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27일이다. 문국현 측에 던진 내 메시지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창조한국당 공성경 대표와 최고위원 등 일행이 제주로 내려왔다. 그들이 먼저 가고자 했던 곳은 서귀포 강정동 해군기지 공사 현장이었다. 현장을 둘러보고 상황을 파악한 그들과 점심을 같이 했다. 그들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0년간 선거·피선거권까지 박탈당한 문국현 전 대표에 대해 ‘사법살인을 당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공감한다. 그들은 내가 제안한 가석방 제도의 전면적 개선방안에 대해선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공조’로 방향을 살짝 비틀어 역제안 해왔다. 수감생활로 절실히 심각성을 느끼고 있던 터라 아무래도 문 대표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해 2월18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나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전 대표가 공동기자회견에 나선 건 그 10여일 전 그를 서울에서 만난 결과다. 두 사람은 서로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제물(?)이었다는 동병상련 외에 제주의 해군기지 문제 역시 사법제도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공감이 있었다. 본안심리 조차 가보지 못하고 ‘원고부적격’이란 이유로 강정마을 주민들이 제기한 소송이 기각당한 건 문제라고 본 것이다. 두 사람의 공동기자회견문 제목이 ‘제주해군기지 관련 소송이 사법정의 실현의 계기가 되길···’이었다. 해군기지 찬반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법절차 상의 문제에 더 관심을 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기자회견 뒤 문국현 전 대표는 점심자리에서 내게 느닷없는 제안을 했다. 창조한국당의 대표를 맡던지 아니면 전국구 비례, 혹은 지역구로 출마하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대통령 꿈은 버리셨습니까?” 내 물음이었다. 그는 아니라고 나에게 답했다. “그렇다면 같이 갑니다. 하지만 당대표든, 의원이든 모두 사양합니다. 평당원으로 일하겠습니다.”
그 시절 내가 가진 생각은 별 게 아니다. 제주에서 혼자 아무리 용을 쓴들 답이 나오지 않으니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창조한국당 ‘간판’은 나에게 필요한 구석이 있었다. 수감시절 느낀 가석방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과거 내가 중앙회장을 맡았던 축협 조직을 부활하고, 제대로 된 지방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언가 모험을 걸어야 한다는 직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심 “혹이나 창조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내가 나서면 이런 문제를 토론회란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제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란 복선이 있었다. 물론 당선을 기대한 것이 아니다. 당시 여건상 의석을 둔 정당 후보이기에 TV토론회 진출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봤고, 그런 공간을 활용해 국민적 공감을 얻을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몸집만 큰 여·야당이나 거대 언론이 제주의, 지방의, 감옥의 문제에 귀기울이겠는가? ‘궁즉통’의 마음이었다.
물론 그 생각은 말 그대로 ‘감춰둔’ 내심이었다. 2월2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창조한국당 입당 기자회견이다. 바라던 개혁방안도 회견장소에 온 기자들에게 사심 없이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당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제주에서 제주도당을 만드는 개편대회에 착수했다. 턱 없는 발걸음에 그 시절 나를 도와 수고해준 제주도내 인사들이 지금도 고맙다. 그들은 창조한국당 보단 오히려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팔을 걷어부친 사람들이다.
해프닝도 벌어졌다. 창조한국당 전당대회 의장인 소설가 송영과 공성경 대표 등이 제주도당 개편대회에 맞춰 제주로 왔다. 그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한 최고위원이 돌연 “신 지사님은 하시는 걸 보니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속내를 들키면 아직도 난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날 내 얼굴은 무척 무안한 얼굴이었다. 쑥스러운 마음에 그날의 내 비망록에 남긴 메모는 이랬다. “아뿔싸! 천기누설이구나.”
시간은 쏜 살같이 흘러갔다. 나에게 맡겨진 일은 창조한국당이 지방자치의 새로운 돌풍이자 핵이 될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제주도당이 그 본부 역할이 되고자 전력을 투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 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4월11일이다.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며 강정동에서 살다시피 하던 양윤모 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이 투옥 뒤 며칠만에 옥중 단식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무언가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 난 상념에 잠겼다.
