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제이누리> 창간 2주년을 맞아 제1화-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에 이어 제2화를 선보입니다. 제2화의 주인공은 '파란 눈의 개척자', '제주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이시돌 목장의 P. J.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제주축산을 넘어 한국축산, 근대화의 시초 역을 다진 80중반 노구의 서양 신부가 60년 동안 제주에서 일군 꿈을 양영철 제주대 교수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 풀어냅니다. 제1화-신구범 전 제주지사에 이은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한국인들은 이런 걸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성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맥그린치 그는 척박한 땅, 그곳에서도 오지인 한림벌에 성당을 지었다. 그가 지금 돌이켜보는 그 때의 일들은 말 그대로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성당을 짓자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시절. 신자들에게 알려 푼푼이 돈을 모으는 모금운동을 생각하지 않은게 아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다. ▲ 옛 한림성당 그렇다고 마냥 형편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결국 맥그린치 신부 스스로 이리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제이누리> 창간 2주년을 맞아 제1화-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에 이어 제2화를 선보입니다. 제2화의 주인공은 '파란 눈의 개척자', '제주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이시돌 목장의 P. J.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제주축산을 넘어 한국축산, 근대화의 시초 역을 다진 80중반 노구의 서양 신부가 60년 동안 제주에서 일군 꿈을 양영철 제주대 교수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 풀어냅니다. 제1화-신구범 전 제주지사에 이은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보물섬인 줄 알았다. 보잘 것 없는 목선 같은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난 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고단하고 지칠대로 지쳤다. 배멀미가 이리 심한 줄 몰랐다. 그러나 기나긴 시간을 보내고 갑판에서 바라다 본 섬의 풍광은 장관 그 자체였다. 한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산을 기둥 삼아 마치 파노라마 처럼 온갖 산들이 펼쳐져 뿜어내는 장관은 그동안 그가 만나본 자연이 아니었다. 그도 모르게 입에선 “원더풀!” 탄성이 흘러나왔다. ▲ 제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장면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제이누리> 창간 2주년을 맞아 제1화-신구범 전 제주도지사에 이어 제2화를 선보입니다. 제2화의 주인공은 '파란 눈의 개척자', '제주근대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성이시돌 목장의 P. J. 맥그린치 신부입니다. 제주축산을 넘어 한국축산, 근대화의 시초 역을 다진 80중반 노구의 서양 신부가 60년 동안 제주에서 일군 꿈을 양영철 제주대 교수의 집필로 매주 월요일 풀어냅니다. 제1화-신구범 전 제주지사에 이은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그의 고국은 아일랜드(ireland)다. 그의 나이는 이미 팔순을 넘겨 여든 다섯. 스물 다섯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그가 60년간 살아온 땅 역시 ‘아일랜드’(island)다. 한반도 남녘 섬 제주도-. 그곳은 그가 아일랜드를 떠나 꿈을 키워온 아일랜드다. 그의 한국이름은 임피제. 본명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지난 24일 오후 제주시 한림읍 이시돌 목장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널따란 이시돌 목장처럼 큰 풍채도 그렇지만, 이제는 기력이 다한 듯 숨이 가뿐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고향 제주도청에서 행정사무관 공무원으로, 즉 공인의 삶을 시작하고 고향의 도지사로 이를 마무리했던 나로서는 제주 땅과 역사를 인질로 삼아 그 뒤에 숨어서라도 내 삶의 이야기로 인한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한번 고위공직을 담당했던 사람은 퇴임 후에도 공인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동안 나의 공직여정에 그리고 공직 이후의 삶에 이 말이 얼마나 녹아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가야할 공직의 길을 항진할 수 있도록 행운과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뜻밖에도 횡재하는 나 스스로를 만난다. 여섯 달 공부하고 합격한 행정고시 시험장에서도, 어승생 저수지에서도, 신제주 개발계획에서도, 중문관광단지 개발계획에서도, 그린벨트 지정에서도, 한라산 국립공원 지정에서도, 강정천 용수개발사업에서도, 미국 유학생활에서도, 로마 식량농업기구(FAO)에서도, 한·미 쇠고기협상 테이
