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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50)

2010년 10월26일. 제주지검은 도지사 당선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허위사실 공표)에 대한 나의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 ‘증거불충분’ 명목으로 ‘혐의 없음’ 조치를 내렸다는 문서를 나에게 보내왔다.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98년 6·4 지방선거 뒤부터 내 정치인생을 망쳐버린 검찰과의 악연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착잡한 생각을 가눌 길 없었다.

 

11월3일 오랜만에 연우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우회(緣友會)는 제주도지사와 교육감, 제주대 총장을 지낸 전직 인사들의 모임이다. 1987년 이군보 지사가 퇴임하면서 만들어진 모임이다. 만 65세 이상이 대상이다. 재직시절의 경험과 경륜을 살려 서로 친목을 다지면서 고향에도 원로의 역할을 하며 봉사하겠다는 의지로 만들어졌다. 지금 그 구성원은 도지사를 지낸 이군보, 김문탁, 김태환 전 지사와 나, 더불어 교육감을 지낸 양치종, 김황수, 강정은, 김태혁 전 교육감을 비롯해 제주대 총장을 지낸 김형옥, 조문부, 부만근 전 총장이다.

 

그동안 술을 멀리해 왔다. 몇 년 전 내가 출석하는 제주영락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맡으면서다. 그러나 그 날은 김태환 지사의 강권을 핑계로 나도 모르게 폭음을 하고 말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을 못할 정도로 난 그날 인사불성이 됐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집에 돌아와 고꾸라지듯 잠을 잤다. 그러다 속이 괴로워 새벽 무렵엔 하지 않던 구토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내 마음과 가슴에 담아 둔 모든 걸 털어내는 듯 했다.

 

다음 날 난 녹차밭으로 갔다. 1998년 퇴임 후 난 답답하고 힘들거나 어려울 때 언제나 조천읍 교래리 녹차밭으로 갔다. 사실 그 녹차밭은 우리 종중(宗中) 어르신들이 숯을 구워서 팔고자 참나무를 가꾸던 밭이다. 4만3천평이나 된다. 한진그룹의 제동목장 구역 안에 있다. 대한항공에선 과거 그 땅에 욕심을 냈다. 그런데 그 땅의 관리를 맡았던 내 부친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대한항공의 거래제의를 뚝심으로 묵살했다. 490만평이나 되는 제동목장 부지 구역 내에 유일하게 표선 앞바다가 탁 트여 보이는 땅이니 사실 한진그룹에서 욕심 낼 만도 했다. 난 1998년 지사직에서 퇴임하고 난 뒤 그 땅 중 1만평을 개간하고, 6천평에 녹차나무를 심었다. 이름도 ‘신구범의 야산다원(野山茶園)이라고 붙였다. 말이 밭이지 그저 난 그 땅의 일부를 개간하고 녹차나무를 심은 게 전부다. 그저 자연의 섭리 따라 자라는 데로 놔두고 있고, 1년에 한번 억새, 넝쿨과 잡풀을 베는 수준이 고작이다.

 

 

그 밭은 철 따라 고사리가 지척으로 널려 있는 곳이라 그 밭에서 일을 하다 보면 더러 고사리를 캐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데 나를 만나면 오히려 그분들이 걱정을 한다. “이 밭에서 무신 거 나코예(뭐라도 나오겠습니까)?” 내 가까운 주변 사람들도 “녹차를 베어내고 다른 거 심으라”는 소리를 자주 한다. 하지만 난 다르다. 난 그 밭에서 돈을 얻으려 하는 마음이 없다. 이득을 생각지 않는다. 자연에 맡겨 자라는 녹차나무를 보며 그저 뿌듯함을 느낄 뿐이다. 그 녹차 밭에만 가면 마음이 개운하고, 녹차나무를 하나하나 다듬으며 생명을 배운다.

 

그런 그 6천평 녹차밭을 혼자 관리하기란 솔직히 좀 버겁다. 어느 정도 억새와 잡풀이 자라 이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할라치면 난 그곳에 한 달을 매달린다. 나름 넓어서 혼자서 잡풀을 다 걷어내며 녹차나무가 새순을 싹 틔우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한달여의 작업을 마칠 때 쯤이면 내 마음은 넉넉해진다. 평온해진다. 그 녹차나무는 나에겐 생명이고, 그 생명을 대하다 보면 세상의 명예·돈·체면·권력 모두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그 모든 것 역시 생명이 없다면 어린 생명을 보유한 어린 녹차나무만도 못한 것 아닌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은 그 어떤 것도 생명이 없으면 존재의미가 없다는 걸 녹차나무로부터 배운다.