그해 1월 말 창조한국당 공 대표 일행과 함께 강정포구 현장을 찾았을 때 난 그를 만났다. 중덕해안에 천막을 치고 그 스스로 ‘중덕사’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고교 후배이자 내가 지사로 재임하던 시절 아·태영화제를 치를 무렵 평론가협회장의 자격으로 고향을 찾아 영화에 대해 나와 진솔한 얘기를 나눈 사이다. 그런데 양 감독은 나에게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속삭였다. “선배님! 저는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되면 강정 앞바다에 빠져 죽을 겁니다.” 섬뜩했다. 그런 그 친구가 단식을 시작한다니 진짜로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시절 강정 현장은 반대주민이나 시민단체, 해군과 경찰 등이 맞닿은 전선이 소강상태이던 때다. 정부나 해군, 건설업자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야수와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먹이가 되겠다는 비장한 자세도 아니었다. 먹혀도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민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고민이 밀려왔다. 어떡해야 하나? 주민들에게 퇴로를 못 열어주는 정부가 문제라고 봤다. 진정성 없는 도지사도 문제였지만 냉소적으로 보기만 하고 있는 우리 도민들도 문제였다. 그 속에서 강정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양 감독은 옥에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왔다. 그가 꼭 그런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곤란했다. 어찌됐건 생명은 살려야 했다.
부활절 일주일 전인 4월18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월요일이었다. 아침 첫 강의 준비로 바쁜 아내를 배웅하고 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덜렁 메모 한 장을 남겼다. “몇 일 동안 강정에 다녀오마.”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무단가출’하듯 난 낮 12시 강정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양 감독이 머물던 중덕사 천막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멀뚱멀뚱 날 지켜보던 주민들에게 말했다. “양 감독이 옥중 단식을 풀 때까지 전 여기서 단식합니다.”
황당하기도, 의아스럽기도, 기운을 얻기도, 환호성을 지르기도···. 갖가지 눈치였다. 그 시절 주민들은 그랬다. 그런데 오후 2시쯤. 돌연 사이렌 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직 때가 아닌데 무슨 민방위훈련이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었다. 해군기지 공사팀이 마을로 쳐들어 오고 있으니 이를 막을 주민들을 불러 모으는 마을회관의 ‘공습경보’란 소리였다. 슬프고도 기막힌 현실이다. 선지자 느헤미아가 파괴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손엔 무기를 들고, 한손으론 작업을 했다는 성격 구약 구절이 있다. 꼭 그런 현실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진입하는 포클레인 차량 밑에 드러누워 악다구니를 부렸다. 공사팀은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돌아갔다. 몇 일을 보내보니 오전·오후 꼭 한차례씩 그렇게 티격캐격하다 상황이 끝났다. 강제력이나 무력으로 그냥 밀어버리면 될 터인데 꼭 겁에 질린 쥐를 희롱하는 고양이 같은 장면이었다.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주변의 경찰은 마치 투견이나 투계를 보듯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흡사 강정주민들이 희롱 당하는 먹잇감이란 처연함이 밀려왔다.
지금은 외부의 여러 단체와 활동가 등 외부인사들의 수혈이 있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오로지 전의를 상실한, 체념한 마을 주민들 뿐이었다. 고권일 투쟁위원장을 비롯해 마을사람들로만 고독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저 외부인이라고 해 봐야 서울에서 해군기지 1인 시위를 지켜보고 미국에 다시 돌아갈 계획을 접고 바로 강정으로 한 걸음에 달려온 최성희라는 젊은 여성과 사단법인 개척자 소속인 송강호 박사 등 몇몇이 고작이었다. 개척자 역시 종북세력과는 무관하다. 그들은 전세계 난민지역을 찾아 도움을 주는, 말 그대로 이념과는 무관한 난민지원 단체다. 물론 낙동강 전선은 이미 무너졌고, 해군기지 문제는 강정주민들 간의 찬반 대립으로 쪼그라진 상황이었다. 제주도의 문제도, 국가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 꼴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당당해야 할 우리 정부가 이리 비열해도 되는가”란 의구심을 품게 됐다.