2011년 1월27일이다. 문국현 측에 던진 내 메시지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창조한국당 공성경 대표와 최고위원 등 일행이 제주로 내려왔다. 그들이 먼저 가고자 했던 곳은 서귀포 강정동 해군기지 공사 현장이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상황을 파악한 그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0년간 선거·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한 문국현 전 대표에 대해 ‘사법살인을 당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공감한다. 그들은 내가 제안한 가석방 제도의 전면적 개선방안에 대해선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공조’로 방향을 살짝 비틀어 역제안 해왔다. 수감생활로 절실히 심각성을 느끼고 있던 터라 아무래도 문 대표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 재임시절 한라산눈꽃축제장에서 그해 2월18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나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전 대표가 공동기자회견에 나선 건 그 10여일 전 그를 서울에서 만난 결과다. 두 사람은 서로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제물(?)이었다는 동병상련 외에 제주의 해군기지 문제 역시 사법제도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공감
해군기지 얘기를 시작하자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 잘못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이쯤에서 얘기를 그만두라는 조언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난 해군기지를 찬·반의 문제로 끌고 갈 생각이 없다. 대충대충 어줍 짢게 넘어간 일들에 대해 덤덤히, 그러나 현실을 목도한 이로서 내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도지사로 복무했던 이로서 나마저 입을 닫으면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저 난 사실을 말하려할 뿐이다. ▲ 재임시절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절대보전지구 해제 절차에 대해 부당성을 지적한 강정주민들의 소송은 2010년 말 1심에서 간단히 끝났다. 본안 심리도 열지 못하고 ‘원고 부적격’이란 이유로 소송이 각하됐다. 소송대리인인 아들에게 권유했다. “이제 그만해라. 할 만큼 했다. 이제 학자로서, 선생으로서 맡은 바 일에 전념했으면 좋겠다.” 판사직을 그만 둔 큰 아이는 그 시절 변호사로 일하다 제주대 법률전문대학원에 초임교수로 임용됐다. 아비로서 아들이 번듯한 직장에서 ‘교수’ 대우나 받으며 편안히 살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2010년 10월26일. 제주지검은 도지사 당선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허위사실 공표)에 대한 나의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 ‘증거불충분’ 명목으로 ‘혐의 없음’ 조치를 내렸다는 문서를 나에게 보내왔다.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98년 6·4 지방선거 뒤부터 내 정치인생을 망쳐버린 검찰과의 악연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착잡한 생각을 가눌 길 없었다. 11월3일 오랜만에 연우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우회(緣友會)는 제주도지사와 교육감, 제주대 총장을 지낸 전직 인사들의 모임이다. 1987년 이군보 지사가 퇴임하면서 만들어진 모임이다. 만 65세 이상이 대상이다. 재직시절의 경험과 경륜을 살려 서로 친목을 다지면서 고향에도 원로의 역할을 하며 봉사하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졌다. 지금 그 구성원은 도지사를 지낸 이군보, 김문탁, 김태환 전 지사와 나, 더불어 교육감을 지낸 양치종, 김황수, 강정은, 김태혁 전 교육감을 비롯해 제주대 총장을 지낸 김형옥, 조문부, 부만근 전 총장이다. ▲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그동안 술을 멀리해 왔다. 몇 년 전 내가 출석하는 제주영락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맡으면서다. 그
2011년 1월29일 영등포교도소 문이 열렸다. 높다란 담장을 뒤로 하고 문을 나서자 고마운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김성흡 전 도의회 사무처장을 비롯해 정말 많은 이들이 와줬다. 눈물겨웠다. 그들과 손을 맞잡고 곧바로 난 서울의 둘째(신용규) 집으로 갔다. 이틀을 둘째아들 집에서 머무르고 1월31일 제주로 왔다. 하지만 사실 주변과는 연락을 끊었다. 몸도 마음도 세상에 나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두문불출하다 설을 사흘 앞둔 2월10일 아내와 난 한적한 어느 중소도시로 무작정 떠났다. 아내와 한 며칠 쉬다 올 요량이었다. 그 도시에서 이틀간 머물며 설날인 13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한 교회를 찾아 아내와 주일예배도 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눈여겨 두었던 스테이크 하우스 'OUT BACK'이란 곳에서 아내와 함께 점심을 했다. 그 때였다. 우리 부부가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다가오더니 어떤 분이 우리 식대를 내고 가더라는 것이다. 우릴 알아볼 이도 없는 곳인데 의아했다. 물어보니 그 지역에서 복지사업을 하던 단골 40대란 것이 고작인 정보였다. 다
