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추론(推論)’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플린 신부가 ‘커밍아웃’한 것도 아니고, 목격자도 없고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그저 ‘추론’할 뿐이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의 ‘추론’ 방식은 관객들이 보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추론’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더욱 황당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짐작하고 예측할 때 흔히 ‘추론’의 방식을 동원한다. 추론이란 눈에 보이고 이미 알려진 사실을 통해 눈에 안 보이고 아직 알 수 없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 방식이다. 인류가 제한된 지식을 획기적으로 늘려온 과학적 탐구방법론이기도 하다. 추론의 방법은 크게 연역적 추론과 귀납적 추론 2가지로 나뉜다. 연역적 추론은 불변의 절대 명제에 따른 추론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왕은 사람이다→그러므로 왕은 죽는다”는 식이다. 지금 왕은 아직 안 죽었지만 절대명제에 따르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귀납적 추론은 이와 반대로 개별적 사례들을 나열해 결론을 도출한다. “A는 인간인데 죽었다. B도 인간인데 죽었다. C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플린 신부가 자기 입으로 흑인 중학생 아이와 동성애의 죄를 범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 하지만 플린 신부는 끝까지 부인한다. 수사 권한도 없고 형사 콜롬보나 CSI 과학수사대급의 추리력과 수사능력도 갖추지 못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네가 네 죄를 알렸다’고 분기탱천하는 원님 재판 수준을 맴돈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순순히 ‘자복’하지 않는 플린 신부에게 최후의 협박을 한다. 플린 신부를 둘러싼 의혹을 플린 신부의 전 근무지와 교구의 수녀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한다. 신부의 비위나 비리 의혹을 조사할 권한도, 그렇다고 징계권도 없는 수녀들에게 물어보겠다는 말에 플린 신부는 “차라리 주교회의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라”고 응답하지만,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수녀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물어보는 방법을 택하겠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하면 플린 신부의 ‘추악한 의혹’을 동네방네 소문내겠다는 뜻이다. 플린 신부는 명색이 성직자인 수녀원장이 이런 간교한 수를 동원하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때까지 수녀의 추궁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던 플린 신부는 소문내겠다는 협박 한마디에 전의(戰意)를 상실한다. 플린 신부는 소문이라
영화 ‘다우트’ 속에서 감독은 2개의 상반된 식사 장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사제관에서 다른 신부들과 식사하는 장면이다. 또 하나는 ‘보수적’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이 수녀원에서 수녀들과 식사하는 장면이다. 플린 신부는 피가 철철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가운데 두고 신부들과 술을 마셔가면서 ‘너절한’ 수다를 떨고 킬킬대면서 식사를 한다. 사제복을 입은 건달들의 회식장면 같다. 반면에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과 수녀들은 사관생도들처럼 경직된 자세로 완전한 침묵 속에서 엄숙하게 ‘깨작’거린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식사처럼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식기 옆에 놓인 작은 벨을 흔들어 모두를 집중시키고 꼭 해야 할 말만 한다. 그 벨 또한 좌장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만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먼저 말을 꺼낼 자유조차 없다. 저러고 먹느니 차라리 굶고 밤에 몰래 컵라면 끓여 먹는 게 낫겠다 싶다. 근엄하고 엄격한 교장 선생님이기도 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학생들을 죄수처럼 대하고, 자유분방한 플린 신부는 학생들을 친구처럼 대한다. 플린 신부는 ‘러닝셔츠’ 바람으로 엉덩이를 흔들어가며 학생들과 농구를 한다. 수녀들 앞에서 흡
‘진보적’인 플린 신부가 뉴욕 브롱크스 교구에 부임하자 ‘보수적’인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이 예민해진다. 영화의 배경인 1964년은 미국 사회도 격변했지만, 가톨릭교회 역시 큰 변화를 겪은 시기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가 선종하고, 교황 바오로 6세가 즉위했는데 둘 모두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정작 말년에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했다는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다. 영화 속에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교구 학교 교실에 의도적으로 교황 사진을 걸지 않는다.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23세의 ‘존영’은 캐비닛 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다. 알로이시우스로선 ‘진보적’이었던 데다 아동 성추행까지 은폐했던 교황을 ‘나의 교황’으로 모실 수 없다. 또한 신임 바오로 6세 역시 ‘진보적’이니 그의 ‘존영’조차 모실 마음이 없는 듯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진보적인 요한 23세 교황이 ‘아동 성추행 사제’들을 비호했던 것으로 미루어 진보적인 플린 신부도 아동 성추행자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의구심을 갖는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곧바로 제임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의 동향을 감시하라’고 지시한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동시에 브롱크스 교구에 부임한 ‘입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은 플린 신부가 ‘남아 소아성애자’라고 의심한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비행(非行)’ 했다는 플린 신부의 자백도 없고, 증인과 증언도 없다. 