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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51)

 해군기지 얘기를 시작하자 주변의 우려가 많았다. 잘못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이쯤에서 얘기를 그만두라는 조언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난 해군기지를 찬·반의 문제로 끌고 갈 생각이 없다. 대충대충 어줍 짢게 넘어간 일들에 대해 덤덤히, 그러나 현실을 목도한 이로서 내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도지사로 복무했던 이로서 나마저 입을 닫으면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저 난 사실을 말하려할 뿐이다.

 

절대보전지구 해제 절차에 대해 부당성을 지적한 강정주민들의 소송은 2010년 말 1심에서 간단히 끝났다. 본안 심리도 열지 못하고 ‘원고 부적격’이란 이유로 소송이 각하됐다. 소송대리인인 아들에게 권유했다. “이제 그만해라. 할 만큼 했다. 이제 학자로서, 선생으로서 맡은 바 일에 전념했으면 좋겠다.” 판사직을 그만 둔 큰 아이는 그 시절 변호사로 일하다 제주대 법률전문대학원에 초임교수로 임용됐다. 아비로서 아들이 번듯한 직장에서 ‘교수’ 대우나 받으며 편안히 살기를 바라는 게 솔직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달랐다. “지금 강정사람들이 너무 힘들고 어렵고 외롭습니다. 이럴 때 저라도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비 된 입장에서 무안하고 부끄러웠다. 양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아들 편에 내가 서지 않으면 과연 내가 아버지인가란 자괴감이 밀려왔다. 해군기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갔다.

 

하지만 그 시절 내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2년2개월 여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며 느낀 바가 많았다. 가석방 신분으로 풀려났지만 정작 난 그 가석방제도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해군기지 논란이 증폭되기 이전 무렵인 2010년 9월 하순 난 가석방제도의 개선방안을 만들어서 주요 정당과 국회, 청와대, 법무부로 청원서를 냈다. 내가 생각한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나라 형법 72조에서 규정한 가석방 요건에 따른 것이다. 규정은 “징역 또는 금고이상의 형 선고를 받고 집행 중에 있는 자가 형기 1/3을 넘기면 가석방이 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다. 이어진 규정은 “행상이 양호하고 개전의 정이 농후할 경우 가석방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규정과 다르다. ‘형기의 1/3을 넘기면’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90% 이상을 옥에서 살아야 한다. 외국은 다르다. 말 그대로 그 규정을 준용한다.

 

다른 문제는 법무와 교도행정의 편의주의다. 그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장기수 보다 단기수 위주로 가석방이 이뤄진다. 학자들 얘기를 들어보면 가석방제도는 사실 장기수에게 더 필요한 제도다. 재범을 한다 해도 장기수일 수록 우발적 범죄에 불과하지만 단기수는 지능적이고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는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런데 장기수는 사회감정상 안 좋다는 이유로, 그냥 편하게 사회감정에 안 맞다고 보고 장기수를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뉘우치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 힘이 있고, 사기·횡령범이 주류인 단기수가 가석방의 혜택을 보는 것이다. 그리 되면 그건 사실상 가석방 제도가 아니다. 얄팍한 은전을 베푸는 척 위장하는 꼴이 된다. 그러다가도 그 편의주의는 권력을 만나면 달라진다. DJ의 아들이 사실 대표적이다. 내 건의는 외국처럼 정말 사회복귀 시스템으로 운영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예상대로지만 회신은 뻔했다. “향후 제도개선에 참고하겠음.”

 

해를 넘겨 2011년 1월초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나 셋이서 식탁머리에 앉아 아침식사를 하다 얘기의 화제가 그 가석방제도 얘기로 넘어갔다.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 우리의 심급(審級)제도에 대해서도 난 불만이 많았다. 형사범의 경우 미국은 1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검찰의 항소권이 없다. 내 경우 만약 그랬다면 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거기에 보태면 지금은 폐지됐지만 사회보호법 상 감호처분 문제다. 법은 비록 폐지됐지만 법 폐지 이전 감호처분을 받은 사람은 지금도 ‘제2의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 그런 얘기를 하다 난 자연스레 교도소에서 만난 사형수 얘기를 아들에게 건넸다. 이(李)씨 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 얘기다.

 

억울함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난 교도소 생활을 할 때 원망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도지사까지 한 사람이었다. 교도소는 바깥 사회와 똑같이 힘 있고, 돈 있으면 편하게 산다. 그렇지 않은 이들만 불쌍하게 세월을 보낸다. 그러니 내가 억울하다고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난 수감시절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들을 저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되뇌고,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시절에 만나 내 가슴팍에 꽂힌 이가 바로 그 사형수다. 그는 20대 초반 폭력조직에 가담해 움직이다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미 20여년을 복역, 4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살인을 자백했고, 수감돼서는 불교에 귀의해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선량한 마치 부처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도 2007년 말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벌벌 떨고 있었다. MB가 취임하면 사형이 집행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 시절 혼자서 자료를 뒤적였다. 살펴보니 우리나라가 사형을 집행한 것은 YS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30일이 마지막이었다. 23명에게 사형을 집행하고 그 후론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었다. 다른 나라 사례도 살펴보니 전세계에서 사형제를 폐지한 나라가 92개국이었고,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는 나라도 35개국이었다. 지구상에 우리나라 수준의 나라가 사형제를 운용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난 차근차근 내용을 설명해주고 그를 진정시켰다.

