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구성원 성분은 대단히 복잡하다. 예부터 그랬다. 이것이 거지가 자주 범죄에 연루되는 기본적인 원인이다.
송나라 때 정극(鄭克)이 편찬한 『절옥귀감(折獄龜鑑)』에 ‘위정람상(韋鼎覽狀)’의 일을 기술하고 있다.
위정(韋鼎, 515~593)이 광주자사(光州刺史)에 부임했을 때 손님으로 갔다가 주인집 첩과 사통한 사건이 벌어졌다. 손님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 첩이 귀중한 재물을 훔친 후 야밤에 도망쳤다. 오래지 않아 죽임을 당하여 풀덤불에 던져졌다. 주인이 손님과 첩이 사통했다는 것을 알고 손님이 첩을 살해했다고 고발하였다. 현리가 심문한 후 손님과 첩이 간통한 죄상을 파악하고 손님을 사형에 쳐하도록 판결하였다. 사건 심리가 종결되어 주부에 보고하였다. 위정이 안건을 살핀 후에 말했다.
“이 손님은 간통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모 사찰의 승녀가 첩을 기만하여 재물을 훔쳐오도록 한 후 사찰의 노예를 시켜 그녀를 죽이도록 하였다. 장물은 지금 모처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곧바로 손님을 석방하고 중을 체포토록 했으며 동시에 장물을 찾아내었다. 이때부터 관할 지역 내에 질서가 잡혔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태평하고 기풍이 올바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성도고금기(成都古今記)』에서 소회무(蕭懷武)의 일도 기록하였다.
오대시기에 전촉(前蜀) 후주의 부하 중에 소회무라는 관리가 있었다. 특무 조직 ‘심사단(尋事團)’을 책임지고 있었다. 본래 순군(巡軍)과 같은 직무였다. 그는 100여 명을 관할했고 그들 각각은 십여 명의 심복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모이고 흩어지니, 사람들이 판별하기 어려워 ‘개’라고 불렀다. 큰 길이나 작은 골목에서 무의(巫醫), 술집 심부름꾼, 거지, 고용인부, 장사꾼(행상인), 심지어 아동 중에도 그들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민간 백성의 사사로운 비밀도 그들은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주군(州郡) 관부나 훈신 귀척의 집에서 밥 짓고 말을 기르고 수레를 몰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공적 사적의 모든 동정을 아무 때나 소회무에게 비밀리에 보고하였다.
이러니 사람들은 두려워졌다. 자기 신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소회무의 앞잡이라 의심하였다. 소회무는 그것을 빌미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원성이 조정 내외에 가득했다.
곽숭도(郭崇韜)가 군대를 거느리고 촉에 입성한 후 그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수 시켰다. 이에 대해 정극은 말했다.
“이것이 간악한 사람을 정탐하다가 오히려 간악하게 되는 사례다. 눈과 귀가 되어 감시할 수 있는데 어찌 똑똑히 분별하지 못하여 원망이 생기겠는가?”
거지도 그 사이에서 어릿광대 역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팔 잘린 거지, 알고 보니 도적이었다
도적질을 하다가 곤궁해져서 거지가 되기도 했다. 청나라 광서 23년(1897), 소흥(紹興) 수징교(水澄橋) 다리 어귀에서 두 팔이 없는 거지가 구걸하러 다녔다. 그는 아무 때나 두 다리로 골패를 가지고 놀면서 도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발가락으로 기와 조각을 집고 수십 보나 멀리 던지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
소년 시절에 악인의 유혹에 빠져 도적이 됐다. 한번은 복건(福建)에 있는 모 부잣집에 도둑질하러 갔는데 그 집에서 방비하고 있었다.
곧바로 지붕으로 도망쳤지만 은밀히 추적하는 사람을 따돌리지 못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왼쪽 팔이 잘려나갔다. 아픔을 참으면 간신히 담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나중에 1척 정도까지 추격해 온 사람에게 오른쪽 팔까지 잘려나갔다.
다시 추격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사찰에 들어가 숨었다. 사찰의 스님은 자비로웠다. 의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치료까지 해줬다. 3개월 정도 지나서야 아물었다.
원래 패거리가 3명이었는데 2명은 사로잡혔다. 어쩔 수 없이 혼자 구걸하면서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는 두 팔이 없지만 능히 뛰어오를 수 있었다. 빙 둘러선 구경꾼들이 돈을 주겠다며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가 다리 어귀에서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면 착지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의 경공(輕功)은 여전했다.
이 사례는 거지의 출신성분을 보면 숨어 지내는 범죄자도 받아들여 은닉시켜주는 단체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반대로 무고한 거지를 억울하게 죽이는 경우도 생겼다. 『의옥집』 권10에 집록된 『포급람원개(捕急濫寃丐)』의 기록이다 :
선현(宣縣)과 흡현(歙縣) 사이에 있는 지역에 강도가 밤에 길을 가던 행인을 죽이고 목을 잘라 머리만 가지고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날이 밝아올 때, 길 가던 사람이 거기에서 피를 밟아 넘어졌다. 급히 혐의를 벗으려 애썼으나 관부는 살인범으로 몰아 옥에 가둬버렸다. 그런데 맞춰 볼 사람머리가 없으니 안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기한을 두고 빨리 해결하라 다그쳤다. 포리(捕吏)는 병이 들어 거동하기 힘든 거지의 머리를 잘라 숫자를 채웠다. 살인 혐의를 받아 옥에 갇힌 그 사람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어쩔 수 없이 허위자백 했다.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다.
나중에서야 진범이 잡혔다. 하지만 이미 길을 가던 무고한 사람과 불쌍한 거지가 죽임을 당한 후였다. 흉악범 한 명에, 원혼이 세 명이나 생겼다.

거지는 무슨 잘못이 있는가. 무고한 사람을 남살하는 관부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더욱이 거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시신에 머리가 없다고 거지의 머리를 잘라 숫자를 채우다니.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세속 관념 중 거지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비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