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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5)

못난 내 인생이 결국 ‘국립학교’로 옮겨졌다. 억울한 노릇이지만 버텨야 했다. 2007년 11월30일부터 서울구치소에서 시작된 내 옥살이 얘기다. 아스라이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런 경험이 있는 이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묘하게도 난 그 곳에서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많은 일화도 있다. 그곳 역시 인간이 사는 땅인 것을-. 내 삶을 채운 790일의 기록을 이제 더듬어 본다.

 

2007년 11월30일 오전 11시 서울고법 재판정. 예상 밖이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그리곤 난 현장에서 법정구속, 곧바로 서울구치소로 직행했다.

 

이전의 회고에서 이미 기록했지만 그 사안은 애당초 검찰의 수사부터 ‘정치검찰’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례다. 몇 번의 선거와 국회 할복사건을 거치며 나를 이 잡듯 뒤지던 검찰이 사회복지법인 은혜마을 재단 설립 건을 놓고 ‘30억 뇌물수수’로 몰아갔던 것이다. 2003년 6월 서울지법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그 사안이 2004년 2월12일 서울고법에서 다시 뒤집혀 유죄로 가더니 2004년 4월27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했고, 1심 판결 후 4년 5개월여만인 바로 그날 서울고법은 나에게 징역 2년6월의 방망이를 두드렸다.

 

 

기가 막혔다. 재일동포를 위해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는데 기업인들의 도움을 얻은 게 뇌물이라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개인 재산인 땅을 내놨고, 설립기금을 법인 공식통장으로 받았는데 세상에 뇌물을 법인계좌통장으로 받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 나중에 알았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던 그 사건은 사실 서울고법 2심 판결에서부터 꼬이고 있었다. 2004년 2월 서울고법 2심 판결을 맡았던 장본인은 대법관 임용을 둘러 싸고 많은 말이 나왔던 신영철 대법관이다. 2009년 ‘촛불시위’ 정국에서 신속한 재판을 요구, ‘재판개입’ 사태를 촉발했던 그 사람이다.

 

투옥되고 난 뒤 찬찬히 판결문을 훑어 봤다. 나의 뇌물수수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것도 기가 찬데 난 자수한 걸로 기록돼 있었다. 형법 122조1항, 5조 1항 3호에 의해 자수한 걸로 돼 있었다.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2심 재판에서 또다시 무죄를 다투고 있는데 자수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옥중에서 형사소송법 교과서를 찾아봤다. 도대체 법률가들이 말하는 ‘자수’라는 게 뭔지 알고 싶었다. 형사소송법 교과서는 자수를 이렇게 개념정의하고 있었다. “범인이 수사기관에 대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범죄사실을 신고하여 소추를 구하는 의사표시.” 내가 언제 자발적으로 범죄사실을 신고했다는 말인가?

 

선고형량도 이해할 수 없었다. 30억 뇌물수수가 사실이라면 특가법상 최소 징역 10년 이상이 나와야 맞다. 5000만원만 뇌물로 받아도 징역 5년은 충분히 나온다. 그런데 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법률상 ‘감경’, ‘작량감경’이란 방법을 총동원해야 나올 수 있는 형량이다. 말하자면 재판장이 재판상 할 수 있는 걸 다해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선처를 궁리했다는 소리가 된다. 혹시 모르는 이를 위해 상술하면 ‘작량감경’에 대해 법규정은 “법률상 특별한 감경사유가 없는 경우에도 법원은 정상에 특히 참작할만한 사유가 있을 때는 감경한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그 시절 내 경우는 참작할 만한 사유가 없었다. “정부가 농·축협 통합을 잘못했다”고 법정에서 소리 지르고 한 이를 정상참작할 이유는 없다.

 

더 웃긴 건 뇌물수수가 유죄라면서 추징액도 없었다. 뇌물이라면 30억 추징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이상하고, 황당한 선고였기에 나로선 예측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저 그 후로 줄곧 곱씹어 본 생각은 “정치검찰이 수사에 나서 무리한 수사로 기소했고, ‘골프재판’에 항의하며 법원에 항의했던 나에게 그들은 괘씸죄로 옮아 매려 했지만 그나마 미안했던지 최소한의 양심은 보인 것”이란 판단이다. 그 시절 내 아들 용인이는 결국 법복을 벗고 말았다. 부산지법에서 판사로 일하던 아들은 재판결과에 항의하는 글을 법원 게시판에 올리고, 판사직을 그만 두고 말았다. 그 시절 못난 애비 탓에 판사직을 그만 둔 아들이 법원 게시판에 올린 글을 여기에 옮긴다.