 

그 친구는 그림도 잘 그렸다. “그림공부를 하며 마음이 참 편하다”며 나에게도 붓과 스케치북을 내밀며 그림지도를 해 주기도 했다. 성실한 건 이루 말할 수 없다. 난 아내와 아들에게 다음의 얘기를 꺼냈다. 옥중에서 난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 사형수를 사면복권 시켜서 청와대 경호원으로 특채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 친구가 결혼할 때 대통령이 주례를 서는 드라마를 봤으면 좋겠다. 내가 바로 그런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물론 꿈처럼 그려본 나의 소망이다. 그러면서 바로 우리의 사법제도 개혁이 시급하다고 말을 꺼내는 순간 아들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문국현 있잖습니까?” 그는 그 시절 대선에 잘못 나섰다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0년간 정치활동의 제한을 받는 공민권 박탈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내심 나와 같은 ‘사법살인’의 피해자란 동병상련이 있었다. “그와 손잡고 개혁에 나설 수 있겠냐?”고 아들에게 물어보자 아들의 답은 “알아보겠습니다”였다.

 

‘정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법도 법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법은 정치과정의 결과 입법체계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해군기지와 사법제도의 문제에 얽혀 마음을 가눌 길 없던 때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란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란 시민의 미덕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이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젊은 시절 고시를 공부하며, 주워들은 풍월로 그 글귀를 익혀두고 있었지만 ‘정치는 무엇인가’란 화두에 내 가슴을 울린 건 지사 재임시절 읽은 한 신문의 칼럼이다.

 

민선 1기 제주도지사로 재임하던 때인 1996년 1월6일자 중앙일보의 ‘시평’을 채운 이상우 서강대 정외과 교수의 칼럼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에게 끌려 난 다음해 제주에서 열린 섬관광정책포럼에 그를 초청, 특강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가 칼럼에 쓴 말은 아주 평범한 듯 보였지만 사실 비범한 말이었다. 그는 시평에서 “법대로 규칙대로 열심히 일하면 밥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으며, 노년에 고생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사회에서 삶을 살 수 있기를 국민은 원한다”고 적었다. “그게 정치의 요체”라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국민들이 더 원하는 게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강정은 어느덧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월22일 일요일 오전 9시 제주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끝내고 무작정 서귀포 강정마을로 달려갔다. 그곳 강정교회에선 오전 11시부터 예배가 예정돼 있어 나 역시 교회를 찾았다. 그 시절 박희식 목사와 장로, 집사들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사정은 생각보다 더했다. 찬반으로 나뉘어 갈린 마을은 파탄지경이었고, 교회 역시 분열돼 있었다. 목사가 중립을 내세우자 해군기지 반대 전면에 나선 그 교회의 두 집사는 교회를 뛰쳐나갔다. 그 둘을 따로 만났다. 양홍찬 반대투쟁위원장과 홍동표 마을회 감사다. 그들은 힘겨운 얼굴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반대해도 힘이 없는 국민 입장에선 투쟁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해군기지는 건설될 것이다. 무모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지원계획이 보장됐으면 좋겠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이제 타협이나 협상의 길을 찾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가 나 몰라라 하던 시절이다. 정부도, 해군도, 제주도도, 의회도 모두 뒷짐만 지고 있을 때였다. 게다가 도민들은 일부 종교·시민단체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강정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안보시설이랜 허는디 게매이(안보시설이라고 하는데 글쎄)···무시거 허래들 반대햄신고(뭐 하려고 반대하는가)?” 그게 도민들이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쓰라렸다.

슬펐다. 우리 도민사회가 이리 비굴해도 되는가란 생각이 밀려왔다. ‘반대투쟁’에 나서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느낀 건 힘이 들지만 해군기지야말로 우리 제주사회, 우리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란 판단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내 메모다. “힘들지만 해군기지는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 제주사회를 우리 스스로 바라보고 자기 본얼굴을 되찾을 수 있는 그런 거울이다. 그런데도 거기에 비춰진 우리의 얼굴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 제주사회의 현주소이고 자화상이다.”

 

물론 제주의 원로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해 2월8일 교육위원을 지낸 현화진 곰솔회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곰솔회는 일종의 제주도 원로들의 모임이다. 도지사와 교육감, 제주대 총장을 지낸 인사들이 모이는 연우회와 달리 곰솔회는 그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도지사 출신 특정 인사가 주도, 태동부터 ‘선거조직’의 성격이 짙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모임에 참여하는 인사들 사이에선 선호도가 작동하고 있고, 새로 가입하는 인사들에 대한 명확한 참여기준도 없다. 어찌 됐건 나로선 그 모임의 인사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현 회장은 다음날로 예정된 정기모임에 현직 지사가 오기로 돼 있자 불편한 관계인 나에게 배려의 전화를 한 것이었다. “마음 크게 갖고 참석해달라”는 요지였다. “공적인 모임인데 내가 왜 참석하지 않겠습니까? 걱정마시라”고 하고 그 자리에 갔다.

 

예상을 깨고 현직 지사는 그 자리에 오지 않았다. 오히려 미리 대비한 다른 원로만 머쓱한 얼굴이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불참 이유도 거짓으로 판명나 김태환 전 지사가 노발대발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 곰솔회엔 교육감을 지낸 한 분도 배제돼 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말했다. “곰솔회도, 연우회도 원로모임입니다. 원로들의 모임이 이리 쪼개질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통합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대신 전 감옥살이를 한 처지이기에, 그런 사람이 여기 앉는 건 누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심은 원로모임이 제대로 역할을 정립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저 식사만 하다 마무리짓는 그 광경이 싫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문국현 측에서 호의적입니다.” 그해 초 창조한국당 일행은 제주로 내려왔다. 그들은 서귀포 강정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문제의 돌파구를 찾을 것 같았다. 해군기지와 법, 그리고 정치를 고민하던 나에게, 그리고 우리 제주사회에 그래도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기대가 내 가슴팍에 자리잡았다. 이제 내가 움직여야 할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52편(마지막회)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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