 

2010년 가을 녹차밭 일에 매달리던 한 때 내 메모장엔 이렇게 쓰여 있다. “바람이 스쳐가듯 지나가는 염려, 울분, 답답함, 원통함이 내게는 회한과 함께 왜 없겠는가? 하지만 녹차밭 한 가운데 서서 구두리오름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이름 모를 새들과 함께 날아드는 바람소리를 듣노라면 정말 이것들, 명예·염려·울분·원통·답답함 모두 바람처럼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내가 어리석은 것만큼은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1초라도 더 붙잡게 되는 것 뿐이구나.”

 

 

더욱이 그 시절 녹차밭은 내 손길을 더 필요로 했다. 감옥살이를 하느라 거의 3년간 돌보지 못한 탓이다. 작업창고에서 먼지를 털며 농기구를 다시 매만지고, 잡풀을 뜯어내다 허기가 지면 아내가 싸준 점심도시락을 풀어 헤쳐 밥을 먹는다. 해가 뉘엿뉘엿 져 더 이상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울 황혼 무렵에 이르러야 난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차의 시동을 켜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녹차밭에서 씨름하던 때였다.

 

11월6일 녹차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직전 퇴임한 김 지사의 측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 “다음 주면 시끄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 관광지에 대해 검찰이 압수수색에 나섰는데 검찰의 칼 끝이 현직 지사를 겨누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아무 말 않고 그의 말만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 전날 나는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전화를 받은 터였다. MB정권의 간택(?)을 받아 제주경주마 사업본부장으로 내려온 전 중앙지 제주주재 기자였던 N씨 역시 나에게 돌연 연락이 오더니 “오늘 자로 그 관광지 관련 혐의와 수사는 모두 종결됐다. 무혐의”라고 알려왔던 것이다. 솔직히 그들이 왜 내게 그런 연락을 해 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시절 난 그런 얘기들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엇갈린 얘기를 듣다보니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정치와 검찰의 ‘불륜’(?)이 몹시도 고약하게 느껴졌다. 사실을 은폐하는 가장 추악한 단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저 이런 말, 저런 말에 믿기지도 않았고, 또 믿어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란 회의만 들었다. 그저 내 내 녹차밭이나 잘 가꾸고 싶었다.

 

매일 새벽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아내는 내 점심 도시락을 싸 주면서 “당신은 행복한 남자”라고 말했다. 아내가 말하는 이유는 이랬다. “녹차밭에 가면 6천평 녹차나무가 당신을 반가이 맞아주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내가 반가이 맞아주니 당신은 행복한 남자가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난 녹차에 푹 빠져 지냈다. 점심식사를 제외하곤 하루 종일 작업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체력이 뒷받침 되는 게 신기했다.

 

2010년 11월20일이었다. 한창 밭에서 풀을 베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가능한 빨리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오후 6시쯤 집으로 갔다. 아내의 얼굴은 침울했다. “큰 애(신용인, 현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해군기지 소송과 관련해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했다”며 노심초사하는 기운이 역력했다. 아들이 언론에 기고한 글을 읽어봤다. 그동안 불거진 해군기지 소송의 쟁점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아들을 불러 내 판단을 전했다. 그 시절 내 판단으론 아들의 글은 부적절했다. 이미 법원에서 결심을 끝내고 판결을 앞둔 시점에서 쟁점을 소개한다는 건 시의에 맞는 글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 시절 큰 아이는 해군기지 부지인 서귀포 강정마을회의 소송을 공동으로 맡은 고창후 변호사와 함께 소송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 변호사가 서귀포시장으로 임명되는 바람에 홀로 남아 강정마을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던 터였다. 난 아들에게 “소송수행 변호사로서 입장을 당당히 밝히는 게 낫다”고 말했다. “재판에 정치적 영향을 받을 판사의 판단이 걱정이라면 판사의 심기를 고려하는 그런 것보단 강정주민의 아픈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당당하게 담당 변호사의 입장을 공개하는 게 더 낫다”고 말했다. 아들이 수긍하는 눈치였다.