정황 근거라고 해봤자 ‘플린 신부를 만나고 돌아온 흑인 학생 도날드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났다’는 게 전부다. 그 정도만으로 플린 신부를 ‘소아 성애자’로 단정하려면 판타지 소설이나 막장드라마 작가급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에게 수사권이 있다면 아마도 플린 신부 주변 수십 수백 군데를 ‘압수수색’해서 없는 증거를 만들어내기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에겐 압수수색 권한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증거도 없이 혼자 마음속으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다음 플린 신부를 ‘사실상(de facto)’ 흉악범으로 대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수녀원장실로 면담하러 온 플린 신부를 문밖에 나와 막아선다. 조금 있으면 제임스 수녀가 오기로 돼 있으니 그때까지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감옥을 탈출해 갑자기 수녀원에 찾아온 흉악범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실정법상(de jure)’ 적어도 현재까지 플린 신부는 범죄자가 아니지만,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는 ‘사실상 소아성
카톨릭 교회의 보수적 가치를 신봉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에게 진보적인 플린 신부는 ‘불온’한 요주의 인물이다. 당연히 적개심을 품는다. 플린 신부는 부임 첫 강론부터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듣기에 조금 ‘수상한’ 발언을 한다. 플린 신부가 발언한 내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난파선에서 탈출해 구명정에 혼자 남은 선원이 자기가 배운 대로 별자리에 의존해 바다를 헤쳐나간다. 그러면서 선원은 계속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한다. 외톨이가 되면 별자리까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모두 그렇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그것을 플린 신부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든지, 아니면 플린 신부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모종의 죄를 괴로워하는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진보의 바람이 잔뜩 든 데다 신앙심까지 의심스러운 플린 신부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운다. 플린 신부는 분명 무슨 ‘사고’를 치고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분명 ‘사고’를 칠 것이며, ‘사고’를 쳐야만 한다. 플린 신부가 ‘사고’를 쳐줘야만 그와 함께 날아온 불온한 진보의 바람을 몰아내고 숭고한 보수의 가치를 지켜낼 수 있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에게 플
‘다우트(Doubt)’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연극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연극 ‘다우트’로 2004년에 퓰리처상까지 받은 존 패트릭 샌리(John Patric Shanley)가 2008년에 자신이 직접 감독으로 자신의 연극 작품을 무대가 아닌 스크린으로 옮긴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라기보단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Philip Seymour Hoffman)과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펼치는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적 배경은 1964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미국 뉴욕시 북부 브롱스(Bronx) 지역이다. 1964년은 ‘진보’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그다음 해다. 미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본격화하던 시기였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둘러싼 온갖 음모론이 횡행하던 때였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모든 미국 국민에게 ‘의심 마귀’가 깃들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흑인 민권운동을 중심으로 사회 변화가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 알로이시우스(Aloysius) 수녀원장이 교장으로 있는 보수적인 가톨릭 학교도 어쩔 수 없이 흑인 학생 1명을 받아들였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이 모든 것이 못
영화 속 간호사 해나(Hana)는 선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해나가 돌보는 부상당한 병사들은 해나의 선하고 상냥한 미소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병사들은 해나에게 키스 한번만 해주면 고통도 잊고 잠도 잘 올 것 같다고 보챈다. 성희롱으로 영창에 갈 만한 작태들이다. 해나는 그런 병사들에게도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마지막’이라며 키스해 준다. 성희롱일 수도 있는 부탁을 해나는 ‘선의’로 받아들인다. 지켜보던 모든 병사가 자기도 해달라고 아우성친다. 해나는 팬들의 사인 요청을 모두 들어주지 못하는 스타처럼 미안한 미소를 짓고 빠져나간다. 어느날 해나를 ‘언니’처럼 따르는 어린 간호사 동료가 해나에게 데이트 비용을 빌려 달라고 한다. 자기도 돈 없다고 웃던 해나는 어린 간호사가 또다시 칭얼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돈을 건넨다. 갚을 수 있는지, 언제 갚을 것인지 빌리는 사람도 말하지 않고 빌려주는 사람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선의’로 처리한다. 전신 화상을 입은 알마시가 치료를 위해 병원 수송차량을 타고 먼 길을 가기엔 어렵다는 걸 알아챈 해나는 그와 함께 폐허가 된 수도원에 남기로 한다. 해나는 그곳에서 근처 군부대 지뢰
