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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48)

 요즘 치과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다.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 “도대체 누가 이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교도소 수감 시절 ‘엉터리’ 치료를 받은 이유 탓에 듣는 말이다. 수감시절 이를 감싼 보철이 떨어져나가자 일주일에 한번 오던 순회진료 의사에게 이를 맡겼다가 그 꼴이 된 것이다. 지금 날 진료하는 치과의사는 “돌팔이가 보철한답시고 생이를 깨 버리더니 발치(拔齒)한답시고 이 뿌리는 놔두는 바람에 염증이 생겼다”고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아마 갓 치대를 졸업한 서투른 친구의 의술에 나보다도 더 분통을 터뜨린 것 같다.

 

 

교도소 내 진료는 그 정도로 열악하다.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나기도 어렵고,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기도 어렵다. 그런 경험을 하다보니 수감 1년여가 지나면서 난 우연히 침과 뜸에 생각이 다다랐다. 교도소 안에서 신문기사를 읽다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결과다. 신문기사는 구당 김남수옹의 정통 침뜸연구원을 소개하는 기사였고, 그가 국회에 진료실을 차리고 침뜸 봉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걸음에 구당의 침뜸연구원에서 발간한 침뜸의학 교재 전 8권을 사서 넣어주도록 교도관에게 요청했다. 책을 읽다 “이거다”란 생각에 무릎을 쳤다, 여러 책 가운데 <침뜸의학개론>이란 책을 보니 서두에 제주도 얘기가 나왔다. 1407년, 그러니까 태종 7년에 의술에 정통하고 침에 능통한 사람들, 즉 학사관들을 조정에서 제주도로 보냈다는 기록이 소개되고 있었다. 한약재를 캐서 보내는 채약진상(採藥進上)을 위해 제주에 보낸 것으로 조선 조정은 아예 제주에 훈련기관을 만들어 의술과 침에 대한 훈련을 했다고 적고 있었다. 그 구절을 읽다 퍼뜩 떠오른 게 제주를 한방특구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다양한 생물종을 갖춘 제주가 친환경 쪽으로 갈 수만 있다면 한방특구로 만들고, 국내에 없는 침구사 제도를 제주에만 한정해 지정하면 대한민국 명인이 제주로 몰려와 제주산 농산물은 자연스레 한약재로 날개 돋친듯 팔릴 것 같다는 상상이었다.

 

옥살이 한다는 게 어찌 보면 시간도 많은지라 침뜸을 제대로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막상 공부를 하려고 하니 온몸의 경혈(經穴) 자리로부터 모든 게 외울 것 투성이였다. 어느 정도 독파가 됐다고 생각하고 이론이 아닌 실전을 해볼 요량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침 역시 반입금지 물품이었다. 그저 눈으로만 상상하며 허공에 허우적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면회를 왔다. 한겨레신문 사장을 지내고, 당시 에너지재단 사무총장을 지내던 고희범씨다. 2008년 11월의 일이다. 반가웠다. 일면식도 없는 그였지만 그의 방문은 유쾌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다 그는 내가 침뜸의학을 익히고 있다고 하자 대뜸 품속에서 침관과 침을 꺼내 들었다. 자기 역시 구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침뜸연구원에서 공부를 하고, 수료증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면회실에서 침을 어떻게 꽂는지 ‘침 선배’로서의 기술을 선보였다.

 

