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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잉글리시 페이션트 (7)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조금 특별하다. 적갈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조심조심 그리는 누군가의 손을 계속 보여준다. 그 조심스러운 붓질이 완성한 그림은 팔다리의 관절을 꺾은 듯한 기묘한 사람의 형상이다. 

 

 

그 그림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Cave of Swimmers)’ 속에 그려져 있는 신석기시대 동굴벽화 그림이다. 종이 위에 그 그림을 모사(模寫)하고 있는 손이 알마시인지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캐서린인지는 불분명하다.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대개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나 영화 전편을 관통하는 의미를 담은 장면을 사용한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아마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 속에 그려진 동굴벽화 한 컷으로 관객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고 싶었던 듯하다. 캐서린은 그 동굴 속에서 알마시에게 편지를 쓰면서 숨을 거두고, 알마시는 그 동굴에서 숨을 거둔 캐서린의 시신을 안고 나오며 통곡한다.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은 실존인물 알마시가 1933년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 사막지대에서 발견한 신석기 시대 동굴벽화다. 대단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불행하게도 1996년 ‘잉글리쉬 페이션트’ 개봉과 함께 유명세를 치렀다. 그 바람에 백종원의 예산시장처럼 ‘개판’이 돼버려 이젠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훼손됐다. 관광객들의 손가락은 수만년의 역사를 단 10년 만에 날려버리는 타노스급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준다.

이 동굴벽화는 인물들이 팔다리의 관절을 꺾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과연 ‘수영하는 모습’인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인지 알 길 없다. 들판에 죽어 ‘널브러진’ 시체들로 보인다고 해도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알마시 눈에는 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벽화 이름을 그렇게 붙인 듯하다. 그렇게 보였다기보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꼭 ‘수영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할 만한 특별한 근거는 없다.

‘유영(遊泳)’은 인간들에게 가장 원시적이고 자유로운 상태다. 물속에서 가장 편하게 노닐던 ‘엄마 배속’의 상태로 돌아간다. 모든 속박이 사라진다. 심지어 나의 몸을 통제하는 중력도 사라진다.

알마시는 모든 생명이 말라버린 사막에서 싱싱한 생명의 원천인 물이 넘실대는 꿈을 꾼다. 그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꿈을 꾼다. 자유의 꿈이다. 조국 헝가리를 등진 알마시에게 세상은 사막과 다름없이 꽃 한송이 피울 수 있는 물도 말라버린 삭막한 곳일 뿐이다. 

세상 어디에도 호수나 강물처럼 자신을 넉넉하게 받아주고, 자신이 편안하게 몸담을 곳이 없다. 사막에서 발견한 동굴벽화의 그림들도 그의 눈에는 넘실대는 물속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수영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알마시가 캐서린의 몸에서 집착하는 부분도 목과 쇄골이 만나는 웅덩이처럼 파인 부분이다. 좁은 욕조 속에 캐서린과 함께 몸을 담근 알마시는 캐서린의 그곳을 어루만지며 옹색한 욕조가 아닌 그속에 몸을 담그고 자유롭고 싶어 한다. ‘수영하는 사람들’ 벽화가 그려진 동굴 속에서 숨을 거둔 캐서린도 깊고 푸른 호수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세상의 굴레에서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얻는 꿈을 꾸며 숨을 거뒀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목말라 보이는 알마시는 어쩌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를 닮았다. 엘뤼아르는 그의 대표 장편시 ‘자유’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그 모두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는 맺기를 반복한다.

“돌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는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들 위에…네 이름을 쓴다. 잠 깬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길들 위에, 사람들 북적이는 광장 위에도 네 이름을 쓴다….”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에 ‘자유’라는 이름표를 달아준다. 민족 사이의 증오와 분노로 불온하고 불안했던 시절 엘뤼아르는 민족과 국가로 얼룩지지 않는 ‘자유’를 꿈꾼다.

김지하 시인이 엄혹했던 독재시절 뒷골목 나무판자에 숨죽여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쓴다고 한 것처럼 엘뤼아르는 세상 모든 것에 ‘자유’라고 쓴다. 알마시도 세상 모든 것에서 넘실대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듯한 ‘자유’를 향한 목마름에 고통스러워한다.
 

 

관객들은 알마시의 목마름에도 공감하고, 세상 모든 것에 ‘자유’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는 엘뤼아르의 소망에도 공감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믿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는 아직도 ‘자유’와 ‘평등’에 타는 목마름을 느낀다. 민주주의의 두개의 기둥이 ‘자유’와 ‘평등’일 텐데 우리가 쟁취했다는 민주주의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우리는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애절한 고향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사랑이 충만한 곳에서 사랑 타령도 하지 않는다. 자유가 넘실대는 곳에서 자유인이 자유를 갈망하지도 않을 텐데 우리 모두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보면 분명 우리는 ‘자유 없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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