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재기발랄한 형제감독 조엘 코언(Joel Coen)과 이단 코언(Ethan Coen)이 각본을 쓰고 감독해 제작한 ‘파고(Fargo)’는 범죄물이지만 재기발랄한 감독들이 즐겨하듯 범죄물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우리가 진지하고 심각하게만 받아들이는 현실의 허무맹랑함과 어이없음을 마음껏 조롱한다. 영화의 시작에 앞서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의 ‘안내문’이 화면 가득 뜬다. “이 이야기는 실화(true story)다. 영화에 그려진 사건들은 실제로 1987년 미네소타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생존자들의 요청으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꿨다. 희생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그 나머지 부분들은 정확하게 사실과 부합하게 그렸다.” 간단히 말하면 실제인물의 이름만 바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영화라는 안내문이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정중한 문구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코언 형제감독이 이 범죄물의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처럼 숙연한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당연히 무언가 너무나 끔찍한 살인과 범죄를 예상하고 영화를 따라간다. 그런데 끔찍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영화화’할 만큼 경악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싶게 끝난다. 조금은 싱겁다는 느낌이
나름대로 음악교육을 받은 ‘인텔리’이자 연장자이기도 한 콜름이 ‘동네 바보형’인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했다면 콜름의 뜻이 관철되는 게 통상 정상적이다. 한데 파우릭은 의외로 절교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계를 고집한다. 예상치 못한 파우릭의 고집에 멈칫했던 콜름은 한 번만 더 말을 걸면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위협한다. 그래도 파우릭이 말을 걸자 정말 손가락을 자르는 엽기적인 총공세를 펼친다. 파우릭은 콜름의 난폭한 공세에 난폭하게 대응하지도 않는다. 격렬하게 그 부당함을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무표정하게 눈만 껌뻑거릴 뿐이다. 그러면서도 절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콜름이 유리할 것 같았던 싸움은 묘한 방향으로 흐른다. 싸움을 시작했던 콜름이 점점 수세에 몰린다. 무엇보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생명과도 같은 손가락 5개를 모두 자른 건 치명적이다. 결국 콜름이 먼저 “아일랜드 내전도 끝난 모양이니 우리도 이쯤에서 싸움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슬그머니 종전을 제의한다. 그런데 모두 ‘없었던 일’로 하자는 콜름의 제안에 감지덕지할 것 같았던 파우릭은 뜻밖의 무시무시한 대꾸를 한다. “아니다. 이 싸움은 네가 죽어야 끝난다.” 그렇게 콜름
몇개의 카테고리(category)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속에 우격다짐으로 집어넣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 대단히 난폭해질 수 있어 썩 바람직하지 않다. ‘여자와 남자’라든지 ‘흑인ㆍ백인ㆍ황인’이라는 분류도 그렇고, ‘상류층ㆍ중산층ㆍ서민층’이라는 분류도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현상이나 인간은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집어넣어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이다. 사람들은 예술작품이나 영화를 대개 ‘장르(genre)’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한다. 어떤 영화든 복합적인 요소들로 채워져 있어 특정한 장르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맥도나 감독의 ‘이니셰린의 밴시’에 굳이 장르의 딱지를 붙인다면 아마도 코미디와 블랙코미디 경계에 걸친 듯도 하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기도 하다. 아동문학계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영국의 아동문학가 로알드 달(Roald Dahl)은 블랙코미디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여서인지 동화에도 ‘블랙코미디적’ 요소들을 솜씨 좋게 버무려낸다. 그래서 그의 동화들은 가끔은 잔혹동화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로알드 달이 설명하는 블랙코미디의 본질은 그럴듯하다.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머리 위로 페인트가 가득 담
이니셰린 섬에서 ‘동네 바보형’ 파우릭과 잡담으로 시간을 죽이고 살던 콜름은 뜻밖에도 한때는 음악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랬던 콜름이 어쩌다가 외진 이니셰린 섬까지 흘러들어와 ‘청산별곡’ 같은 삶을 살게 됐는지 영화는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콜름은 어느날 문득 음악가로의 삶을 그리워한다. ‘노스탤지어(향수)’에 사로잡힌 거다. 그는 아마도 음악가로서의 삶에 실패했든지, 음악 자체가 무의미해져서 음악을 버렸을 듯하다. 영화는 콜름이 왜 오래전에 음악을 버렸고 또 갑자기 음악가의 삶에 ‘향수’를 느끼게 됐는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자신이 떠나온 과거에 느끼는 향수란 대개 이성적이라기보단 대단히 감성적이다. 설명 가능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리도 없다. 콜름은 ‘청산별곡’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음악가의 삶으로 돌아가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기겠다는 결심한다. 그런데 음악가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의 첫 조치는 바이올린과 악보를 다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그동안 잡담으로 자신의 시간을 죽였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파우릭을 자신의 삶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콜름의 입장에서는 다시 음악에 매진하겠다는 상징적 조치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파우릭