그는 아마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날 찾아온 것 같았다. 그가 떠난 후 2010년 도지사 선거 출마가 예상되던 이들이 속속 나를 찾아왔다. 현동훈 전 서대문구청장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불쑥 나에게 면회를 오더니 “제주도정에 대한 교육을 받으러 자주 찾을테니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출마계획도 나에게 털어놨다. 그와도 침술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는 고희범씨와 달리 <침구경험방>(針灸經驗方)이란 책을 내게 소개해줬다. 우린 <동의보감>의 허준만 알지만 그가 소개한 책의 저자는 허임(許任)이란 사람이다. 조선조 인조 이래로 3대에 걸쳐 어의(御醫)를 지낸 사람이다. 상·하 두터운 2권의 책이 현 구청장에 의해 교도소로 들여보내졌고, 난 정말 감명 깊게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에서 허임은 “농민들은 의술혜택을 받기 어렵다. 그러니 스스로 침을 공부해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쓰노라”고 적고 있었다. 허임의 기본정신은 농민과 서민을 위한, 돈 없는 이가 아주 쉽게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의 길을 터주겠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덕에 침술이론에 눈을 떴다. 침이 반입되지 않았지만 난 실을 꿰는 바늘로 실습을 해보기도 했다. 몇몇 재소자가 다리를 삐거나 감기에 걸린 걸 알고 나름 ‘고수’의 목소리를 내며 경혈을 자극해 봤다. 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들은 말끔히 나았고, 그 시절 난 침술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렇게 교도소에서 나름 유익한 생활이 이어졌다. 물론 영등포교도소에서도 ‘힘 깨나 쓰는 사람’들로 구성된 원예반 작업장이 내가 배치된 노역장이었고, 역시 동료들과 난 나름 행복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에피소드가 생겼다. 2009년 5월1일이었다. 오후 2시 원예작업장에서 운동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교도소내 우리를 관할하는 관구계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독거방 다 나오고 여럿이 공동생활을 하는 혼거방으로 갈 생각을 하라”고 말했다. “경기가 안 좋아 벌금처분자들을 노역장으로 유치해야 하는데 수감시설이 모자라 하는 수 없다”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경기불황 운운하며 수감시설 부족 운운한 것은 핑계였다. 이미 내가 영등포교도소로 배속되기 이전부터 이 원예반 일원은 교도소장의 ‘눈엣 가시’였다. 7명이었는데 멤버들이 나와 부장검사 출신, 경찰서장 출신, 도이치뱅크 전무 출신, 문화관광부 국장출신, 게이트의 주인공 정현준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러 정황을 보건대 교도소장의 타깃은 부장검사 출신 재소자였다. 교도관들은 검방(檢房)이란 명목으로 그 부장검사를 수시로 괴롭혔다.

 

은밀히 나 역시 조사를 해봤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가 수감된 옥사엔 독거실 빈방이 무려 16곳이나 남아 있었다. 이 때부터 ‘꼴통’ 죄수역할이 시작됐다. 난 교도소장을 찾아가 정식으로 요구했다. “첫째, 지난해 7월부터 원예작업반 배방(配房)문제로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상을 조사해 달라. 둘째, 다른 죄수들의 불만이 있다고 한다. 소위 우리가 ‘빽’에 기댄 특혜라는 말이 있다. 이번 기회에 그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 청탁으로 배치된 사례를 낱낱이 조사하자”. 그렇게 들이댔다. 다른 이는 모르지만 최소한 나로선 청탁으로 원예반에 배치된 게 아니니 당당했다. 물론 교도소장이 펄쩍 뛸 수 밖에 없었다. 죄수란 놈이 그리 당당히 대들었으니 그로선 아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여러 핑계를 대며 그는 나와 개인면담을 가졌다. 난 그 자리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 이래선 안된다. 아무리 교도소지만 우린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형벌을 넘어 우릴 모욕하면 안된다. 그걸 넘어서 우리 인권을 짓밟거나 모욕할 권리는 없다”고 항의했다. “방을 한번 배정해줬으면 우리도 평온하게 생활할 권리가 있다. 더 이상 모욕하지 말라.” “국가의 형벌권에 형(刑)집행이란 제도를 통해 그 대상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고 모욕할 권리까지 부여한 건 아니다. 독방을 빼고 잡범들처럼 여러 명 혼거방으로 가란 말인가?” 그 정도까지 말이 이어지자 교도소장의 얼굴은 그저 붉으락 푸르락 속을 끓이는 모습이었다.