클리프턴과 알마시는 클리프턴의 아내 캐서린을 둘러싸고 풀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난해한 문제와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둘 사이에 놓인 영토와 둘 사이에 놓인 ‘여자ㆍ남자’ 문제다. 두 나라 사이에 놓인 영토는 전쟁의 영원한 주제가 되고, 둘 사이에 놓인 여자ㆍ남자는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가 된다. 독도가 스스로 판단해서 ‘나는 누구의 섬’이라고 선언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캐서린 역시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풀기 어려운 갈등과 번민 속에서 클리프턴과 알마시는 ‘해결’을 포기하고 나름대로의 ‘결단’을 내린다. 알마시는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클리프턴에게 돌아가겠다고 사라진 캐서린을 찾아 나서고 결국 파티장에 쫓아가 ‘덮치는’ 결단을 한다. 그렇게라도 자기의 여자로 만들려고 한다. 클리프턴의 ‘결단’은 더욱 황당하다. ‘바람난’ 아내 캐서린을 프로펠러 비행기에 태우고 알마시를 향해 돌진한다. 둘 다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어이없는 ‘결단’만 내린다. 관객들의 혀를 차게 하는 ‘말도 안 되는’ 문제 대응 방식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말이 된다’고 생각해낸 ‘결단’인 모양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주인공 알마시는 아무런 수식어 없는 글쓰기를 고집하는 인물이다. 문장 속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수식어는 대개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다. 감성을 극도로 배제하면 지극히 건조한 이성만 남는다. 마치 얼굴에서 육기(肉氣)를 모두 제거한 금욕주의적 조선 선비와 같은 얼굴이 된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알마시가 내뱉는 말이나 그 표정은 인간의 온갖 ‘감성’을 송두리째 적출해버리고 그 자리를 온전히 이성으로 채운 모습이다. 저것이 과연 가능할까 믿어지지 않는데, 아니나 다를까 캐서린과 마주친 순간부터 이성은 사라지고 감성이 알마시를 점령한다. 우아한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고, 캐서린을 스토킹하고, 송년파티장에서 캐서린을 납치하듯 파티장 구석으로 끌고가 욕정을 채우기도 한다. 캐서린을 구하기 위해 독일군에게 군사비밀정보에 해당하는 사하라 사막의 지도를 팔아넘기고 비행기를 얻는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행기를 구해 캐서린이 기다리고 있는 사막의 동굴로 돌아가지만 캐서린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다. 동굴 속에서 캐서린의 시신을 안고 나오며 오열하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한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시신을 비행기에 태우고 독일군 방공포대를 향해 자살비행을 한다. 스스로
알마시와 캐서린은 보통사람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서로의 매력에 취하고, 결국 불륜 관계에 빠져든다. 이를 알아차린 캐서린의 남편 클리프턴은 좌절하고 분노한다. 클리프턴은 2인용 프로펠러 비행기에 아내 캐서린을 태우고 알마시를 만나러 사막으로 향한다. 알마시는 사막에서 영문도 모른 채 클리프턴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클리프턴은 가미카제식 자살비행을 감행한다. 알마시를 향해 돌진하는 클리프턴의 눈빛을 보면 아내와 간통한 알마시를 프로펠러로 죽이고 싶은 듯한 분노가 느껴진다. 단순히 알마시와 ‘너 죽고 나 죽고’가 아니라 아내 캐서린까지 다 같이 죽자고 한다. 알마시를 향한 클리프턴의 자살비행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미디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는 ‘격분한 A씨가 B씨와 C씨를 죽이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딱하고 우울한 소식을 접했기 때문인 듯하다. 관객들에게는 간통한 아내를 프로펠러 비행기에 태우고 아내와 간통한 남자를 향해 자살비행을 감행하는 클리프턴의 행위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궁금하다. 공감과 지지도, 비난도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클리프턴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의 행위는 범죄행위다. 클리프턴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경찰
헝가리 출신 알마시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하는 ‘국가와 민족’이란 집단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 적개심까지 느낀다. 그래서인지 알마시의 꿈은 왜소하고 멸시당하는 헝가리 민족을 벗어나 세계인이 되는 거다. 알마시의 조국 헝가리의 역사는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근대 이후 헝가리는 주변 강대국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옛 소련)의 세력 및 관계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찢겨나간다. 헝가리 역시 살아남으려 이쪽저쪽에 붙어보지만 약소국의 결과는 항상 참담하다. 헝가리 귀족가문 출신이자 엘리트인 알마시는 헝가리란 국적 때문에 이웃 강대국의 귀족가문이나 엘리트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민족정체성’이 헝가리란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그는 헝가리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그들과 어울린다. 알마시는 항공기 추락으로 처참한 화상을 입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신음 속에 구사하는 그의 영어만은 영국인이 들어도 틀림없는 영국인의 발음이었던 모양이다. 신원을 밝혀줄 아무런 증명서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그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공인받는다. 그 정도면 알마시는 남루한 ‘헝가리인’에서 벗어나 진정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