 

때맞춰 당시 대한민국 정세는 요란했다. 11월23일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북은 “호국훈련에 대한 북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이유를 댔다. 그런데 대통령은 “단호하게, 그러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국군통수권자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자신의 임무를 과연 숙지하고 있는가? 혼자 열이 끓어 올랐다. 한심한 대통령이란 생각에 이르던 참이었다. 그 문제를 놓고 어느 하루 아들과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그런 말을 꺼내자 큰 아이는 “그렇다면 만약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서슴지 않고 대답해줬다. “대통령이 내릴 명령은 하나다. 주저 없이 대응포격, 즉각 반격명령을 내려야하는 것이다. 그동안 서해교전을 비롯해 천안함이 격침됐고, 금강산 관광객이 피살되는 등 많은 장병과 국민이 죽어갔지만 그동안 우리 정부가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정신 못 차리는 건 지, 눈치를 보는 건 지, 아니면 무경험으로 판단이 부족한 건 지 알 수 없지만 우리 헌법 69조에서 규정한 대통령의 책무, 즉 국가를 보위할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라고 한 헌법을 그는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얘기는 단호한 대응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 없다. 최근 중앙언론의 한 보도에서도 그 시절 대통령과 청와대는 당시 지휘체계에 혼선이 있었고, 군인들에게 할 명령을 국민에게 발표하는 등 위기관리 전략도, 매뉴얼도, ABC도 없었다.

 

그러나 큰 아이의 답은 걸작이었다. “북한은 사실상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함부로 대응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물론 그건 현실이다. 김정일-김정은은 핵을 포기하는 순간 무너진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김정일-김정은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핵은 어떤 경우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주변국들의 시스템인 6자회담도 이런 논리로 보면 답답한 노릇이다.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속이 좋지 않은 건 6자 회담을 주도하는 건 미·일·중·소 4개국이다. 우리 남한은 무슨 연락병 같은 신세나 다름 없다. 결국은 이런 이유로 북핵(北核) 인정은 불가피하고, 그런 판단이 서면 우리도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다만 우리의 핵 보유 목적은 북한과 같은 장난과 도발·엄포용이 아니라 전쟁 억지 차원이 돼야 하고 그걸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원에서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이 이쯤 이르자 아들은 “그러면 아버지가 대통령 하시는 게 낫겠네요”라고 화답했다. 나로선 “못할 것도 없지”란 우스개로 그날의 부자간 토론을 끝냈다.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가 있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절대 평화주의자”란 이미지가 나에게 있다는 소리가 들려 내 생각을 말하려 함이다. 어쩌다 보니 내가 막연한 해군기지 반대론자인 것 처럼 비쳐지는 것 같아 본심을 말하기 위해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해 12월15일 제주지법은 서귀포 강정주민들이 제기한 절대보전지역 해제 처분 취소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적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법적 문제를 따져 보는 본안심리 조차 가보지 못하고 소송이 끝나버린 것이다. 아들의 낙담이 컸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아비로서 걱정이 돼 위로의 전화를 해주며 아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때부터 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강정주민의 고통을 풀어줄 방법은 없는가?” 새로운 숙제가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말한다. 사실 난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1994년 정부가 화순항에 해군기지 설치를 염두에 둘 무렵 ‘국가안보 시설’인 해군기지가 제주에 조성돼야 한다는 걸 인정한 사람이다. 도지사 재임 시절 정부의 항만기본계획과 제주도종합개발계획에 “안덕면 화순항은 민항규모를 최소화하고 군항으로 활용한다”고 못 박혀 있었고, 사실 그건 ‘해군기지’ 표현만 쓰지 않았을 뿐 명백히 군항이 설치되는 것이었다. 난 그 시절 정부 계획에 도지사로서 동의했고, 정부방침을 존중했다.

 