중덕사 단식 사흘째였다. 해군 측 공사담당 장교와 조정관 직책을 맡은 대령급 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물었다. “이 공사를 만약 3년 연기하면 안보상, 해군전략상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결국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솔직히 화가 났다.
그 당시 강정주민들의 요구는 분명했다. 해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마을총회의 동의절차가 명백한 하자가 있기에 절차적으로 이를 치유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안덕면 화순에서 서귀포 강정동으로 해군기지 부지의 방향을 튼 데 결정적인 근거는 사전에 이뤄진 강정마을 총회의 결과다. 하지만 그 총회는 유권자 1050명 가운데 87명이 모여서 박수 치고 끝낸 회의다. 현재 제주도 사회협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승석 변호사에게 물어봤다. 그는 “동의절차가 확실히 잘못됐다. 향약(鄕約) 기준에 따르더라도 일반적 동의 사안이 아닌 해군기지 유치 문제는 중대사안이기에 주민 과반수 이상이 출석, 의결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다른 요구 역시 구럼비 바위를 낀 절대보전지역을 해제한 도의회의 동의 절차가 잘못이 있기에 진상을 조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의회 역시 후일 동의의결을 취소했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현장에 있다보니 진상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단식중인 4월21일 서울로 올라갔다. 먹힐 리 만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소리쳐야 했다.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해 강행하는 해군기지는 안보사업이 아니다”고 밝혔다. 그 사이 해군에 질의한 뒤 얻은 해군의 회시문서를 증거로 들이댔다. 해경에도 이용경 국회의원을 통하여 문서로 물어본 결과 ‘배타적 경제수역(EEZ) 보호는 해경의 업무영역’이란 답변을 얻었는데도 해군이 앵무새처럼 ‘배타적 경제수역과 남방해상교통로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누구나 알 터이지만 사실 해군은 특수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곤 영해를 벗어나 공해인 배타적 경제수역과 남방해상교통로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유엔의 해양법 협약 결과다. 그렇다면 “이건 해군의 몸집 불리기 사업”이란 확신은 누구나 가능하다.
4월24일 생명평화결사 모임을 이끌고 있는 제주출신 도법 스님이 강정해안 중덕사로 단식 중인 날 찾아왔다. 그는 대뜸 나를 보자 호통을 쳤다. “신 지사님!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그저 그의 뒷얘기만 멀뚱멀뚱 기다렸다. 아마 양 감독에 이어 지사를 했던 사람이 그곳에서 쭈그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그에게 누군가가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굶어서 힘 없으면 뭘 하시려구요? 나가서 도민에게 소리를 지르세요. 제발 단식 풀고 나가서 같이 움직입시다.” 머쓱하긴 했지만 “때가 되면 단식을 풀겠다”고 말하고 그에게 합장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4월26일엔 한 외국인 기자가 그곳으로 날 찾아왔다. 자신의 이름을 안네(Anne)라고 밝힌 그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기에 그와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 허기진 사람에게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지만 성실히 답변해줬다. 그런데 말미에 그는 특이한 질문을 했다. “정치적 동기로 단식하는 것 아닌가요? 3년 후 아들을 도지사로 만들기 위해서 한다는 말이 있는데···.”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 없기도 했다. 푸른 눈의 젊디 젊은 이방인 여성에게 누가 이런 인식을, 질문과제를 주었을까란 생각에 골똘하다보니 그 외국인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이 마을이, 제주의 해군기지 문제가 이렇게 어렵게 돼 버렸다.” 내 답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장시간에 걸친 그 인터뷰는 어느 매체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 시절 무슨 정치적 압력으로 재갈이 물렸던 건 아닐까 안타까움이 앞선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강정마을의 원로와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단식을 중단 하고 강정에 대해 제주 곳곳을 돌며 순회강연을 해달라”고 그들은 호소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줘선 안될 말이었다. “경헙시다(그럽시다). 내일 단식을 마치쿠다(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난 뒤 난 그들에게 큰 절을 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도지사를 했던 사람이 아무 것도 못해주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죄 드립니다.” 