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했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타율의 삶이지만 살아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진정 고민이었다. 몸과 마음을 비우고 새로이 시작하고자 수감되면서 곧바로 단식에 들어갔지만 아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8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단식을 끝낼 즈음 교도소 안에서 우연찮게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을 만났다. DJ 정부 시절 내가 축협중앙회장으로 있으면서 농·축협 통합 반대운동을 벌이자 그에 맞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던 인물이다. 그는 통합을 찬성했다. “농·축협은 사법인이 아니라 공법인이기에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한 사람이다.
같은 재소자 신분이기에 그래도 반가웠다. 그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사연을 넌즈시 물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역시 뇌물수수 혐의였다. 그러나 그는 항변했다. “신 지사! 이럴 수 있소? 농협 임원이 공무원도 아닌데 어떻게 뇌물죄로 처벌할 수 있소?” 그는 억울한 눈치였다. 어이가 없었다. 그의 과거발언과 맞춰보면 그건 모순이었다. “당신이 그 시절 공법인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자승자박(自繩自縛)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끝에 그저 눈물만 흘렸다.
서울구치소에선 이부영 국회의원도 만났다. 그 역시 한나라당 의원으로 있으면서 나에게 농·축협 통합을 막겠다고 했지만 막판 변절한 사람이다.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아내와 관련된 옷로비 특검문제와 연결해 정치적 거래를 하면서 나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그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옛일은 미안하게 됐다. 혹시 불편한 점은 없냐”며 반가이 인사를 나눴다. 한술 더 떠 그는 ‘국립학교 입학선배’(?) 답게 “보니 수감방 변기가 재래식 변기인 것 같은데 우리가 기거하는 곳처럼 좌변기가 비치된 방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슬며시 말을 꺼내기도 했다.
물론 나와 그네들은 독방에 수감됐다. 생각하듯 징벌방이 아니다. 그곳도 신분상 지위고하가 있고, 노인대접이 있었다. 그 차원에서 독방생활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나와 이부영 의원은 변기시설 면에선 급(?)이 달랐다. “고맙소. 헌데 운동도 되고 그냥 재래식 변기 방이 더 낫소.” 그렇게 말하고 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쨌든 정 전 회장과 이 의원을 교도소에서 만난 건 나에게 공교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교도소는 분명 ‘동물우리’나 다름 없었다. 나로선 그 곳에서 어떻게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어떤 경우에도 희망의 끈을 놓아선 안된다”는 것 역시 나의 과제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러 찾아낸 게 바로 ‘운동’과 ‘성경’이다.
참고삼아 내가 옥살이를 했던 서울구치소의 사정을 말한다. 나로선 나름 대접(?)을 받아 혼거(混居)가 아닌 독거(獨居)방으로 배정받았다. 그러나 막상 그 방 안에 들어서니 기가 막혔다. 내 원래의 삶터가 아니기에 난 그곳을 별방(別房)이라 이름 붙였다. 자를 구해 방의 구석구석을 재 봤다. 대충 재 보니 직사각형 모양의 방은 길이가 2m40cm에 폭은 1m10cm였다. 면적이 0.8평 정도 된다. 그러나 그 공간 가운데 한쪽 귀퉁이는 변기가 놓이는 다용도실이 차지한다. 폭은 전체 방의 폭과 같고, 길이는 60cm다. 다용도실은 변기와 세면대를 갖추고 세탁과 그릇세척이 가능한 공간이다. 물론 빨래도 이곳에 널어야 한다. 다용도 실 공간을 빼면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의 길이는 1m80cm 이기에 누워봤더니 거의 꼭 들어찰 지경이었다. 이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함이 금세 밀려왔다.