요즘 치과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도대체 누가 이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교도소 수감 시절 ‘엉터리’ 치료를 받은 이유 탓에 듣는 말이다. 수감시절 이를 감싼 보철이 떨어져나가자 일주일에 한번 오던 순회진료 의사에게 이를 맡겼다가 그 꼴이 된 것이다. 지금 날 진료하는 치과의사는 “돌팔이가 보철한답시고 생이를 깨 버리더니 발치(拔齒)한답시고 이 뿌리는 놔두는 바람에 염증이 생겼다”고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아마 갓 치대를 졸업한 서투른 친구의 의술에 나보다도 더 분통을 터뜨린 것 같다. ▲ 축협 중앙회장 재직 시절 농축협 통합반대운동을 벌일 때 축협 통합전산센터 직원들이 MT 현장에서 신 전 지사를 응원하는 기념촬영을 했다. 교도소 내 진료는 그 정도로 열악하다.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기도 어렵고,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기도 어렵다.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수감 1년여가 지나면서 난 우연히 침과 뜸에 생각이 다다랐다. 교도소 안에서 신문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결과다. 신문기사는 구당 김남수옹의 정통 침뜸연구원을 소개하는 기사였고, 그가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더 정확히 말하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이가 느닷없이 구치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형님’ 타령을 하니 난감했다. 막 수감돼 들어오던 이가 내 방 쇠창살을 붙들고 다짜고짜 ‘형님’으로 부르길래 난 방문으로 다가가 왜 나를 형님으로 부르느냐고 정색하며 물어봤다. 솔직히 그가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이란 걸 난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말한 사연은 이랬다. 그는 1980년 15년형을 언도받고 1995년 만기 출소, ‘조폭세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선언한 뒤 어느 날 제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와 친분이 있던 강영철 제주시의회 의원(훗날 제주시의회 의장 역임)과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들끼린 서로 막역한 사이였고, 강 의원이 날 따르던 지라 그가 끌고 내 집무실로 대동하고 온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인사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가물가물 그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다. ▲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이 첫 만기출소 뒤인 1996년 자신이 대본을 쓰고 출연한 영화 '보스'의 포스터다.
살아야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타율의 삶이지만 살아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진정 고민이었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로이 시작하고자 수감되면서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지만 아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8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단식을 끝낼 즈음 교도소 안에서 우연찮게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을 만났다. DJ 정부 시절 내가 축협중앙회장으로 있으면서 농·축협 통합 반대운동을 벌이자 그에 맞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던 인물이다. 그는 통합을 찬성했다. “농·축협은 사법인이 아니라 공법인이기에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한 사람이다. 같은 재소자 신분이기에 그래도 반가웠다. 그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넌즈시 물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역시 뇌물수수 혐의였다. 그러나 그는 항변했다. “신 지사! 이럴 수 있소? 농협 임원이 공무원도 아닌데 어떻게 뇌물죄로 처벌할 수 있소?” 그는 억울한 눈치였다. 어이가 없었다. 그의 과거발언과 맞춰보면 그건 모순이었다. “당신이 그 시절 공법인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자승자박(自繩自縛)
못난 내 인생이 결국 ‘국립학교’로 옮겨졌다. 억울한 노릇이지만 버텨야 했다. 2007년 11월30일부터 서울구치소에서 시작된 내 옥살이 얘기다. 아스라이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런 경험이 있는 이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묘하게도 난 그 곳에서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많은 일화도 있다. 그곳 역시 인간이 사는 땅인 것을-. 내 삶을 채운 790일의 기록을 이제 더듬어 본다. 2007년 11월30일 오전 11시 서울고법 재판정. 예상 밖이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그리곤 난 현장에서 법정구속, 곧바로 서울구치소로 직행했다. 이전의 회고에서 이미 기록했지만 그 사안은 애당초 검찰의 수사부터 ‘정치검찰’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례다. 몇 번의 선거와 국회 할복사건을 거치며 나를 이 잡듯 뒤지던 검찰이 사회복지법인 은혜마을 재단 설립 건을 놓고 ‘30억 뇌물수수’로 몰아갔던 것이다. 2003년 6월 서울지법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그 사안이 2004년 2월12일 서울고법에서 다시 뒤집혀 유죄로 가더니 2004년 4월27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