그들은 내 손을 부여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9일간의 단식을 마치고 강정마을을 떠나던 날인 4월27일. 해군기지 공사 부지인 강정포구의 구럼비 바위 1200m를 터벅터벅 걸었다. 구럼비 나무도, 해안에서 솟던 용천수인 ‘할망물’도 마음 속에, 머릿 속에 고스란히 그 숨결과 형체를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결코 잊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다. 9일간의 단식을 끝내고 난 아내가 기다리던 집으로 갔다. 아내는 날 기다리다 못해 수감 중인 양 감독에게 “제발 단식을 풀어 내 남편을 살려달라”는 호소성 편지까지 보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단식은 풀었지만 난 달라져 있었다.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됐고, 무엇이 문제인지 간파하게 됐다. 생각은 180도 바뀌어 있었고, 그동안 정치를 한답시고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진정 도민들의 생각은 무엇인지, 어쩌다 도민들의 생각이 어느 한 곳으로 착근(着根)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
그 결과다. 해군기지 문제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가의 문제다. 이제 진실의 답을 찾아야 할 뿐이다. 난 그걸 네 가지 진실을 밝혀내는 우리의 해법이라고 규정한다.
강정해군기지는 안보시설이란 게 정부 당국이 밝힌 명분이다. 하지만 김관진 국방장관도 지난 겨울 국회 국정감사시 해군기지 최적지는 강정이 아니라 사실은 안덕면 화순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런데 왜 정부가 해군기지를 당초 계획대로 화순에 건설하지 못하고 아무데나 말뚝 박듯 강정에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는가? 도지사를 역임한 나로선 정부가 국가안보시설 입지를 이렇게 옮겨다니며 사업을 집행하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국가안보란 국가나 국민을 위한 것이지 정권을 위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정권 따라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 이리 다른가? 사업추진 과정을 지켜보며 내가 얻은 결론은 ‘샴쌍둥이’다. 세쌍둥이를 말한다.
서귀포의 강정 해군기지와 목포3함대, 화순의 해경전용부두. 그 셋은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가? 내 물음에 제주에 내려온 적 있던 임태희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시인한 바 있다. 서로 기능이나 목적이 똑 같다. 하나 같이 한반도 남방 영해 방어와 해상교통로 확보란 명분을 들이댄다. 지난해 3월 확정된 화순항 해경부두 역시 같은 명분이다. 그런데 왜 세 곳이나 따로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가? 우리나라가 그렇게 돈이 많은가? 내가 정부 책임자라면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한 사안이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두 번째 진실의 문제다. 해군기지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선 의혹이 도사리고 있다. 해군에 내가 질의, 회신받은 문서엔 “미군이 주둔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이 해군기지는 ‘안보’란 포괄적 모자를 그냥 덮어 쓴 것이란 소리가 된다. 1982년 만들어진 유엔 해양법 협약에는 무해통항(無害通航)·통과통행(通過通行)과 더불어 배타적 경제수역을 영해기준 200해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 저것 다 걷어 치우고 간단히 말하면 영해를 제외한 수역에서의 분쟁해결 방법으로 모든 무력을 배제하도록 하고 있다. 단지 해적행위나 노예매매 등의 경우에만 자국 보호나 인권보호 차원에서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외엔 군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한·일, 한·중 어업협정도 마찬가지다. 해양경찰 이외엔 분쟁해결에 개입할 수 없다. 국내 해양법학자 얘기만 들어도 논리적 모순을 직감한다.
세번째 진실의 문제다. 참으로 답답한 문제다. 지금 재임 중인 도지사는 해군과 제주도민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윈-윈해법이 있다고 공약하고 당선됐다. 이제 그 실체가 무엇인지 그가 답하길 바란다. 그 윈-윈해법이든, 기초자치권 부활이든 모든 공약이 오로지 득표를 위한 방책이었다면 우리 도민들은 그렇게도 안중에 없단 말인가? 너무나 우리 도민들이 딱해 안쓰러운 마음을 가눌 길 없다. 2010년 도지사 선거 당시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모 행정시 시장을 하던 간부 공무원에게 “원하는 보직을 쓰라”고 특사를 보내 백지 위임장과 인감증명을 보낸 이가 누구인가? 그걸 거부한 공무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조선시대 귀양지가 제주라면, 지금 서울을 제주의 귀양지로 만든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런 꼼수만 생각하지 말고 이 해군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을 한번이라도 공식면담한 적이 있는지 그에게 묻고 싶다.