 

교도소장은 말이 그쯤 이르자 “그러면 신 지사는 독방에 그냥 있으시오. 다른 사람만 보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면 곤란했다. 애써 깃발을 들었는데 나 혼자만 혜택을 입게 되면 우린 분열할 것이고, 나 역시도 지금껏 쌓은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질 판이 된다. “사양한다. 더불어 그렇게 해결을 못하겠으면 아예 원예반 작업장 배치도 치우고 나 역시 일반 작업장으로 가겠다”고 응수하고 내 수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국가인권위에 “교도소장이 개인적 원한에 얽혀 재소자를 탄압하고 있다”고 진정서를 냈다. 그러자 이젠 교도소장이 나를 불러 “제발 그 진정건만 취하해 달라”며 사정을 해댔다. 누가 교도소장이고, 누가 재소자인지 헷갈릴 판이었다. 어느 정도 ‘겁’만 줄 생각이었다. 난 인권위 조사관이 찾아오자 “그 사람(교도소장)에게서 경위서까지만 받으라. 그러면 내가 진정 건은 없던 일로 취소하겠다”고 제안했다. 교도소장은 죽을 맛이었다. 오히려 죄수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한참 뒤 작은 권력으로 위세를 부리던 교도소장의 버릇은 말끔히 고쳐졌다. 최소한 그는 나에게 고분고분했다.

 

 

교도소장을 좌지우지하다 보니 문득 날 감옥으로 보낸 한 판사가 떠올랐다. 무죄를 유죄로 바꿔 놓은 이였고, 그는 솔직히 나로선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악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다. 어이 없게도 지금도 대법관 자리에 앉아 있는 신영철 판사다. 잊을 수 없는 이였기에 감옥에서도 그의 근황은 신문기사를 통해 눈 여겨 보고 있었다. 그는 2008년 11월 촛불시위 사건에 대한 재판개입 문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서울지법 원장 시절 재판을 맡은 하급자 판사에게 메일을 보내 서둘러 판결을 끝내도록 한 것이다. 대법관 임용을 앞둬 그의 실적을 맞추고자 한 획책으로 뉴스가 떠돌았다. 그 시절 내 비망록에서 난 “수감생활을 통해 난 교도소 안 친구들이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하진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제도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심하게 모욕할 수 있는지, 그 중심에는 자기반성을 몰각하는 사법이란 제도가 있다는 게 답답하다”고 적었다. 신영철 판사 사건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헌법상 분명 우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백성들은 ‘공정한’은 빠지고 그저 ‘재판을 받을’ 권리만 있다. 그저 법관에게 자비와 은전만 구하는 꼴이다. 미국에 오코너(O'Connor)란 판사가 있었다. 1973년 이후 90명의 사형수가 그로 인해 수감중 DNA 검사를 통하여 혐의를 벗었다. 오코너 판사는 “미국의 사법제도는 무고한 피고들이 사형될 수 있는 제도란 걸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엔 미국의 일리노이주 지사 조지 라이언(George Ryan)이 한 일도 있다. 그는 사형수 167명을 감형했다. 그는 “우리 제도 안에는 실수의 악령이 자주 출몰한다”고 말했다. “유죄로 잘못 결정하는 실수, 사형 받아 마땅한 이를 잘못 결정하는 실수”가 그것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형 집행을 할 수 없다고 모두 감형처분을 했다. 하지만 우린 신 대법관 같은 이를 법 최고권위기구에 앉혔다. 교도소장의 백기투항(?)을 받아낼 무렵 난 친절(?)하게 신 대법관에게 배달증명 서신을 보냈다. “당신 같은 이에게 재판 받는 건 너무도 억울함과 아울러 당신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할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일종의 협박성(?) 편지다. 2009년 5월17일 보냈다. 물론 그가 읽었을 리 만무다.

