님이 비추는 햇살이 따스하기만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런 주민들이라면 ‘따뜻한 수령님 품 안에서 우리는 부러울 것이 없어라’라고 진심으로 노래할 듯하다. 반면에 라즐로 알마시나 뫼르소처럼 그 태양이 나의 태양이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태워죽일 듯이 뜨거워 견딜 수 없어 숨어버리거나 총으로 쏘아버리고 싶은 주민들도 있겠다.
요즘 집권당에서 ‘친윤(親尹)’이니 ‘반윤(反尹)’이니 하고 오가는 말들이 거칠고 극렬하다. 혹시 그들이 올리는 SNS에 음향 지원 기능이 있다면 아마도 이를 부득부득 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집권당을 비추는 태양도 누군가에게는 난로처럼 따사롭기만 한데 집권당 속에서도 ‘이방인’이 된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들의 그 태양은 무자비한 불기둥 토네이도처럼 덮치는 모양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