 

 


 

 

 

“법정구속을 당한 아버지를 바라보며”

 

 

 

저는 2007. 11. 30. 특가법위반(뇌물) 등으로 2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피고인 신구범의 큰 아들 신용인 판사입니다.

 

아버지 사건의 내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던 저로서는 막상 다시 유죄판결이 선고되자 몹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명색이 판사인 제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고, 억울하지만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선고 다음날 참담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구치소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제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나를 감옥에 넣을 권한이 있느냐? 만일 내가 죄가 있다면 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죄가 없다. 어떻게 그 따위 엉터리 재판을 하느냐? 나는 이제 사법부를 믿지 않는다. 상고를 하지 않겠다. 더 이상 사법부가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연연하지 않겠다.”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판사들은 참으로 성실합니다.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열심히 일합니다. 특히 유ㆍ무죄 판단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하여 공정하게 사심 없이 판단하고자 노력합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깨끗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판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판사를 철저하게 불신하고 아예 상고까지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갑자기 제 자신은 재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공정하게 재판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오판을 하여 당사자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 일을 통하여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법원이 아버지 사건에 관하여 왜 유죄 판결을 하였는지 도대체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말 내내 이를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소위 도지사 선거법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생긴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진실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하였고 그 결과 오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버지가 법원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법원의 판단이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농ㆍ축협 통합 반대운동을 하자 그와 관련하여 수사를 시작한 검찰은 30억 원 뇌물 수수 혐의를 추가하여 영장을 청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장전담판사는 영장청구를 기각하였습니다. 검찰이 영장을 재청구하자 아버지는 죄가 없으니 판사신문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만용(?)을 부렸고 당직 판사에 의해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구속적부심을 통하여 석방되었고, 2003년 6월11일 1심에서 특가법위반(뇌물)의 점에 관하여는 무죄판결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1심 무죄판결이 선고되기 불과 20일 전인 2003년 5월21일 아버지는 도지사 선거법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대법원에게 담당 재판부의 재판 회피와 관련해 인용 사유와 근거, 골프 회동 사실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 기자회견이 있은 후 9개월 정도 지난 2004년 2월12일 항소심은 특가법위반(뇌물)의 점에 관하여 유죄를 인정하며 2년 6월의 형을 선고하였고, 2007년 1월26일 대법원은 전부 파기환송하면서 특가법위반(뇌물)의 점을 역시 유죄로 인정하였고, 2007년 11월30일 고등법원은 대법원의 판단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둘째, 아버지 사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일 때 모 부장판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법원 수뇌부는 아버지에 대하여 아주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들인 신 판사 역시 좋게 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 판사는 아직 젊으므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달리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 때 모 부장판사님께서는 저를 아끼는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배신감마저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 분의 신상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이 글로 인하여 그 분에게 조금도 불이익이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법원 수뇌부가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나쁘기에 그 아들이라는 이유로 저까지도 밉게 보는 것일까요? 또한 아버지에 대하여 그 정도의 부정적인 예단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공정하게 재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도지사 선거법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장이 담당 사건의 피고인이었던 현직 도지사의 변호사와 골프를 친 사실도 없고, 그 사실이 문제되자 이를 무마하게 위하여 피고인 측에게 로비한 바도 없으며, 회피신청 사유도 정당하였다면 이를 가지고 기자회견까지 한 아버지의 태도는 법원의 권위와 재판의 독립성에 대한 부당한 도전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담당 재판장이 피고인 측 변호사와 골프를 함께 쳤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비롯한 피고인들 측에게 로비를 하였으며 결국 문제가 되자 몽땅 아버지 탓으로 돌리면서 회피신청을 하였고, 제주지방법원 및 대법원은 진실을 규명하기 보다는 사건 은폐를 기도하면서 이에 대하여 정당하게 항의를 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매도하는 분위기로 몰고 갔다면, 그 결과 아버지의 정치생명은 끊어지고 감옥에까지 가게 되었다면 이는 범죄행위나 다름없는 일이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도지사 선거법위반 사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점에 대하여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첫째, 담당재판장이 당해 사건의 피고인이었던 당시 현직 도지사의 변호사와 함께 골프를 치고 향응을 대접받은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 둘째, 골프 회동 사실이 기사화될 여지가 보이자 재판장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당시 피고인들이었던 도지사와 아버지 측 변호사를 각 상대로 하여 기사화를 막아달라고 로비를 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 셋째, 재판장의 회피신청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그에 대한 인용이유가 무엇인지 여부. 넷째, 제주지방법원과 대법원은 사건의 진상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어떠한 조치를 하였는지, 또한 사건 은폐기도는 없었는지 여부.