 

지금 와 생각하다보니 그 시절 난 ‘정의와 권력’의 문제에 대해 많은 걸 가슴 속에 두드려보고 있었던 듯 하다. 신 대법관에게 서신을 보내기 한 달여 전인 2009년 4월8일 신문보도가 내 눈을 끌었다.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 부부의 뇌물수수 혐의 보도였다. 그때 내 메모장의 기록은 이랬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수행에 대한 나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로서 기득권과의 싸움을 결심했던 고집과 도덕성을 나는 인정한다. 내가 지나온 개인적인 정치여정 속에서 나는 언론, 기득권 세력, 공권력과의 관계에서 스케일만 다를 뿐 많은 부분 내 안에서 노무현을 보기 때문이다. 현 MB정부에서 검찰이 노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국가권력으로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노 대통령은 부정부패하지 않았다. 그의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와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검찰은 공명심이란 눈가리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사법처리를 받든 안 받든 그에 대한 수사는 한국의 정치발전을 위한 한 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다. 2002년 선거판에서 난 노무현 대통령의 상대방인 이회창 후보를 위해 뛰었지만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행적을 보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과거의 내 정치역정과 맞물려 수감생활을 하게 되고 보니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고뇌와 절박함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노 전 대통령을 조사한 실무총괄 검사는 우병우 검사다. 나를 엮어 넣기 위해 철저히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춰 죄를 뒤집어 씌운 친구다. 그의 조사를 받아본 나였기에 노 전 대통령이 느낄 수치와 모멸감을 먼 발치에서나마 예감할 수 있었다. 그의 뇌물수수 조사 건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이미 난 불길한 마음을 접어두기 어려웠다.

 

노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보도가 나오고 한달 보름여 뒤인 5월23일 그가 머물던 경남 봉하마을의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수감생활 도중 그 뉴스를 접하고 먹먹한 가슴 속에 써놓은 메모가 있다. 여기에 옮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다고 한다. - 2009년 5월23일

 

이곳에서 갑자기 사정상 정오뉴스(KBS)를 방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구내 방송이 있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오전에 실족사 또는 자살했다는 입소문이 은밀하게 돌았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정오뉴스 방영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 나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분명해 보인다.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에서 나는 어떤 战意(전의)를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이 잘못을 단죄하는 나라에서 그는 죽음을 택함으로써 거짓을 향한 싸움의 길을 열어 놓으려고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살기 위해서 죽는 구차하거나 비겁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정치의 길에서 누구나 열기를 원하면서도 누구도 열 수 없었고 또 열기를 두려워하던 그 싸움의 길을 이제 그가 열었다. 한번 길이 열리면, 누군가가 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그는 지혜롭게도 알고 있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나라, 역설적이게도 그 나라에는 할 일이 있고, 죽음으로 그 일을 위한 길을 여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하여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가는 먼 길을 바라보며 세 끼의 곡기를 끊을 뿐이다.

 

(20:00 영등포교도소에서)

 

시간이 흘렀다. 그해 11월4일이다. 교도소장이 좀 보자고 연락이 왔다. 일주일 전 왔다 간 아내가 특별면회를 하기 전 소장을 먼저 만났던 모양이었다. ‘가석방’ 문제를 상의한 것 같은데 소장은 “뇌물이 30억원을 넘어 가석방은 어렵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일주일 전 아내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리 심란하게 보였던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아내는 태연하려 애썼고, 아무런 내색이 없었지만 사실 그 면회 후 난 영문을 몰라 애를 태우던 참이었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보니 집안은 엉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삼무시절 벌여놓은 일들이 처참히 뭉개지는 상황으로 치닫더니 급기야 집안의 각종 가재도구에 압류·차압딱지가 붙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날 교도소에 보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의연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지켜내며 내게는 면회 올 때마다 웃는 얼굴 속에 그 고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교도소장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내 판결문 읽어봤소? 뇌물이 30억이나 되는데 징역 2년6개월이 가능하오? 추징금도 없는 게 말이 되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다시 읽어보겠다”며 내 눈치를 봤다.

