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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7)

 어리둥절했다.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더 정확히 말하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이가 느닷없이 구치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형님’ 타령을 하니 난감했다. 막 수감돼 들어오던 이가 내 방 쇠창살을 붙들고 다짜고짜 ‘형님’으로 부르길래 난 방문으로 다가가 왜 나를 형님으로 부르느냐고 정색하며 물어봤다. 솔직히 그가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이란 걸 난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말한 사연은 이랬다. 그는 1980년 15년형을 언도받고 1995년 만기 출소, ‘조폭세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선언한 뒤 어느 날 제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그와 친분이 있던 강영철 제주시의회 의원(훗날 제주시의회 의장 역임)과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들끼린 서로 막역한 사이였고, 강 의원이 날 따르던 지라 그가 끌고 내 집무실로 대동하고 온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인사하며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가물가물 그 시절 기억이 되살아났다.

 

술자리에서 누군가를 재떨이로 폭행하고 잡혀 들어왔다는 말을 꺼내며 그는 허허롭게 말끝마다 깍듯이 ‘형님’ 소리를 해댔다. 그러다보니 그와 자연스레 친해졌다. 운동시간이 되면 그와 걷거나 뛰기 운동을 같이 했고, 그는 성경공부에도 열심이었다. 그 이전 만기출소 후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있으면서 필리핀에 선교하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사고를 치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런 그는 예순이 다 된 나이였는데도 무척 날렵했다. 운동시간 중 그의 몸 움직임을 보노라면 교도소 담장도 금방 뛰어넘을 것 처럼 움직임이 재빠르고 가벼웠다. 그와 그렇게 얼굴을 트고 몇 일이 지났다.

 

어느 날이었다. 운동시간에 나와 보니 힘깨나 쓰는 것처럼 보이던 재소자들 중 몇몇이 나에게 따라 붙었다. 그들은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나에게 일시에 “큰 형님! 안녕하십니까” 소리를 질러댔다. 갑자기 그렇게 돼 버렸다. 졸지에 난 서울구치소 안에서 ‘큰형님’으로 불렸고, 조양은은 나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며 보좌했다. 물론 덩치 좋은 2명의 재소자는 언제나 나를 경호원처럼 따라 붙었다.

 

그 때부터 교도소 안에서 내 삶은 한마디로 쭈욱 뻗은 대로처럼 편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들 ‘조폭’무리의 힘이 세긴 셌다. 최소한 교도소 안은 확실히 그랬다. 수용시설 내 목욕장을 쓰는 게 그리도 어려웠다. 짐승처럼 북새통인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씻기 어려웠지만 ‘큰형님’이 되고나자 사정은 달라졌다. 상상해보라. 온몸에 문신이 그려진 체격 좋은 두 재소자가 목욕장 안에 지키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면 “큰형님! 여기로 오시면 됩니다”며 안내하는 꼴을 그려보면 대충 짐작이 갈 지 모르겠다. 그런 경호원급(?) 재소자는 미리 목욕장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 상태가 좋은 ‘목’(?)을 미리 확보해 두고 있다가 나를 안내하는 방식이다. 아마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지만 복부에 긴 칼자국까지 갖추고 있던 게 내 몸인지라 그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물론 좀 씻노라면 그들은 불쑥 “큰형님! 등 대십시오. 제가 밀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렇게 2명이서 번갈아 내 등을 밀곤 했다. 어이 없게도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서울구치소에서 ‘조폭의 큰 보스’로서의 위상을 굳혀가는 꼴이 됐다.

 

그러던 차 2008년 2월28일 대법원의 판결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우리 사법체계를 불신, “상고하지 말라”고 그리 당부했건만 아들 용인이는 그래도 한 가닥 줄을 잡는 심정으로 대법에 상고를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 선고일에 내 아내는 내가 갈아입을 옷을 집에서 주섬주섬 챙기고 서울로 왔다. 아내는 당연히 무죄라고 확신했기에 그런 선고결과를 전해 듣고 크게 낙담했다. 제주로 가는 길이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다.