섬뜩함을 주는 쇳소리로 닫히는 문짝엔 ‘개구멍’으로 불리는 배식구가 있다. 가로와 세로가 각각 16cm와 17cm다. A4용지 반장 사이즈다. 그곳을 통해 음식을 받아먹고 그릇을 내보낸다. 게다가 형광등은 24시간 켜져 있다. 아마 탈출과 각종 사고에 대비한 것일 게다. 불이 훤해 잠을 못 이루든지 말든지 알아서 자란 것이다. 물론 처음 몇 일간 난 그 환한 조명 탓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방을 막아선 문은 또 2중 잠금장치로 돼 있다. 자물쇠가 두개다. 한마디로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다. 우리 재소자들은 면회와 운동시간을 제외하곤 24시간 거기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구치소에서 들은 얘긴데 예외도 있었다. DJ의 가신(家臣) 권노갑 의원과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서울구치소 생활을 했지만 두 사람은 특별히 수감방의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폐쇄공포증이 있어 방을 잠그자 발광하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교도소 측은 그 두 사람만 특별배려(?)를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국의 대부분 교도소는 난방과 거리가 멀다. 한 겨울이 와도 바닥은 차디찬 냉방이다. 하지만 난 재수(?)가 좋았다. 790일간 내가 기거한 수감시설은 서울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인데 두 곳 다 방 바닥으로 보일러의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다른 곳 수감자들이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고생하는 것에 비해 난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빨랫감이 생기면 고민이었다. 옷을 빨았지만 빨래를 널 끈이 없어 속을 태운다. 물론 빨랫줄은 교도소 측에서 주지 않는다. 난 러닝셔츠를 찢어 꼬아서 빨랫줄을 만들었다. 그걸로 세탁물을 널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운동을 끝내고 들어가 보니 그게 사라진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다른 수감방 재소자가 비슷하게 만든 빨랫줄을 이용해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교도관들은 사고가 터지자 모든 방의 빨랫줄을 다 수거해 갔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데 방 안에 놓인 조그만 쓰레기통엔 쓰레기를 내놓기 위해 쓰는 작은 비닐봉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순간 다 치워갔다. 이 역시 다른 재소자가 그걸 이용,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유였다. 그런 일은 방안에 있는 플라스틱 물통, 다용도 앉은뱅이 책상 등의 순으로 계속 이어졌다. 자살에 이용된 도구가 무엇이었다는 걸 확인하면 교도관들은 전 수감방의 동일한 물품을 모두 거둬갔다. 운동시간에 농구를 하다 다친 재소자가 생기면 다음 운동시간부턴 농구는 ‘금지’다. 교도소는 그랬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그곳에 가면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꽉 막힌 작은 방 한 켠만 갇혀 있다보면 운동만큼 행복한 일도 드물다. 물론 평소 운동을 좋아하던 나로선 하루 한 시간의 운동이 ‘꿀맛’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운동도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공휴일과 일요일엔 운동시간이 없다. 그래서 사회에서 좋아하는 3~4일의 연휴가 되면 재소자들은 죽을 맛이 된다. 물론 교도관들의 편의 때문이다. 공휴일에 운동시간이 끼면 교도관들이 ‘특근’을 해야 하기에 그런 선처를 베풀 순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난 운동시간이 낀 날만 되면 하루 한 시간 이상 뛰었다. 좁다란 트랙에 불과한 작은 운동장이었지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상관이 없었다. 이어 방 안에 들어오면 하루 팔굽혀펴기 300번은 반드시 했다. 한 겨울철에도 방 안에 들어오면 꼭 냉수를 뒤집어 썼다. 