 

게다가 “뇌물 30억 이상이면 가석방이 안된다는 규정 있느냐”고 소리치자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국민의 법감정이···”라며 말을 흐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내가 “나는 사면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남들이 정당하게 가석방을 받을 때 나만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생각도 없다. 용납하지 않는다. 당신 각오하라”고 눈을 부라렸다. 아마 그 소장은 나처럼 성가신 죄수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1월25일이 되자 난 독거방이 아닌 혼거방으로 옮기란 명령을 받았다. 내가 으름장을 놓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다. 일반 노역장에 가기 위해선 독거방 수감자가 아닌 혼거방 수감자여야 하고, 가석방을 받기 위해선 노역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는 나를 가석방 대상에 넣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위탁Ⅱ 12사 4방’. 2번 위탁작업장 일을 하는 12사 옥사에서 4번째 방을 배치받았단 의미다. 다른 재소자들과 방을 함께 쓰는 혼거방으로 옮겼다. 외부의 주문을 받아서 봉투와 쇼핑백을 만드는 일을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살인·강간·상해치사·절도·사기 등 ‘쟁쟁한’(?) 전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곳에선 일당 300원을 받았다. 원예반에서 받던 일당 600원을 합쳐 내가 수감 중 9개월간 작업한 대가로 받은 노임은 12만5120원이다. 출소할 때 교도소에서 손에 쥐어준 그 돈을 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짐작할 테지만 그 돈은 나에게 기록이자 역사다. 함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봉투를 만드는 노임을 하며 혼거방 생활을 하고 두달 여 뒤 나에게 가석방 통보가 내려졌다. 2010년 1월28일 밤. 내가 출소하기 하루 전인 날이다. 기껏 두달여에 불과했지만 난 희안하게도 그 쟁쟁한(?) 범죄자들과 어울리다 그만 정이 들고 말았다. 그래선지 같은 방을 쓰던 재소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에게 “지사님! 가시기 전 좋은 기도말씀이나 주시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착하고 기특했다. 함께 예배를 올리고 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 그들에게 말로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기에 수감생활 내내 느꼈던 걸 메모로 정리해두고 그대로 읊어줬다. 내용은 이렇다.

 

“성경에 ‘고난 당하기 전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이 있다. 난 수감생활이 비록 짧지만 수형생활 실태를 보면 그냥 다들 ‘생존’만 생각한다.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 보단 어떻게 하면 문제를 피하고 지내다가 출소하면 되는가만 생각한다. 게다가 교도관들을 증오하고 경원한다. 더욱이 제도 자체를 아예 불신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 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간 수석보좌관 척 칼슨(Churk Carlson)이란 사람이 있다. ‘본 어게인’(Born Again)이란 책을 썼다. 그는 그의 책에서 감옥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하난 그냥 자포자기하고 운동시간에도 햇볕만 찾는 사람, 두 번짼 계속 못 견뎌하며 자해행위를 하는 사람, 셋째는 내일 출소할 것처럼 준비하는 사람. 이렇게 나눴다. 우리 교도소도 비슷하다. 여러분들이 세 번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 사실 교도소에 대한 내 느낌은 ‘동물원 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우린 동물원 우리에 갇힌 짐승이 아니다. 어떻게든지 자기 정체성, 존엄성 지키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하자. 세상이 우릴 보는 대로 살지말고, 제가 여러분에게 말한 걸 배우고 깨우쳐 감옥에서 나가자.”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교도소에서 2년2개월 790일을 살고 떠난다. 하지만 대부분 독거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실제 감옥생활은 11월25일부터 1월28일까지 두달간 여러분들과 함께 보낸 이 방에서 한 것 같다. 여기 있는 12명과 교도소 담장 안에서 사람 냄새를 맡으면서 살 수 있다는 걸 여러분에게 배웠고,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나로선 여러분들에게서 도둑놈, 사기, 노름, 강간, 폭력, 살인 등 삶의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 소리에 나도 익숙해졌다. 고맙다. 가석방이 나로선 기쁜 일이지만 남아 있는 여러분 때문에 그리 기쁘지만은 않다. 여러분들의 수형번호와 이름을 전부 기록하고 간다. 대신 나도 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긴다.” 그리고 그날 난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그 잠자리에 들기 전 쓴 일기를 여기에 옮긴다.