 

그래도 서울구치소 생활은 나름 즐거웠다. ‘진짜 조폭’ 조양은을 구치소 안에서 만나게 되면서 호강(?)이란 걸 알았다. 역시 행복은 상대적이란 걸 실감했다. 그러나 그 호강의 세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4월20일 난 서울구치소 생활을 마감하고 영등포교도소로 옮겨갔다. 영등포로 가기 전 난 내 마음을 씻어내듯 내가 머물렀던 수감방 변기를 청소했다. 황갈색으로 누렇게 변한 변기를 정말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하얀 색으로 바꿔놨다. 식기로 써도 좋을 만큼 빛나게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수세미를 손에 쥐고 그 더러운 변기에 손을 집어넣고 닦는데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인간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해냈다. 누가 내 후임으로 이 방에 입주하더라도 불쾌함 없이 편히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서울구치소에서의 호강(?)을 벗어나 영등포교도소로 가게 돼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좋았다. 서울구치소에 비해 영등포가 공항과 가까워 면회를 오는 가족들이 더 편하리라 생각했다. 영등포로 간 뒤 이튿날 새 수형번호를 받았다. ‘10-7 1979’. 10사란 건물의 7번방을 배정받은 것이다. 그 곳에서 생활하던 중 며칠이 지나 손학규·양정규(2011년 작고) 두 국회의원이 잇따라 면회를 왔다. 그들은 ‘8·15 사면’을 거론했다. “광복절 사면 대상자로 신 지사가 유력히 거론된다”는 말을 해줬다. 하지만 난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다. 사면을 받는다면 내가 유죄를 인정한다는 건데 난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남들이 뭐라든 잔여형기를 다 마치고 끝까지 살아서 나간다”고 말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며칠 뒤엔 법무법인 ‘바른’의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가 나를 또 찾아왔다. 당시 MB정권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유력 실세 법무법인이다. 아마 밖에서 누군가 어떤 부탁을 넣은 것 같았다. 그는 사면과 가석방 등 특별청원을 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난 거절했다.

 

그런데 제주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나의 사면을 청원하는 도민서명운동이 벌어진다는 것이었고, 그 서명운동은 5월26일부터 시작돼 얼마 안돼 7만4,515명을 기록했다는 소리였다. 이군보 전 지사님과 장시영 회장, 김황수 전 교육감, 송봉규 전 도의회 의장, 조문부 전 제주대 총장, 김정서 목사, 임문철 신부, 오순자 여성단체협의회장, 임기옥 전 의원, 이유근 한마음병원장 등이 나섰다는 것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7만명에 이르는 도민으로부터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그 말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고마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쯤 양정규 전 국회의원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나에게 “광복절 사면대상에 들어갔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했다.

 

 

내 가슴을 울리는 제주도민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사면청원 도민서명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인 그해 6월3일 교도관이 “누가 지사님을 취재하러 왔다”고 말했다. 아마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교도소 측에서 막아 촬영·녹음 없이 다른 때와 달리 장시간 대화할 수 있는 조건으로 특별면회가 가능하도록 해줬다. KBS 제주총국의 강민부 PD 였다. 그는 내 감옥살이 생활과 법원판결의 문제, 제주의 리더십, 출소 후 계획 등 상당히 많은 걸 물어봤다. 어쨌든 언론에서 그렇게 나를 찾아와 준 것에 대해 퍽이나 고마웠다. 예상에 없던 일이기도 했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그렇게 말을 끝냈다. “나와 가족들의 고통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도민들이 사면을 청원하는 서명을 해주니 정말 고맙다. 이젠 평생을 빚진 자로 살겠다. 평생 갚을 빚으로 생각하고 도민들에게 감사하며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겠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 인터뷰 내용은 방영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안다. 강PD는 결국 그 인터뷰 방영을 강행했지만 그후 징계를 당했다. 아마 방영을 막았는데 강행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방송사의 편성제작국장이다. 건재한 걸 보면 한편으론 미안하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반갑기도 하다. 어쨌건 그의 방문으로 잊고 지내던 고향 제주가 다시 내 가슴 팍을 후볐다. 옥살이를 하며 제주를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도민들의 사면청원 서명운동과 강PD의 인터뷰에 응하다 보니 한 없는 물결로 고향 제주가 내게 다가왔다. 수감생활을 기록한 내 메모장엔 그런 고향을 향한 안타까움이 배어 나온다. “제주는 10년 전에 때가 왔다. 그러나 그 때를 깨 버린 자나 그 때가 깨어지는 걸 막지 못했던 자나 사실 그냥 역사의 흐름을 탄 것 뿐이다.” 내 입에선 그런 한탄과 자조가 흘러 나왔다.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현경대 전 의원도 그 때쯤 나를 찾아왔다. 그는 알듯 모를듯 좀 생뚱 맞은 얘기를 나에게 건넸다. 나에게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난 그 시절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는 2008년 4월 총선에서 낙선한 후 비슷한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듯 하다. 난 그의 화두에 “우리가 제주도와 제주도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우릴 선택해달라고 호소한 것 아닌가? 도지사나 국회의원 하지 않더라도 일하겠다고 나섰던 우리로선 우리 스스로 제주도민을 버릴 순 없지 않은가? 당신은 고향에 내려가 무료변론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것 역시 우리 도민을 위한 길 아니겠는가?” 그렇게 답했다.