 

위 네 가지 점이 분명하게 밝혀진다면 저의 결론이 맞는지 틀린지 여부가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저의 결론이 틀렸다면 그에 대한 어떠한 비난과 징계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버지 사건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아버지 사건과 관련된 그동안의 제 경험을 적어 탄원서 형식으로 재판부에 제출하고자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 사건이라고 하지만 판사가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기록에 남기는 것은 판사의 금도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탄원서 제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판사의 금도를 지킨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억울하게 감옥 가는 것을 수수방관하였다는 죄책감이 더욱 큽니다. 차라리 제가 감옥에 가 있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 때 제출을 포기하였던 탄원서를 첨부파일로 올려 그 내용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끝으로 이런 글을 게시하여 전국에 계신 법원 가족 여러분께 누를 끼치게 된 점에 대하여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특히 제가 투병 생활하는 동안 저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항상 사랑으로 격려를 해주셨던 이기중 법원장님께는 머리 숙여 백배 사죄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별난 아버지를 둔 못난 아들이기에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점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난 수감됐다. 서울구치소로 끌려갔다. 받은 수형번호는 4중1 3689. 그 이전 단 5일간 수감생활을 하고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난 적은 있지만 정말 말 그대로 본격적인 투옥생활에 돌입한 것이다. 과거 양병윤 화백이 어려움에 처해 잠시 옥살이 얘기를 꺼낼 때 그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는 말을 나에게 한 적이 있다. 이제 나 역시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삶이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투옥됐는데, 이상하리만치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담담했다. 그저 걱정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내가 없이 아내는 어떻게 살아갈 건 지가 걱정이었고, 이제 사업본격화를 앞둔 (주)삼무의 해상풍력발전 사업 등을 떠올리니 무너질 게 불 보듯 뻔하기에 답답했다. 삼무의 주주들과 채권자들에 대한 죄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들이 내 마음 속에 점령군처럼 밀려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억울하다고 소리칠 겨를도, 틈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히려 다행”이란 위안도 있었다. 옥살이가 시작된 뒤 이튿날인 12월1일 오전. 아내와 용인이가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왔다. 아내는 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경기도 과천에 집을 얻겠다고 말했다. “상고하겠습니다. 상급 재판부의 새로운 결론을 받아내겠습니다.” 큰 아들 용인이는 그렇게 결연히 말했다. 내 대답은 차가웠다. “상고할 필요 없다. 우리나라의 법원을 믿을 수 없다. 면회도 다시 오지 마라.” 아내도 그냥 제주에 기거하도록 했고, 제주교도소에 설치된 기기를 통해 화상면회로 만족하자고 다독거렸다. 더불어 화상면회 조차도 가족 외엔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고 전하도록 말했다. 솔직히 수의를 걸친 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감 3일째인 12월2일. 살아갈 궁리를 했다. 단식에 들어갔다. 마음도 몸도 다 비우고 시작할 요량이었다. 교도행정에 대한, 판결에 대한 불복과 항의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도소는 야단법석이었다. 내가 사고 칠 것을 우려한 모양이다. 독방에 갇힌 신세였는데 교도관들이 수시로 내 동태를 살폈다.

 

단식을 시작한 그날 책을 뒤적이다 강준민 목사가 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벼랑끝에서 웃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란 책이었다. 내 마음을 달래주는 문구가 눈에 박혔고, 가슴을 파고 들었다. “당신을 괴롭히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인생을 무너뜨릴 능력은 있어도 당신의 인생을 회복시킬 능력은 없습니다.” 그랬다. 공연히 싸울 필요가 없었다.