 

2010년 1월28일.

 

내일 오전 10시. 그렇게 높아 보이고 그렇게 무거워 보이던 영등포교도소의 문이 열리고 나는 이 곳을 나서게 된다.

 

거의 24개월, 790일을 나는 고린도전서 7장5절 말씀을 따라 아내를 떠나서 이 별방(別房)에서 살았다. 인생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소리가 쉴 줄도 모르는 동물의 우리 속에서 살았다. 죄값을 치루는 당당한 인간들이 제도가 주는 모욕 속에서 동물로 살아가는 곳에서 나는 함께 살았다.
관리자이자 사육자인 국가의 사법, 교정 제도와 교도관들을 나는 “간접 살인자”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하심과 은혜로 사랑하는 아내와 나를 지켜주셨다.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인처럼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보내사 우리의 일용한 것들을 항상 채워주셨다. 민수기 14장8절, 여호수야 14장10~12절, 로마서 12장14~17절, 시편 118장24절 말씀으로 영의 양식도 넘치게 채워주셨다.

 

그래서 나는 살았다.

 

마지막 2개월 봉투작업을 하는 형제들과 한 공간에 기거하고 일하면서, 나는 독거실(독방)의 곰팡이와 냄새를 걷어내고 사람냄새 속에서 진짜 감옥살이를 했다.

 

말씀으로 살았고
운동으로 살았고
침구함으로 살았다

 

말씀도, 운동도, 침구 공부도 모두 사랑하는 아내가 내건 지존한 명령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세상을 담고 여기 온 내가 세상을 털고 이제 세상으로 돌아간다. 나는 아내의 가슴에 있는 무덤을 열어 버릴 것이다. 나는 생명을 향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것이다.

 

2042년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존귀이며 나에게는 장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가 우리의 소망을 열기 때문이다.

 

나는 내일 이 영등포교도소의 정문을 나서면서 내 가슴에 품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을 확인할 것이다. 이 별방의 삶이 내게 준 깨달음은 교도소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보다 세상 사람들이 더 악하다는 것이다. <위탁Ⅱ: 12-4>의 열 두 형제의 수번과 성명을 기록하고 잠자리에 든다.

 

참 정(情)이란게 무서운 것이었다. 기껏 두달간 익힌 얼굴이고, 고작 두달간 마음을 나눈 것일진대 그들은 내가 떠나기 전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아마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조언해준 이를 쉽사리 만나지 못했던 탓 같다. 그 인연도 인연인 지라 내가 출소한 뒤 뒤이어 출소한 이들이 종종 연락이 오기도 한다. 호기를 부리며 불쑥 제주로 나를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다 간 친구도 있다. 물론 출소 후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가 있어 몇 번 내가 돈을 부쳐준 적도 있다. 아직 수감 중인 몇 재소자에게 난 1년에 한 두번 정도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한다. 도저히 흉악범 같은 악의 기운이 보이지 않던 그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하다.

 

난 2010년 1월29일 ‘국립학교’를 졸업했다. 아내에게 수감시절 매일 꼬박꼬박 쓰던 785통의 편지를 뭉텅이로 내밀었다. 이제 쉬고 싶었다. 감옥에서 익힌 침술에 더 정진, 주변의 건강도 돌보며 나와 가족들의 마음을 추스르면서 세월을 보낼 작정이었다. 해보지 못한 침술실습에 나서 본격적으로 침술을 익힐 생각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제주 땅을 밟고 보니 새로이 도지사를 선출하는 2010년 선거판으로 줄달음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울분을 토하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었다. 울분의 중심엔 ‘제주해군기지’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었다. <49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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