 

그를 만나고 난 뒤 수감방으로 되돌아오자 착잡했다.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내 삶을 살았던 것은 ‘내 개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성질머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얘기를 나누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니다. 그건 내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난 꿈꾸던 세상을 살았구나.” 생각은 다시 제주를 향해 줄달음쳤다.

 

8월15일이 지나갔다. ‘사면대상자에 올라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국 난 제외됐다. MB의 수행비서관 역할을 하던 임태호 전 제주전문대 학장의 아들 임재현 행정관 등이 적극 나섰지만 검찰의 반대로 난 ‘물먹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애초 사면심사 대상자에 올라 1차 심사 관문을 거쳤는데도 검찰이 극구 반대, 재심까지 갔지만 결국 안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면대상자로 언론에 이미 이름을 올렸는데도 안됐다. ‘혹시나가 역시나’ 였다. 어차피 사면을 원했던 것도 아닌 터여서 그저 덤덤했다.

 

 

그런데 그해 9월8일 영등포교도소 안에서 31세의 젊은이가 출소를 한달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건을 내가 알게 된 건 이틀이 지난 9월10일이다. 김씨 성을 가진 재소자다. 그 때 나에게 ‘사소’ 중 한명이 잰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와 사실을 고했다. ‘사소’는 죄수들 중에서 행형성적을 감안, 선발돼 교도관을 거드는 일종의 심부름꾼이다. 그가 말하길 자살한 친구는 사소반장으로 행형성적이 좋았는데 담배거래를 하다 들통나는 바람에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죄수들 중 5명이 얽히고, 교도관도 얽힌 비리였다. 사소반장을 하던 그 친구의 누이동생이 여대생인데 담배 심부름을 한 것이다. 눈을 감아주는 조건으로 교도관 통장에 돈을 넣어주고 교도소 안에서 음성거래를 하다 걸렸다는 것이다.

 

물론 죄수도 문제지만 교도관들은 더 문제였다. 아마 교도관들이 그 사소반장에게 “잘못 말하면 네 누이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갈친 것으로 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여동생의 안위를 걱정하다 덜컥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담배거래’ 사건은 이후 불문에 붙여졌다. 그런데 사소 중 한 명은 “진실을 밝히겠다”며 불같이 소리를 질렀다. 난 만류했다. “출소 후 문제 삼아라. 여기선 어렵다”고 조언했다. 그런데 사건의 진실은 더 있었다. 재소자 중 누군가 슬며시 내게 다가오더니 자살한 그 사소반장이 애초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장을 목도했다는 그는 그 사소반장이 목을 맸지만 내려 놓자 아직 숨이 멎지 않았는데 후송과정 중에 숨졌다는 것이다. 진상규명 의혹이 교도소 안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흐지부지됐다. 교도관과 결탁된 담배반입 사건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모두가 불문에 붙여지고 사건은 은폐됐다.

 

자료를 확인해 보니 최근 5년간 교도소 안에서 자살한 사람은 86명이나 된다. 무슨 사연으로 어떻게 숨져갔는지 제대로 조사되는 경우는 드물다. 더욱이 진정 자살인지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는 이런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재소자들은 그냥 그렇게 개처럼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억울한 이들이 많은 교도소에서 난 다시 원예반에 배치됐다. 지난 회고에서 원예반은 힘 깨나 쓰는 이들이 대접 받는 작업장이라고 설명했다. 한 젊은이의 어이 없는 비명횡사 소식을 듣다보니 ‘특별대접’이 마뜩치 않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도 교도관의 비리가 있었다. 한 교도관이 나에게 이르길 “밖에서 청탁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청탁은 곧 무언가 또 다른 걸 손에 쥐어져야 한다는 소리다. 난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거기 배치 받을 마음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2008년 11월 원예반으로 배치됐다. 내가 그 곳으로 배치되는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교도관과 일부 작업반장은 농간을 부린 것이다. 아마 그 과정에서 챙길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 원예반에서 난 한가로운 노역 생활을 하며, 때론 교도행정의 잘못에 맞서 교도소장을 진땀 흘리게 만드는 ‘꼴통’ 죄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다음 해를 맞았다. 2009년-. 그 해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교도소장과 티격태격하던 때인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만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난 그날 멍하니 하늘만 쳐다봤다. 충격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외침을 듣고 난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한동안 몸도, 마음도 가누기 어려웠다.<48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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