 

12월8일 추운 겨울날이었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쳤다. 아내가 특별면회 형식으로 구치소에 찾아왔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지 않은 만남이다. 아무 말 없이 아내를 꼭 안아줬다. 아내 역시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용인 아빠! 이제 그만 단식을 푸시죠.” 아내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 “그러겠다”고 말했다. 내 마음도, 몸도 비울 생각이었고 열흘을 계획했지만 아내의 말에 따르는 게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아내를 돌려보내고 신문을 찬찬히 훑다 보니 조선일보 토요섹션에 실린 한 사람의 칼럼이 와 닿았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이란 사람이 쓴 ‘멋진 과학’이란 칼럼이다. 그는 그 글에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게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믿음만을 확증하는 정보만을 찾아내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대통령, 판사, 최고경영자, 과학자가 이런 확증편향을 극복하지 못하면 엉뚱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적었다. 무릎을 쳤다. 오만가지 상념이 나를 사로 잡았지만 왜 내가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얻은 답이었다. ‘엉뚱한 판단을 내린 판사’란 그림이 그려졌다. ‘나쁜 정치인’, ‘사법부에 건방지게 덤벼드는 놈’. 아마 난 그 시절 나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한 그 판사에게 그렇게 낙인 찍혔을 것이다. 그런 확증편향이 나를 옥에 가둔 것이다. 편견과 선입관의 굴레로 나를 가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 진 것이다. 그는 판결을 내릴 권력이 있었고, 내가 맞설 기회와 여건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보단 어차피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기에 살아야 했다. 크리스찬인 나로선 신앙과 종교로 이를 악물고 버틸 수 밖에 없었다. 내 마음을 의탁하고, 평정을 되찾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서울구치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서울구치소에선 월요일은 불교집회, 화요일은 카톨릭 집회, 목요일은 기독교 집회로 수감자들의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나로선 매주 일요일 주일예배를 드려야 하고, 일요일 교회에 가는 게 상식인데 그럴 여건이 아니었다. 더욱이 독방신세인데 다른 재소자와 예배를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엉뚱했다. 혼자 골몰하다 찾아낸 방법은 내 독방 안에서 스스로 예배를 하는 것이었다. 옥에 갇힌 지 10일째인 12월9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성경구절에 예수가 한 말이 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서 나도 너희들과 함께 있으리라.” 독방이었지만 둘만 있으면 됐다. 간절히 아내의 혼을 불렀다. 아내가 기도하고, 내가 성경을 읽는 주일예배를 스스로 시작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울 지 모르지만 매주말 올린 그 주일예배로 난 삶의 평온을 되찾았고, 의욕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지탱시킨 또 하나가 있다. 감옥에 갇히고 나서 딱 5일 뒤인 2007년 12월5일. 그 때부터 난 아내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 수감자들이 만든 편지지로 매일매일의 삶을 깨알같이 적었다. 물론 아내에게 부치진 않았다. 785통이다. 2010년 한겨울인 1월의 끝자락에 감옥을 나서며 내 손에 들려진 그 편지 묶음은 두툼했다. 집안에 들어서며 “당신에게 못 보낸 편지인데 이제라도 보시게”라고 말하고 그 묶음을 건넸다. 아내는 한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늙은이가 주책이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내는 내 삶을 지탱시켜준 영원한 동지다. 50년 가까이 나와 동고동락한 벗이자 동반자다. 사고뭉치 남편을 만나 지독히 속이 썩은 내 사랑이다. 수감시절 아내를 그리다 문득 살아온 지난 날을 되새기며 풋풋한 내 마음을 담은 습작시(詩)가 있다. 아내를 향한 그 시절의 내 무안과 송구의 한 자락이라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다. <46편으로 이어집니다>

 

안착(安着)(Ⅱ)

 

어느 여름,
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간
시자(時子: *신 전지사의 아내 이름)가 그리 그리워 기다리던
내 마음은
어느새 시가 되어
시자의 책가방 속에 안착했다.

 

어느 초봄,
소위 되기를 거부한 사랑 따라
시자는 하던 공부도 내버렸고
내 마음은
행복한 닭이 되어
시자의 날개 그늘에 안착했다.

 

허구헌 날,
성깔대로 세상과 부딪혀도
시자가 한 웃음으로 날 안으면
내 마음은
언제나 녹아내려
시자의 큰 바다 속에 안착했다.

 

어느 겨울,
“다녀 오마” 웃고 간 서울에서
시자를 기다림 속에 묶어 버린
내 마음은
울면서 기도하며
시자의 그리움 안에 안착했다.

 

죽자 사자,
함께 해도 부족한 날들인데
시자를 주께 맡기고 담장 안의
내 마음은
만날 날 계수하며
시자의 하나님 안에 안착했다.

 

-2007년 12월 18일 서울구치소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부르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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