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2가지 종류의 ‘무정부주의자’들을 보여준다. 하나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부르짖는 영미(배두나 역)다. 그는 재벌해체와 미군철수를 외친다. 또다른 무정부주의자는 자본가 동진(송강호 역)이다. 역설적이지만, 영미가 싫어하는 자본가가 영미처럼 ‘정부의 힘’을 믿지 않는다.
영화 속 첫번째 무정부주의자는 영미다. 영미가 도로 한복판에 서서 운전자들에게 나눠주는 붉은색 전단에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2가지 지향점이 담겨 있다. ‘재벌해체’와 ‘미군 철수’다.
똑같은 주장을 펼치는 단 2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을 찾기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은 다양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무정부주의는 힘 없는 개인을 향한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 정부가 제멋대로 일으켜 개인들을 ‘선택의 자유’ 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반대한다.
공장에서 자본가들로부터 부당하게 해고당해 꼼짝없이 일가족이 쥐약 먹고 동반자살할 수밖에 없는 팽기사(기주봉 역)나, 공장에서 이유 없이 해고당하고 누나를 살리기 위해 장기밀매업자에게 자기 신장을 팔러 갈 수밖에 없게 되는 류(신하균 역)의 모습을 보면, 자본가를 혐오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만도 하다.
그렇다면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편에 서주는 정부에 고마워해야 할 텐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무정부주의자는 외동딸 유선을 영미에게 유괴당한 중소기업 사장 동진이다. 무정부주의자 영미가 타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본가도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이 역설적이다.
동진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적 자본가(Anarcho-Capitalist)’에 해당한다. 똑같은 무정부주의라는 명칭이 들어가지만 전혀 다른 무정부주의다. 금지옥엽 외동딸을 유괴당한 중소기업 사장 동진은 경찰(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자신이 보유한 자본의 힘으로 딸을 되찾으려 시도한다.
유괴범 영미와 ‘이해 당사자’끼리 ‘사장의 논리’에 입각해 직접 협상한다. 동진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단 시장을 신뢰한다. 시장에서는 서로 가격만 맞으면 무엇이든 ‘자유로운 교환’이 가능하다. 유괴범이 확보한 딸을 돈으로 교환하려 한다. 경찰은 엄밀한 의미에서 제3자다.
유괴범들이 원하는 대로 1000만원을 지불했지만 딸 유선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자 동진은 극대노한다. 이쯤 되면 대개의 피해자들은 정부에 그 처벌을 맡기는 게 일반적이지만, 동진은 그 처벌도 국가를 통하지 않고 자신의 자본의 힘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동진은 현직 형사 1명을 돈으로 매수해 자신의 사설탐정으로 고용한다.
아들의 수술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형사 또한 시장에서 자신이 보유한 공권력을 동진의 돈과 교환한다. 아마 이 현직 형사도 영미처럼 무정부주의자인 모양이다. 시장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돈과 교환하는 류나 시장에서 자신이 보유한 공권력을 동진에게 파는 형사나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의 슬픈 삽화들이다.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이 이윤추구를 위해 하는 모든 행위에 정부가 아무런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에서 말씀하신 대로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모든 시장 주체들의 자유에 맡겨야 경제가 발전하고 나라도 부강해진다고 한다.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뜻하는 ‘레세페르(Laissez-faire) 자본주의’는 우리말로 설명하면 ‘냅둬 자본주의’쯤 되겠다. 자유방임주의가 그 폐단으로 인해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경제적 개입주의(Economic interven tionism)’로 방향을 바꾸는가 싶더니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타고 이제 아예 무정부주의 자본주의라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냅둬 자본주의’로 회귀한다.
결국 영미처럼 힘없는 사람들은 정부가 자본가의 횡포를 ‘내버려두고(laissez faire)’ 있다고 분노하고, 자본가들은 반대로 정부가 자신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분노한다. 자본주의를 증오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이나 동진과 같은 자본가들이나 모두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부에 욕을 해댄다.
정부란 으레 그렇게 동네 욕받이 같은 딱한 처지다. 오죽했으면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까 묻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쫌’ 물어 달라”고 호소했을까 싶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지나가야만 하는 좁은 길 양쪽에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난감한 상황을 흔히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란 관용구로 표현한다. 그리스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에서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병사들과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좁은 해협에 도달하는데, 한쪽에는 바닷물을 한꺼번에 마셨다가 토해내서 바다를 뒤집어버리는 괴물 카리브디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머리 여섯개 달린 괴물 스킬라가 배를 노리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스킬라 쪽으로 배를 몰아 스킬라가 병사들 여섯을 잡아먹는 사이에 해협을 무사히(?) 빠져나온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라는 말은 둘 다 위험천만하지만 조금이라도 희생이 덜할 것 같은 쪽을 택한다는 말로 사용된다.
모든 정부의 운명이 오디세우스와 같은 듯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괴물들이 버티고 있다. ‘없는 사람들’도 정부에 핏대 세우고 뒤집어엎으려 하고 ‘있는 사람들’도 정부를 잡아먹으려 든다. 이쪽저쪽 모두 무섭고 위험하지만 대개의 자본주의국가 정부들은 오디세우스가 스킬라 쪽을 선택한 것처럼 자본가들 쪽으로 배를 붙여 위험지역을 빠져나가곤 한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항해해야 하는 것은 정부만이 아니라 국민들도 매한가지이다. 선거 때만 되면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처럼 양쪽에 버티고 선 양대(兩大) 괴물 중에서 어느 괴물이 그래도 그나마 덜 위험할지 판단해야 한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정부와 의료계라는 또 다른 양대 괴물들 사이에서 또다시 어떤 괴물이 그나마 덜 위험한 괴물인지 판단해야 한다. 매일매일 오디세우스처럼 살아야 한다. 진땀 나는 일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