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패류초·걸개류·상해유호북지개(上海有湖北之丐)』 기록이다 :
“상해에 호북 출신 거지가 있다. 모두 부인과 남자아이이고 건장한 남자는 없다. 늘 서너너덧이 모여서 시가를 돌아다닌다. 손에는 소라, 북, 구련환(九連環)을 들고 등에는 칼과 갈퀴 등 잡물을 담은 자루를 지고 다닌다.
한 사람은 강회(江淮) 소곡, 예를 들면 「십팔모(十八摸)」, 「십배주(十杯酒)」, 「십송랑(十送郞)」 등을 부르며 손에는 칼이나 갈퀴를 떨구고 한 사람은 북을 치거나 소라를 치면서 박자를 맞춘다.
광서, 선통 사이에 처음 보였고 선통, 신해에 많아졌다. 삼봉고(三棒鼓, 북채 3개를 사용해 연주하는 방법, 삼반고(三班鼓)라고하기도 함)도 구걸하는 도구다.
그 연주법은 3명이 함께 한다. 한 사람은 북을 펼쳐놓고 치는데 북은 움직일 수 있는 대나무 지지대가 있어 열고 닫을 수 있다. 한 사람은 작은 북을 두드리고 한 사람은 징, 소라의 박자에 맞춰 노래한다. 가사는 천한 내용이 많다. 언어는 대개 호북성 지방어이다.”
호북 거지가 삼봉고를 공연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명나라 때 전예형(田藝蘅)은 『유청일찰(留靑日札)』에서 말했다.
“오(吳), 월(越) 사이에 부녀자가 북채 3개를 가지고 위아래로 북을 친다. 삼봉고라 한다. 강북 봉양(鳳陽) 남자가 더 뛰어나다. 당나라 때의 삼장고(三杖鼓)가 그것이다.”
이런 곡예 표현 예술은 공연할 때 동전을 새겨 넣은 북채 3개로 차례대로 돌아가며 북을 치면서 노래하는 것에서 이름을 얻었다.
호북, 호남 일대에서 유행하였다. 봉양화고(鳳陽花鼓)에서 변화 발전했다고 전한다. 이 설은 일리가 있다. 역사상 재난이 끊이지 않았고 궁핍하고 낙후된 봉양은 거지가 많이 생겨나 각지로 떠돌아다녔다.
『청패류초·걸개류·봉양인걸식지유(鳳陽人乞食之由)』는 말한다.
“강소, 절강 접경지역에 매년 겨울이 되면 봉양 유민이 늘 시내에서 구걸한다. 해마다 흔히 있는 일이 되었다. 그 걸식하는 이유를 헤아려보면 호주(濠州, 봉양부鳳陽府)가 명 태조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전란이 끝난 후 사람이 적어지고 토지가 황폐해지자 강남의 부유한 백성 14만을 이주시켜 채우고서는, 사사로이 귀향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렸다. 부유한 백성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려 해도 방법이 없자 남녀가 거지로 분장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가 제사지내고 성묘하였다. 겨울에 떠나 봄에 돌아왔다. …… 마침내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이 업이 되었다.”
원인을 그 당시 거지 출신 황제 주원장(朱元璋)과 그의 정책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일리가 있다 싶다. 전기적인 색채가 있다는 것은 맞지만 역대로 그곳에서 거지가 많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궁핍해져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오랫동안 누적되어 형성된 전통관념, 습속, 지리 문화, 심리상태에 기인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상술한 전설 자체는 비정상적인 가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거지를 천하게 보지 않으려는 관점이 그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강서(江西) 서창(瑞昌), 구강(九江), 무녕(武寧) 등지에서 유행하였던 ‘용선고(龍船鼓)’〔서창선고(瑞昌船鼓)〕도 원래는 단오 때에 호숫가 지역에서 용주로 강을 건너는 활동 중에 탄생한 오락성 짙은 곡예 종류다. 소라, 북을 치는 반주에 맞추어 말하기도 하고 노래하기도 한다. 청나라 건륭 연간에 대단히 유행하였다.
그런데 봉양화고가 삼봉고가 된 운명과 같이, 용선고도 나중에 점차 현지 거지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북경민간생활채도』 제13도 「삼봉고도」는 지역 유랑민이 북경에서 삼봉고를 두드리면서 구걸하는 그림이다. 그 제사는 이렇다.
“이것은 중국 삼봉고 그림이다. 이 사람은 섬서성에서 북경에 업무차 왔다. 손에 나무 북채 3개를 들고 아래에는 작은 북이 놓여있다. 북채를 북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연달아 치면서 노래한다. 여비를 마련하려고 동냥하는 것으로 강호에서 공연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례도 거지가 삼종고를 구걸하는 수단으로 삼아 타향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민간예술 형식이 광범위하게 전파됐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각지의 유사한 곡예 형식이 서로 교류하고 참고하며 융화됐음도 알 수 있다.
우갑골(牛胛骨) 등을 치면서 반주에 맞춰 말하고 노래하며 구걸하는 것도 정통 민간예술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큰 임시성과 무작위성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여러 ‘구걸하는 예술’ 중 반주로 박자를 맞추는 타악기는 민간에서 흔히 보이는 것으로, 이미 거지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상징이 됐다. 거지의 간판이요 구걸하는 자들의 부호적인 특징이 됐다. 그런 부호적인 특징은 사람들에게 신분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하면서 구걸하는 방식이다. 바로 그러한 성질을 기초로 끊임없이 새로운 모양새를 창출하였다. 다음과 같은 보도가 있었다.
음력 돼지해 정월 초하루 아침, 홍콩에서, 차 마시려는 손님이 찻집에 들렸는데 좌석이 하나도 없었다. 손님이 들어차 몸 붙일 데가 없었다.
망설이던 차에 그 지역 큰길 입구에서 전자 확성기를 틀고 하모니카를 불며 구걸하는 절름발이 노인이 보였다. 탁자를 점거해 신춘 차를 마시고 있었다. 10살 전후로 보이는 어린아이 1남 1녀가 흥을 돋우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찜통, 자기접시가 빽빽이 놓여있었다. 먹으면서 흥이나 분위기가 막 무르익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명성이 자자한 ‘전자 거지’가 아닌가. 이웃사람이라 서로 안면이 있었다. 알아본 늙은 거지가 급히 자리를 하나를 비워 차를 마시려는 손님을 앉혔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옆에서 필사적으로 새우를 먹고 있는 소년 3명은 음력설 기간에 구걸한, ‘장사’가 번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에 30원을 받으며 ‘전자 거지’를 도와주는 동업자가 되어 있었다.
늙은 거지가 최근에 또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크기가 서로 다른 고무통 7개를 가지고 구걸할 때 돌아가면서 두들기니, 고저가 다른 음가를 내면서 아프리카 산림 중에 흑인 부락이 내는 북소리와 비슷하였다.
길 가던 사람들이 기묘한 소리에 이끌려 에워싸서 구경하면서 1원이나 50전을 던져주었다. 수입액이 굉장하여 어린 동료들에게 한 턱 낸다고 하였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부터 초이렛날까지 나를 따라 중환 부두에서 천교 밑까지 구걸하러 다녔지요. 장사가 너무 잘되니 그들에게 상금을 내리는 겁니다요.”
늙은 거지가 말을 꺼내니 엄숙하고 위엄 있는 사장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북을 치면서 구걸하는 유형의 거지가 좋은 구상을 생각해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시키면서 많은 액수를 벌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형태로 변형시켰고 동료들을 고용하여 서로 도우면서 구걸해 좋은 결과를 도출해냈던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