건강은 어쨌건 내가 소중히 돌봐야할 자산이었고, 운동은 건강을 위해선 내가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운동으로 어찌어찌 버텨가는 판국인데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면 감기, 아니면 여름엔 일사병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교도소 측은 막상 모자는 주지 않았다. 물론 모자를 살 수도 없다. 내가 교도관에게 “일사병이나 감기 걸리면 책임질 거냐”고 항의도 해봤다. 교도관들의 답은 “교도소 안에 의무대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태도가 괘씸한 지라 불같이 성을 내며 그들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했다. 그러자 며칠 뒤 교도관은 보안과장에게 보고하고 정식으로 교도소장의 결재를 얻어 어디서 허름한 중고모자를 하나 얻어와 나에게 줬다. 예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저런 방법으로 모두 모자를 구해 다 쓰고 있었다. “규정상 안된다”면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다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죄수들이 입고 있는 수의(囚衣)도 마찬가지다. 입감된 첫날 난 누가 입었던 옷인지도 모르는 꼬질 꼬질 때에 절은 죄수복을 받았다. 솔직히 싫었다. 그런데 수감 며칠 뒤 다른 재소자들을 살펴보니 한마디로 ‘패션천국’이었다. 알아보니 30만원만 주면 양복처럼 깨끗한 걸 똑같은 모양으로 맞춰서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돈만 주면 된다. 교도소라지만 그 안에서 모든 거래가 다 있고, 계층·계급이 엄연히 존재한다. 돈이 있으면 편하고, 없으면 괴로운 신세다. 음식물 역시 1인당 매일 2만원 한도에서 사 먹을 수 있고, 약은 제한이 없다. ‘돈 있는 놈’은 포식할 수 있지만 가진 것 없는 이는 하루 종일 배가 고픈 것이다. 일본의 수감시설에 머무른 적 있다는 다른 재소자에게 들은 얘기지만 일본 수용소는 그런 게 없다. 철저히 관급 물품만 써야 하고, 대우는 모든 재소자가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 교도소의 현실은 평등보단 차별이, 권력과 부는 여전히 그 안에서도 대접을 받는다.
그런 곳에서 난 성경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 방법 외에는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었다. 영국의 목사인 존 스타트(John Stott)의 ‘Why I am a Christian'(왜 나는 기독교인인가)과 ’The Cross of Christ'(예수의 십자가)를 탐독했다. 번역된 책인 루이스(C. 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란 책도 그 시절 내 마음을 달래주던 책이다. 그리고 지난 번의 회고에도 말했지만 주일예배가 불가능한 교도소에서 난 슬슬 예배에 나섰고, 후일에 이르러선 예배동지(?)를 규합하는 성과도 거뒀다.
교도소에선 작업을 나설 때가 있다. 노역에 동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같은 늙은이나, 정치인·기업인 등 사회에서 힘 깨나 쓰던 사람들은 그럴 때 ‘원예반’으로 배치된다. 천국이다. 꽃이나 나무를 가꾸는 곳인데 사실상 하루 종일 논다. 그래서 다들 원하는 곳이다. 독거방에 기거하던 이들이 그 원예작업장에 가면 서로 인사도 나누고 세상살이 얘기도 하면서 장기까지 두는 호사(?)를 즐길 수 있다. 하루 작업량은 30분도 안된다. 비닐하우스에 수도시설까지 갖춘 곳이기에 맘대로 목욕까지 할 수 있으니 재소자들은 그곳을 ‘천국’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교도소장의 배려(?) 덕인지 수감된지 얼마 안돼 난 원예반으로 배치됐다.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난 그곳에서 영어성경공부와 금요일 구역(區域)예배를 시작했다. 영어로 하는 성경공부가 맘에 들었는지 나중엔 우리의 예배에 교도관들도 동참했다. 나중에 할 말이지만 그런 천국 같은 원예반 생활 중 말썽이 생긴 적이 있다. 결국 난 교도소장에게 ‘못하겠다’고 말하고 원예반을 포기했다. 그러나 예배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원예반 생활 이후엔 토요일마다 운동장 구석자리를 빌어 20분의 예배시간을 갖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 마음을 뺏긴 교도관의 배려 덕이다. 하지만 그 시절 예배는 눈치를 보며 운동장 구석 정화조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정화조 자리이기에 우린 “우리를 정화하는 데 안성맞춤인 곳”이라며 좋아했다. 