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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파고(Fargo) (6)
일본의 문화적 규범 ‘메이와쿠’ ... 속으로 무시해도 겉으론 예의
한국도 일류에게만 예의 지켜 ... 일류만 대접 받는 이상한 사회
세계 최고 자살률 원인 따져봐야 ... ‘얀테의 규율' 새겨보면 어떨까

코언 형제 감독은 영화 속에 그들다운 매우 짧지만 무척이나 흥미로운 시퀀스를 배치한다. 미네소타주의 브레이너드(Brainerd)라는 작은 시의 여자 경찰서장 마지(Marge)는 고속도로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용의자들과 하룻밤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2명의 나이 어린 창녀를 찾아가 용의자의 정보를 수집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매우 신선하다 못해 코믹하기까지 하다.
 

 

군더손(Gunderson)이란 성(姓)을 보면 마지는 노르웨이계 이민자다. 통통한 어린 창녀들도 영화 속에서 성을 밝히진 않지만 특유의 억양으로 짐작건대 노르웨이계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코언 감독은 북유럽, 특히 ‘얀테의 규율(Laws of Janteㆍ난 남보다 특별하지 않다)’이라는 노르웨이ㆍ덴마크 특유의 문화적 규범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의 배경을 굳이 생소한 ‘미네소타’로 정하고 주인공에게 노르웨이 이름을 부여한 듯하다. 미국 미네소타주는 인구 570만여명 중에서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주축으로 한 북유럽 이민자들이 30%가량을 차지하는 특이한 주다. 북유럽의 ‘얀테의 규율’이 미국에 이식된 곳이다.

창녀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떳떳하지 못한 직업이다. 그러나 이 직종에 종사하는 ‘노르웨이계’ 어린 소녀들은 너무도 해맑고 구김살 없다. 복장도 창녀스럽지 않고 지극히 수수하다. 공장이나 미용실에서 일하는 순박한 소녀들과 다름없다.

그녀들을 대하는 노르웨이계 여자 경찰서장 마지도 창녀를 무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어린 창녀들도 마지를 경찰서장이 아니라 친한 언니 대하듯 한다. 이들은 마지에게 ‘한 남자는 덩치가 크고, 한 남자는 작았으며, 작은 남자는 웃기게 생겼으며, 그 남자는 포경수술을 하지 않았다’는 정보(?)까지 알려준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 중심으로 한 북유럽은 그 유명한 ‘얀테의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다.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세(Aksel Sandemose)가 그의 소설 속에서 ‘얀테(Jante)’라는 가상(假想)의 마을을 지배하는 규범을 정리한 것에서 비롯됐지만, 사실상 북유럽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규범이다. 문화적 규범이란 법률은 아니지만 법률 이상으로 구속력이 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연장자에게 반말 찍찍거린다고 고발당하거나 기소되지는 않겠지만 ‘인간말종’ 취급당한다. 

북유럽의 문화적 규범인 10가지 ‘얀테의 규율’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5.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남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군가 당신을 신경 써 주리라고(care) 생각하지 마라. 10. 당신이 남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한마디로 평범함의 규율이다. 북유럽사람들은 이것을 어기면 인간말종으로 여긴다.

마지와 어린 창녀들의 대화는 ‘얀테의 규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자 경찰서장이 창녀보다 잘난 것도 없고, 창녀가 경찰서장보다 못난 것도 없다. 아무도 특별하지 않다. 잘난 척해서도 안 되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 
 

 

어쩌면 ‘얀테의 규율’을 지키는 마지와 어린 창녀들의 대화 모습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데서나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고 ‘네까짓 게 감히’라고 부들거리고 아무나 무시하고 가르치려들고, 또한 그런 사람들에게 알아서 기는 데 익숙한 우리네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코믹해 보이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코믹하게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슬프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소위 ‘메이와쿠(迷惑)’라는 문화적 규범을 ‘얀테의 규율’에 비벼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전혀 당치 않다. 속(혼네ㆍ本音)과 겉(다테마에ㆍ健前)이 다른 일본인들은 속으로는 상대를 무시하고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예의를 지킬 뿐이지만, ‘얀테의 규율’은 예의가 아니라 내재화(內在化)하고 체화한 가치관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의 ‘메이와쿠’라는 예의 문화를 ‘얍삽하다’고 손가락질할 처지는 아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우리에게 ‘예의’란 철저히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에게나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된다. 

‘일류(一流)’가 아니면 모두 예의조차 지킬 필요가 없는 ‘쓰레기’가 된다. 그 ‘일류’에 합류하기 위해 3살부터 목숨 걸어야 한다. 자기 삼촌뻘 되는 평범한 아파트 경비원은 일단 반말에 ‘귀싸대기’부터 올리고 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류’가 못 되는 사람들이나 앞으로도 ‘일류’가 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압도적인 세계 최고의 자살률(10만명당 26명)은 이런 사회의 민낯을 상징한다. 연간 자살자 수가 1만3000여명이이니 가히 전시(戰時) 상황이다. 전통을 자랑하는 ‘자살대국’ 일본도 10만명당 15명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세상에 ‘일류’로 키워낼 자신 없는 부모는 내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평범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북유럽 국가들을 ‘재미없는 천국(Boring Heaven)’이라고 한다. ‘천국’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 우쭐대고 잘난 척할 수 없으니 재미는 없는 모양이다. 

반대로 ‘특별함’을 찬양하는 미국은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자기’를 드러내니 ‘재미있기는 하지만 지옥(Exciting Hell)’이 되는 모양이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 꺼내듯 총기를 꺼내는 미국은 연간 총기 사망자 수가 4만5000명에 이른다. 

우리는 어떨까. 튀어도 욕먹고 평범함은 쓰레기 취급당하는 최악의 ‘재미없는 지옥(Boring Hell)’쯤 되는 사회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점점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고 어쩌다 태어나버린 사람들은 부랴부랴 자기 목숨을 끊을 리 없지 않겠는가.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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