이니셰린 섬은 아일랜드에서 격리돼 너무나 똑같거나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작은 공동체다. ‘다름’이 없으니 자극이 있을 리 없고, 자극이 없으니 변화가 있을 리 없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은 오늘과 똑같을 것이 분명한 질식할 듯한 따분함과 권태감만이 짓누른다. 변화가 없다는 것은 발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퇴화를 뜻하기도 한다. 모두 똑같다고 평화스러운 건 아니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이니셰린의 주민들은 모두 똑같이 오리올단 부인이 운영하는 동네 유일의 잡화점에 모여 생사람 잡는 ‘가십(gossip)’에 열을 올리거나, 아니면 파우릭과 콜름처럼 사소하다면 사소한 ‘절교’ 문제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기도 한다. 콜름은 절교의 실현을 위해 손가락 5개를 모두 자르고, 파우릭은 절교를 당하느니 차라리 너를 죽이고 말겠다며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그렇게라도 해야 질식할 것 같은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양이다. 이처럼 매우 균질적으로 똑같은 이니셰린의 주민들 중에서 균질적이지 않은 거의 유일한 ‘다른’ 주민이 파우릭의 여동생인 시오반(Sioban)이다. 시간이 중세 어느 시점쯤에서 멈춰버린 듯한 이니셰린 섬에 표류한 듯한 현대
# 아일랜드 출신 맥도나 감독이 철저하게 아일랜드 출신 배우를 동원해 가장 ‘아일랜드스러운’ 모습을 그려낸 영화가 ‘이니셰린의 밴시’다. 그 ‘아일랜드스러움’의 하나가 가십(gossip)이다. # 아일랜드 사람들은 ‘허물없는 대화를 즐기는 사람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따뜻하고 친근한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가십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엔 아일랜드 사람들의 조금은 특별한 인사말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What's the craic?”이다. 우리가 “안녕하세요?”라고 하듯 이 사람들은 “What’s the craic?”이라고 한다. 영어로 치면 “What’s up?”에 해당할 텐데 뉘앙스는 조금 다르다. 아일랜드어인 craic은 영어의 크랙(crack)이다. 균열이라는 의미도 있고, 총소리 빵!으로도 사용하고, 폭탄의 의미도 있다. 마약의 은어로도 쓰이고, 메시나 네이마르같이 화끈하게 한방에 승부를 결정짓는 축구선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What’s the craic?”라는 인사말은 결국 “뭐 좀 화끈하고 뿅가는 소식 없냐?”쯤 된다. 화끈하고 뿅가는 뉴스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할
콜름의 ‘절교 선언’으로 시작한 두 절친의 갈등은 예측가능한 궤도를 벗어난다. 가히 안드로메다급이다. 콜름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듯한데, 아무런 설명이나 양해도 구하지 않고 파우릭에게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한다. 파우릭은 콜름의 ‘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접근하고 말을 건넨다. 콜름은 그것을 파우릭의 ‘도발’로 받아들인다. 급기야 파우릭이 말을 걸 때마다 자기 손가락 한개씩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한다. 파우릭은 콜름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한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분노한다. 복수의 방법은 계속 말을 거는 것이다. 결국 콜름은 자기 손가락 5개를 모두 잘라 파우릭의 현관문에 패대기친다. 그 손가락을 먹은 파우릭의 ‘반려 당나귀’는 어처구니없게도 그 손가락이 목에 걸려 죽는다. 파우릭은 당나귀의 복수에 나서면서 “당나귀 복수를 위해 내가 ○○일 ○○시 정각에 너의 집에 불을 지를 거다, 그 시각에 꼭 집 안에 있다가 타 죽어야 한다”고 통보한다. 파우릭은 콜름이 집 안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콜름의 집에 불을 지른다.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에 따라 두 사람이 내놓는 해법들은 ‘헐~’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황당한 것들이지만 본인들은 ‘신의 한 수’ 놓듯 진지하고 결연하
지난해가 올해 같고, 어제가 마치 오늘인 것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니셰린’ 섬. 조용한 마을에서 경천동지할 변고가 발생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똑같을 것만 같았던 ‘절친’ 파우릭과 콜름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다. 콜름이 어느 날 ‘절친’ 파우릭에게 던진 절교 선언은 황당할 정도로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닫는다. 황당하긴 하지만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자동차끼리 충돌하면 대개는 ‘쌍방 과실’이지만, 운전자들은 결코 자기 과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사자끼리 해결하라고 내버려둔다면 몸싸움까지 벌어질지 모르겠다. 파우릭과 콜름은 모두 ‘자신의 잘못은 1도 없는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이다. 피해의식이란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부정적인 언행을 했을 때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억울한 피해자로 인식하는 심리를 말한다. 한마디로 ‘남 탓 정신’이다. 콜름의 마음속에선 아무것도 이룬 일 없이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낸 게 파우릭 때문이라는 피해의식이 고개를 든다. 