김근호·최인식·반성환 정현준·유하은·김경준. 이런 사람들이 그 시절 성경공부와 예배를 같이 하던 친구들이다. 누군지 눈치챌 인물이겠지만 정현준은 DJ시절 정현준 게이트 사건의 장본인이다. 국내 기업 인수합병(M&A)의 전문가였던 기업인이고, 김경준은 MB가 대선에서 승리하던 무렵 터진 BBK사건의 장본인이다.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교도소 수감 시절엔 추억거리도 있다. 또 원예반 시절 얘기다. 다른 이들과 성경공부와 예배를 하다 보니 뭔가 밋밋했다. 나중에 연유를 생각해보니 찬송이 없었던 게 흠이었다. 찬송이 빠지니 예배를 하다 마치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기독교인들은 알지만 ‘반주기’라는 게 있다. 번호버튼만 누르면 성가와 음악이 목소리를 곁들여 나오는 마치 노래방 기기 같은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그걸 구할 방법은 없다. 그래서 주말마다 면회를 오던 내 누이에게 부탁을 했다. 누이는 70만~80만원의 돈을 주고 그 반주기를 샀다. 그러나 교도소 안으로 들여오는 게 문제였다. 어느 날 난 내 누이에게 “모 교도관과 밖에서 만나라”고 알려줬고. 그 교도관이 물건을 받아 우리 원예반으로 갖고 왔다. 물론 규정위반이다. 하지만 우린 행복했다. 죄수들과 교도관이 함께 어울려 찬송가 반주기에 맞춰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우린 그 시절 그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따지고 보면 나의 교도소 생활 중엔 두 명의 ‘수호천사’가 있었다. 내가 수감되면서 운영하던 회사인 ‘삼무’는 끝없는 나락으로 무너져갔다. 그걸 큰 아이 용인이가 판사직도 걷어 치우고 수습했다. 부산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제주로 내려와 그 일들을 해냈다. 용인이가 없었다면 나로선 해결길이 막막했다. 더불어 너무나 고운 내 넷째누이(신행순)가 없었다면 내 교도소에서의 삶은 피폐했을 것이다. 누이와 매제인 홍효선씨는 내가 구치소·교도소 생활을 할 무렵 경기도 수원에서 살던 부부가 각각 경기도 관내 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누이 부부는 고맙게도 매주 교도소로 나를 면회하러 왔다. 내가 필요한 속옷이나 책 등, 모든 걸 외부에서 사서 교도소 안으로 들여보내줬다. 더욱이 매달 풍족하리만치 영치금을 넣어줬다. 앞서 말했듯이 교도소라지만 돈이 있으면 다른 이보다 훨씬 풍족하고 편안하게 지낸다. 옷이나 양말을 넣어주면 어떨 땐 주변에 좀 힘겨워 보이는 재소자들에게 나눠주며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자연히 나는 인기가 있었고, 어떨 땐 부자노릇, 왕노릇하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도 아들 녀석과 누이에게 고마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호강(?)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목욕문제다. 서울구치소 안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다. 몸을 씻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내가 수감됐던 ‘4중’ 옥사엔 샤워기가 고작 6개 뿐인 간이 목욕탕이 유일한 시설이다. 일주일에 한번 그곳으로 거의 동시에 수백명이 들락거려야 한다. 따스한 물에 몸을 맡기는 해방감의 물결은 언제나 우루루 쏟아진다. 그러나 나 같은 신참이자 노인네는 언제나 뒤켠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런데 짐승들처럼 이렇게 뒤섞여야 하는 고약한 촌극은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일거에 해결되고 말았다.
2007년 11월30일 수감되고 나서 두달 보름여가 지난 2008년 2월12일.
오전 10시쯤 수감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큰 소리를 치며 내 방 쇠창살을 부여 잡았다.
“형님! 저 양은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막 잡혀 들어온 이가 제 수감방으로 향하다 다짜고짜 나에게 ‘형님’이라 부르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는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이었다. <47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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