그 해군기지에 대해 난 두 가지 생각을 한다. 그 하나는 정말 해군기지가 안보시설이라면 국가는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실토를 했다. “제주의 해군기지 최적지는 화순항”이라는 것이다. 진정 국가안보시설이라면 주민이 반대한다고 해서 최적지를 포기하는 나라가 과연 있는가? 내가 아는 한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해군기지 입지 변경은 그래서 난 지금도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책무가 있다는 점이다. 관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정주민들의 첫 투쟁의 동기가 무언지 제껴두고서라도 지금껏 강정주민들이 말하는 요구는 사실 하나다. “주민동의 절차와 절대보전지역 해제 절차에 문제가 있었고, 여기에 대해 국가가 명백한 진상을 조사해주고 문제를 시정해달라”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진상조사 해봐서 절차가 정당하다면 국가는 그냥 해군기지를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았다면 국가가 사과하고, 그동안의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한다. 그게 정부(국가)의 관용이다. 이 정도 관용도 없이 백성을 지키겠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그런 생각에 골똘히 빠져가고 있는데 그해 12월27일. 해군이 서귀포 강정포구에 건설자재를 반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며 기자회견에 나선 사람들이 모두 연행됐다. ‘미신고 불법집회’란 이유였다. 괴로웠다. 우리 도민들이 까닭 모를 벌판으로 쫓겨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지사를 지낸 이로서 그들의 아픔을 그냥 팔짱만 끼고 지켜봐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해가 바뀌고 2011년 신묘년 새해 아침 난 우리 도민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렸다. 언론에도 내 생각을 전했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 언론대담과 보도에서도 나왔던 얘기지만 그 전문을 여기 옮긴다.

 

신묘년(辛卯年) 새해인사 올립니다.

신묘년(辛卯年) 새해에는 우리 제주사회의 역량과 자존이 한껏 되살아나고 도민여러분의 삶이 더욱 소중하며 넉넉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도민여러분,

 

해군기지건설 문제로 그동안 4년 가까이 겪어온 우리 제주사회의 갈등과 강정마을 주민의 고통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앞 해군기지 관련 노숙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여성시위자가 중상을 입는 불행한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속한 쾌유를 빕니다.

 

지금 강정 해안에는 ‘원고부적격’이라는 법원의 비법과 ‘해군기지건설공사 강행’이라는 정부의 졸속이 강정마을 주민들의 생존과 공동체의식을 파괴하고 우리 제주사회의 역량과 자존까지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4·3’을 거치면서 우리의 장두정신은 무너지고 잘못 학습된 침묵과 자조적 방관이 이를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도민 여러분,
이제 강정마을 문제는 제주사회와 도민 모두에게 주체적인 대답과 행동을 요구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자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실 결사항전이나 조건부수용이라는 강정마을 주민의 결의만으로는 해군기지건설 추진에 따라 야기되는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강정마을 주민의 고통과 분열을 볼모로 무리하게 일방적인 해법을 강요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해군기지건설을 통해서 강정마을 문제를 바라보기 보다는 강정마을 문제를 통하여 우리 제주사회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도민 여러분과 함께 해군기지로 인하여 촉발된 강정마을 문제 논의를 위한 개인적 의견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 정부와 해군은 해군기지건설공사를 일시 중지하고 제주해군기지 건설 후보지를 단순히 주민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화순, 위미를 거쳐 강정마을로 변경하여 그동안 해당 주민들에게 심대한 분열과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하여 사과하기 바랍니다.

 

둘째, 제주특별자치도의회는 제주해군기지건설과 관련한 과거 절대보전지역변경해제를 위한 도의회 동의절차 상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한편 앞으로 관련법의 개정 또는 제정에 앞서 <강정마을 지원계획수립 및 소요예산확보를 위한 조례>의 제정을 추진하기 바랍니다.

 

셋째,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제주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한 국무총리실과의 협의결과를 구체적으로 공표하고 도지사직을 걸고 확실하게 이행할 것임을 제주도민과 강정마을 주민에게 서면공약하기 바랍니다.

 

넷째, 도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제주해군기지건설 제주도민 감시위원회(가칭)’를 구성, 운영하여 강정마을주민과 도민의 뜻에 따른 민관복합형 관광미항을 건설하는데 기여함으로써 온 제주도민의 주체적 역량과 자존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저도 한 때 도정을 담당했던 경험을 살려서 李君普(이군보) 지사님을 비롯한 역대 도지사들과 함께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자세로 해군기지건설을 비롯한 제주사회의 현안해결과 발전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도민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11. 1. 1. 신구범 드림
 

 

 

 

그 입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름 문제를 해결할 제안을 담아 더 이상의 충돌을 막고, 우리 도민들의 평안과 국가안보도 도모할 명분을 제시하고 싶은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각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은 급변했고, 운명처럼 난 무언가에 홀려 이끌리듯 서귀포 강정마을 중덕해안을 스스로 찾아갔다. 지금도 옥살이를 하며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는 그를 만나 내 생각은 자명종에 깨어 놀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양윤모!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이다. <51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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