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시는 인간 자체로는 꽤나 훌륭한 인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막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막 탐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SNS에 ‘인생 샷’ 하나 올리지 않는 걸 보면, 사막 탐사가 ‘공명심’인 것도 아니다.
알마시는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고 하기 싫은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서 홀로 사막을 떠도는 것도 아니다. 조국 헝가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라를 위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만들기에 매달린 김정호 선생과도 결이 다르다.
알마시를 매슬로(Maslow)의 ‘인간의 욕구 5단계설’에 적용하면 승화된 욕망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self-realization)’에 도달한 인물이다. 모든 것을 초월해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한다. 헝가리의 귀족 출신이니 호구지책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황량한 리비아의 사막을 혼자 떠돌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막을 관찰하고 그 사랑의 대상을 묘사하고 기록할 때 알마시는 완벽하게 자아를 실현하고 충만한 인간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갈등하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아 보인다.
그랬던 ‘자유인’ 알마시의 스텝은 알마시가 ‘국제 사막클럽(International Sands Club)’에 가입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완전한 ‘자아실현’이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부득이 ‘조직’에 참여한다.
혼자서는 사냥도 힘들고, 저수지를 팔 수도 둑을 쌓을 수도 없다.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도 없다. 사막 탐사가들의 꿈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사막을 조망하고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이지만 알마시는 자가용 비행기를 장만할 능력이 안 된다. 부득이 항공기 사용이 가능한 영국의 ‘국제 사막클럽’에 가입한다.
‘국제 사막클럽’은 당연히 조직의 목적을 갖고 있다. 당연히 조직의 목적은 알마시의 ‘자아실현’ 욕구와 충돌한다. ‘국제 사막클럽’이 영국의 영향권에 있어, 헝가리 출신 알마시의 존재가 애매하기도 하다.
독일과 영국의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헝가리도 영국의 적대국이 된다. ‘자유인’ 알마시는 그 ‘관계’를 무시하지만 그것은 알마시 혼자 생각일 뿐이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알마시는 조국 헝가리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렇다고 영국이 알마시를 ‘우리 편’이라고 품어 주지도 않는다. 알마시 스스로도 어디에도 소속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 알마시는 영국의 ‘국제 사막클럽’ 소속으로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일 때 필요한 사막판 ‘대동여지도’ 작업에 참여한다. 당연히 하고 싶은 일에 제약이 생기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국제 사막클럽’에 점점 환멸을 느낀다.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그러던 와중에 사막에서 조난당한 연인 캐서린을 구조하기 위한 비행기가 필요해지자 이번에는 영국과 함께 작업한 ‘대동여지도’를 독일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독일 비행기를 얻어 캐서린을 구하러 간다. 알마시 입장에선 자아실현이지만 조직은 용납하지 않는다.
알마시는 조직이나 국가를 향한 충성에 오스카 와일드만큼이나 콧방귀를 뀐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애국심이란 악당들의 미덕(Patriotism is the virtue of the vicious)’이라고 이죽거렸던 인물이다. 모든 끔찍한 전쟁은 애국심이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해대니 그럴 만도 하다.
세계국가를 열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람(good man)’과 ‘좋은 시민(good citizen)’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머리를 긁적인다. 개인과 조직의 관계는 항상 문제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처럼 사람을 죽이는 악당이 돼야 애국심 충만한 ‘좋은 시민’이 되기도 한다. 개인이 속한 조직은 개인의 궁극적인 ‘자아실현’을 가로막기도 한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서 1단계부터 4단계(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관계 욕구, 인정 욕구)까지는 집단이나 조직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 속에서 이뤄지는 욕구들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꿈꾸는 궁극적 단계인 ‘자아실현’은 자신이 속한 조직과 충돌하기 일쑤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알마시처럼 좋은 사막 탐사가가 반드시 좋은 국제 사막클럽 회원이 되는 건 아니다. 알마시는 좋은 사람이지만 헝가리나 영국의 어느 곳에서도 좋은 시민이 되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좋은 엄마나 좋은 아빠가 좋은 직장인이 되기 어렵기도 하고, 좋은 아이가 항상 학교생활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선생님이 모두 교장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닌 듯하다. 학교생활 잘하는 아이는 좋은 아이라면 할 수 없는 일도 해야 하고, 교장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라면 하지 못할 일도 해야 한다.
좋아 보이는 정치인들도 있지만 그들이 모두 정치 조직 속에서 좋은 정치를 하도록 조직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모두 집단과 조직 속에서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아실현이 어려운 모양이다. 사회의 모든 조직이 그 속에서 관계를 맺은 구성원에게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도록 허용하고 도와줄 수 있다면 그 사회가 바로 유토피아일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