도지사의 권한인 공사중단 명령을 내리고 정부와 면담할 경우 어마어마하게 커질 도지사의 협상력을 도외시하고 무엇을 바라는가? 그저 시뮬레이션 타령만 하고 무엇이 해결됐는가? 제주도민을 위해 챙겨야 할 실리가 거꾸로 지사 개인의 실리 챙기기로 끝나고 있는 건 아닌가? 1조1천억 원이란 지원계획 가운데 국비는 얼마인가? 그것도 10년에 걸쳐 나눠주겠다는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관광복권 수입만도 되지 않는 아이들 푼돈 나눠주기 노름에 우리 도민들이 희롱 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롭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진실의 문제다. 우리 도민들의 진정한 뜻을 밝혀야 한다. 지금 우리 도민들의 생각은 오도되거나 무엇엔가 짓눌려 있다. 안보시설과 경제적 이익이란 논리에 휘둘려 사실 우리 도민들은 거짓에 학습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 도민들의 진정한 의식을 다시 일깨워야한다. 이는 제주가 거듭 주창하는 신공항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1996년 1월22일 나는 제주도지사로서 당시 공군 출신 이양호 국방장관을 만난 바 있다. 문화관광국장이던 김한욱 전 행정부지사가 나를 수행, 함께 만났다. 송악산 부근 국방부가 소유한 토지 62만평을 제주도로 이관받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시절 국방부 장관은 제주도에 그냥 넘기는 것보다 토지 맞교환을 원했다. 다른 도유지와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신공항이 들어서면 거기에 공군기지가 간다. 공군기지를 건설할 때 재원으로 쓰기 위해 그 땅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송악산의 알뜨르 비행장 부지에 아무런 군사시설 계획이 없지만 공군이 이를 보유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우린 신공항 문제를 검토할 때 반드시 공군기지 문제를 짚고 가야 한다. 그게 정부계획이란 소리고, 따지고 보면 해군기지 역시 이미 내가 지사로 재임하던 시절인 1994년 이미 계획이 확정된 사안이다. 여기에 제주도엔 2015년 해병부대 창설이 예정돼 있다. 해군기지와 해병부대, 그리고 공군기지가 다 들어온다? 그렇다면 우리 제주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모든 상황을 도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진정 도민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는가?
그동안의 서술에서 답답하다는 소리가 잦았다. 그 해군기지 문제마저 선후가 뒤바뀌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진실을 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자명한데 왜 우린 거꾸로 찬반으로 먼저 나뉘어 서로 갈라져 싸우는가? 왜 ‘찬성론자인가? 반대론자인가?’ 그것부터 따지고, 그걸 전제로 문제를 풀어가는가? 그래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우린 과연 되돌아보고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눈물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과연 없는가?
어둠이 너무도 짙었기에 그만큼 우리에게 지혜의 샘도 깊다. 우리 제주가 다시 나래를 펼 찬란한 여명도 그만큼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일흔을 넘긴 나는 지금도 다시 비상(飛上)하는 제주도를 꿈꾼다. <끝>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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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편을 성원,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는 금요일(5월3일)엔 그동안의 연재과정과 소회를 정리한 신구범 전 제주지사의 <연재후기>를 싣습니다. 더불어 연재과정의 뒷얘기와 에피소드를 담은 신구범 전 지사와의 파워인터뷰 <회고와 전망-제주의 미래>를 함께 소개합니다.
<제이누리>의 '격동의 현장'은 호흡을 더 가다듬고 현대사를 살아온 제주의 새 인물로 다시 여러분에게 찾아갑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