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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복수는 나의 것 (3) 24시간 휴대전화 끼고 사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과 소통한다고 믿지만 ... 현실은 수많은 불통의 현장들
국민과의 소통, 위정자의 덕목 ... 도통 수신되지 않는 국민 목소리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끌어가는 주인공들 중 하나인 류(신하균 역)는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 누나와 단둘이서 살아간다. 그 누나마저 신부전증으로 사경을 헤맨다. 류는 햇빛 한줄기 안 드는 주물공장에서 고된 노동으로 자신과 누나의 생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가뜩이나 고달픈 삶인데 설상가상 류는 청각장애인이다. 감독이 굳이 청각장애인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 장면➊ = 류의 누나는 신장 이식밖에는 도리가 없다. 막연히 신장이식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류는 자신의 신장을 누나에게 주려고 하나 안타깝게도 혈액형이 맞지 않는다. 의사는 누나에게 류의 신장이식이 불가능하다는 검사결과를 기계적으로 ‘통보’한다. 

의사는 류가 청각장애인인 줄 알면서도 일말의 배려도 없다.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 할 말만 하면 그만이다. 우리도 병원에 가면 1~2시간쯤 기다리다 겨우 만난 의사 앞에 가장 공손한 모습으로 두손 모으고 앉아 한두번쯤 당해 본 장면이다. 

류는 왜 자신의 신장을 누나에게 줄 수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의사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고 멀뚱멀뚱한 류가 마뜩지 않다. 청각장애인이게 맞춰주기 위한 부가적인 노고를 하고 싶지는 않다. 류의 청각장애가 괘씸하기까지 한 표정이다.

# 장면➋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류는 공장에서 해고당한다. 이미 한계상황에 내몰린 류에게 해고란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공장장 역시 의사처럼 청각장애인인 류에게 수어(手語) 통역자까지는 언감생심 기대할 수도 없겠지만, 최소한의 손짓 발짓이나 하다못해 필담(筆談)을 동원하는 성의조차 없이 무표정하게 다짜고짜 고용계약해지서를 내밀고 손도장 찍으라고 할 뿐이다. 

우리도 문자 메시지로 갈음하는 해고통지에 익숙해지고 있기는 하다. 류는 자신이 왜 해고되는지 알 길이 없다. 말을 할 수 없는 류는 ‘통사정’ 한마디조차 할 수 없다. 류가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수어는 공장장에게는 외계어다. 

공장장이 자신의 외계어를 열심히 들어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류도 안다. 그저 손도장 찍고 나오는 수밖에 없다. 손도장 누르는 류의 엄지손가락 손톱 밑에 낀 기름때가 애처롭다. 의사나 공장장이나 모두 청각장애인인 류에게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개떡같이’ 말해놓고 류가 ‘찰떡같이’ 알아듣기를 기대하고 ‘소통’을 완수했다고 믿는다.

의사나 공장장이나 자신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발신’했지만, 정작 수신자인 류에게는 그 메시지들이 전혀 ‘수신’되지 않는 불통(不通)의 현장들이다. 관객들에게 2개의 진땀 나는 불통의 장면들을 보여준 박찬욱 감독은 그래도 미진하다 싶었는지 3번째 불통의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비틀어 보여준다.
 

 

# 장면➌ = 류 누나의 신부전증은 아마 신장암쯤으로 악화했는지, 방바닥에 배를 움켜쥐고 뒹굴면서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류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대는 누나를 등지고 싱크대 앞에서 라면을 끓이면서 라면 한가닥을 ‘호로록’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류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완벽한 악마의 모습이다. 

그 순간 카메라는 옆집 모습을 비쳐준다. 방음이 제대로 될 리 없는 부실한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 모여 사는 4명의 고단한 청춘들은 나란히 그 벽에 귀를 대고 붙어서서 안타까운 황홀경에 빠지고 있다.

류 누나의 고통의 신음과 비명소리는 그들에게는 쾌락과 환희의 신음과 비명으로 들린다. 류 누나의 절박한 고통의 신호는 류에게는 들리지도 않고, 옆집 청춘들은 그 신호를 자기들 듣고 싶은 대로 변환해 듣는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생각하는 인간)라고 불리던 인간이 지금은 호모 코무니쿠스(Homo Communicus·소통하는 인간)로 진화했다고 한다. 저마다 휴대전화를 마치 신체에서 절대 분리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처럼 붙이고 24시간 메시지를 발신하고 수신하면서 살아간다. 누구나 자신들이 세상과 충분히 소통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도 소통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만만치 않다. 어쩌면 청각장애인이자 농아인 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듣고 싶은 말은 들리지 않고, 말 하고 싶은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당연히 전달할 수도 없다. 

류가 수어를 아는 영미(배두나 역)하고만 소통이 되듯 우리도 정말 내가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은 많아야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안 된다. 조금 불운하다면 그 수가 0에 수렴하기도 한다.

1990년에 엘리자베스 뉴턴(Elizabeth Newton)이라는 심리학자를 유명하게 만든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Tappers and Listeners)’이라는 실험결과가 흥미롭다. ‘두드리는 사람’에게 모두에게 익숙한 간단한 노래 제목을 주고 그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게 하고 ‘듣는 사람’은 리듬만 듣고 그 곡을 알아맞히는 실험이다. 

실험 결과 듣는 사람은 40곡 중에 1곡(2.5%)꼴로 알아맞혔다고 한다. 확률이 매우 낮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두드리는 사람들은 ‘개떡’같이 테이블에 리듬을 두드리면서도 상대가 그 곡을 알아맞힐 확률이 50%는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메시지 발신자의 기대가 얼마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지 보여주는 실험이다.
 

 

위정자들이야말로 국민들이 아무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게 덕목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국민들이 아무리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알아듣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자신들은 개떡같이 한마디 던져놓고 국민들이 찰떡같이 알아들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듯하다. 

문득, 영화 속에서 류의 누나처럼 국민들이 이런저런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대는데 돌아선 채 라면 황홀경에 빠져있는 류의 모습 같기도 하고, 국민들의 고통의 비명을 국민들이 호강에 겨워 내지르는 ‘소리’쯤으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딴생각하는 옆집 무심한 청춘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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