파우릭은 가해자, 자신은 피해자다. 어제까지의 친구 파우릭에게 느닷없이 분노하고 절교 선언과 함께 접근금지를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매코믹 부인(Mrs. McCormic)이라는 노파가 등장한다. 핼러윈에 등장하는 ‘마귀할멈’과 같은 형상이다. 불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뜬금없이 가족 누군가의 죽음을 예언한다. 이니셰린 섬의 ‘예언자’이다. 영화 제목 속의 ‘밴시(banshee)’가 바로 이분이다. ‘밴시’라는 말은 아일랜드 민담(民譚)에 전해져 내려오는 죽음을 예고하는 마녀다. 우리로 치면 신내림 받은 무당과 같은 존재인가 보다. 아일랜드의 ‘밴시’는 마을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알고 동구 밖 언덕에서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로 꺼이꺼이 운다고 한다. 그 흐느낌 소리가 얼마나 높고 날카로운지 그릇이 깨질 정도라고 전해진다. 엄청난 데시벨로 징징대는 모양이다. 멀쩡한 사람도 그 울음소리에 죽어 나가 죽음의 예언이 실현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니셰린 섬의 ‘밴시’인 매코믹 부인은 마을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그 집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한다. 파우릭의 집에 와서 파우릭의 여동생 시오반에게 따뜻한 우유 한 잔 잘 얻어 마시고 식구라곤 파우릭과 시오반 2명인 이 집구석에서 2명이 죽어 나갈 것이라고 예고한다. 우유를 대접받고 덕담 대신 악담을 퍼부은 셈인데, 시오반은 놀라지도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이니셰린’ 섬 일상의 모습은 묘하다. 일견 목가적이고 평화스러워 보이면서도 왠지 절망적인 느낌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차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니셰린이라는 섬에 젊은이도 안 보이고 동네에 아이들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에도 아이들 손님은 없다. 영화 속 ‘이니셰린’ 섬에 사는 인물들은 모두 혼자 산다. 중년의 파우릭은 중년의 노처녀 여동생 시오반과 살면서, 아이 대신 ‘반려 당나귀’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중늙은이 콜름도 반려견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마을의 경찰서장 역시 정신이 조금은 온전치 못한 10대 아들을 ‘성추행’해가면서 혼자 산다. 틈만 나면 아무나 붙잡고 누군가의 죽음을 예언해대는 마을의 노파(밴시ㆍBanshee)도 당연히 혼자 산다. 그렇게 모두 혼자 사는데 아무도 ‘짝짓기’를 희망하지 않고,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모두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회지로 떠난 한적한 섬마을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마을 주민들 모두 작정하고 결혼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섬이다. 오직 정신 발육이 상당히 지체된 경찰서장의 10대 아들만이 파우릭의 노처녀 여동생 시오반을
이니셰린의 ‘절친’ 콜름이 파우릭에게 느닷없이 절교를 선언하고 파우릭이 나타나면 자리를 피하고 멀리하자 파우릭은 무언가 가벼운 오해 때문에 콜름이 삐친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오해가 있었다면 풀어줘야겠다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콜름의 집을 찾아가지만 집은 비어 있다. 파우릭은 콜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빈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둘러본다. 무료하게 콜름의 빈집을 둘러보던 파우릭의 표정이 차츰 묘해진다. 콜름의 집은 파우릭의 집과 다름없는 시골의 평범한 농가인데, 그 안에 채워진 물건들은 파우릭의 그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생경한 것들이다. 축음기가 있고, 세계지도도 있고, 이국적인 가면과 꼭두각시 인형도 놓여있다. ‘절친’이라고 생각해왔던 콜름에게 낯섦을 느끼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 물건들은 콜름의 ‘기억’들이다. 파우릭에게는 없는, 파우릭과는 너무나 다른 가치들에 관한 ‘기억’들이다. 서로 공유하는 기억이 없다는 것은 공유하는 가치가 없다는 것과 같다. 관객들은 그 장면에서 파우릭과 콜름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어쩌면 콜름은 그저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파우릭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을 뿐, 파우릭을 친구나 우
“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폐결핵 요양차 잠시 벽촌 시골마을에서 지내던 이상의 단편 수필 「권태」의 도입부 문장이다. 아무런 변화도, 할 일도 없는 벽촌에서의 무료함에 이상은 진저리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마을 아이들은 논두렁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누구 ×이 더 굵은지 ‘×싸기 시합’을 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무료함과 싸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무대는 아일랜드에 인접한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작은 섬이다. 그 분위기는 문득 이상의 수필 「권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니셰린이라는 말은 아일랜드어로 ‘아일랜드의 섬’이라고 한다. 아일랜드도 섬이니 섬에 딸린 섬인 셈이다. 가뜩이나 외부와 단절된 섬에서 또 한번 단절된 곳이다. 갈라파고스 섬이 외부와 단절돼 진화가 멈춰버렸듯 이니셰린도 시간이 멈춘 듯하다. 바쁜 현대인은 가끔씩 일부러 바쁜 시간을 시간을 쪼개서라도 ‘멍 때리기’를 하는 모양인데, 24시간 멍 때릴 일밖에 없는 무료한 이니셰린 섬 사람들에게 무료함이란 맞서 싸워야만 하는 끔찍한 괴물이다. 이니셰린의 둘도 없는 친구인 파우릭과 콜름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권태로운 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