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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6)

20 셀마는 삼양 해변에 있다고 했다. 그녀가 일러준 대로 제주공항에서 100번 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내렸다. 버스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반갑게 나를 안는다. 여전히 아름답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이끈다. 제주도에 처음 왔다는 사실은 그녀나 나나 같지만 불과 몇 시간 전의 사전답사로 염색하지 않은 자연산 금발의 셀마가 마치 관광안내인인 양 내게 설명을 늘어놓는다.

 

“해변에 목욕탕이 있다.”

 

남녀로 분리된 목욕탕은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용출수로 채워져 흐르고 있었다. 그새 알아뒀다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어때? 눈치로 나눈 공감은 여탕으로 바로 달려가게 했고 이내 다 벗어버린 알몸으로 그녀와 나는 바닷가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엔 물이 차가워 놀랬지만 물맛에 더 놀랬다.

 

“바닷물인데 짜지 않잖아?”

 

“바다에서 계곡물을 만나다니. 맞아,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이 물은 민물일 거야.”

 

에도록 차가워서 더 오래 물속에 있을 수가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오자,

 

셀마가 손으로 가리킨다.

 

“너무 예쁘지 않니?”

 

저 바다색을 말로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연두빛으로도, 코발트색으로도, 하늘색으로도, 하나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복합된 빛깔은 색감이 아닌 정감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뷰티풀, 뷰티풀.

 

“하늘이 비친 거울 같다.”

 

셀마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바다를 마주하고 모래톱에 앉았다. 그녀가 가방에서 맥주 캔을 꺼내 내게 하나를 건넨다.

 

“저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바다가 엄마에게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셀마의 아버지, 고희수는 서른아홉 살 때 그녀의 엄마, 헬레나 툴을 만났다. 헬레나는 서른 살이었다. 1980년 겨울이었고 전라도 광주에서 였다. 희수는 광주의 한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었고 헬레나는 미군 간호병으로 한국에 와 있었다. 헬레나는 5·18의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단지 정치욕을 채우기 위해 동족을 죽이고, 또 죽여도 되는 이상한 나라를 알고 싶었다. 20세기에 봉건·전제 그리고 독재가 살인과 함께 용인되는 야만의 현장을 보고 싶었다. 이국인의 눈에 분명히 불의해보이건만 오히려 정의를 앞세우는 구호정치집단이 뻔뻔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해도 되는 아시아의 한 후진야만국가가 헬레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다. 있을 수 없는 것의 존재가 정당화되고, 있어야 하는 것의 부재가 당위적인 이상한 나라는 식민의 적국으로부터 자국민을 억압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러한 방식에 순응하며 식민시대와 다름없이 국민들은 순화되어 있었다. 국가 간의 자존이 지역 간의 정치적 이기로 전락되고 지역을 정치적 도구로 악용하는 변용된 식민지배의식이 정치의 이데올로기인 양 변질된 현장과 피지배의 저항으로 발진된 현장을 동시에 목격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사람이었고 고희수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는 거리를 떠돌며 무언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에서 가끔 보는 종교선전쯤으로 여기고 간과하려 했지만 그가 해대는 언어가 영어여서 솔깃했다. 영국식의 또박또박한 발음은 허리를 곧추세워 정색한 그의 자세와 흡사했고 거리의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버릴 수 없게끔 그의 말 역시 정연했다. 행인들은 그를 웃음거리로 하대하지 않았다. 웃음을 잃은 행인들이지만 모두들 공손하게 목례를 하고 그의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어깨를 도닥여주는 나이 든 어른도 있었고 손을 맞잡아주는 나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아픔은 피처럼 순환하며 정화한다. 내가 겪은 아픔은 남이 겪는 아픔을 안다. 아픔은 이해로서 감싸고 배려로서 품을 때 아물 수 있다. 헬레나는 광주에서 상처를 함께 앓아본 그들을 보았다. 희수는 또박또박 영어로 중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갓난아이를 업은 엄마가 총에 맞았다. 총에 맞은 엄마는 숨이 끊기기도 전에 흙에 덮였고 흙 밖으로 아이의 손가락이 움직거렸다. 숨 쉬듯 들썩이던 흙도, 엄마젖을 찾는 듯 꼼짝거리던 아이의 손가락도 모두 움직임을 멈추자 총을 겨눈 자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죽여도 좋으니 내 자식만은 살려달라고 애절히 외쳐대던 아버지는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죽창에 찔려 땅 위에 엎어졌다. 이들을 놔두고 사라지는 군용트럭에서 총알을 아끼라는 명령이 내 귀에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동굴에 숨어 지내는 삼촌에게 쌀 한 바가지 보냈다고 자수한 이모는 총알을 맞고 죽어야 했고, 밭을 갈고 돌아오던 작은 아버지는 집 어귀 올레에서 토벌대의 군홧발에 짓밟혀 산채로 땅에 묻힌 채 친척인 동네 사람들과 함께 죽어야 했다.”

 

 

희수는 한 숨을 크게 뿜어내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 나라 사람이 이 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죽였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제자는 군인의 몽둥이를 맞고 거리에 쓰러졌고 쓰러져 신음하는 제자는 또 다른 군인들의 군화에 짓이겨져 끝내 더 움직이지 못했다. 골목에서 여학생 제자는 오빠 같은 군인들의 손에 학생복이 찢겨지고......”

 

희수는 더 말을 잊지 못했다. 한참 후 숙였던 고개를 들고 다시 영어로 중얼거렸다.

 

“선생은 어릴 적엔 무서워서 보고만 있었고 지금은 무력해서 보고만 있다. 도피자로만 산다는 게 두렵다. 외면하고만 산다는 게 한없이 두렵다. 모두가 이 나라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나라 사람이 이 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죽였다.”

 

희수는 같은 이 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며 거리를 걸었다. 그는 저녁에만 충장로 거리에 나타났다. 두 번째 마주 쳤을 때 헬레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말 한 마디 없이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다. 무척 정상적이지만 그가 트라우마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식민지배의 굴욕, 한국전쟁의 골육상잔, 독재의 강제폭압의 악몽 등으로 트라우마 환자가 많을 한국에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는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던 헬레나는 희수 같은 사람을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버리는 한국 사회의 무지함과 배타심을 개탄하며 희수에게 다가갔다. 영어여서 였을까. 희수는 헬레나를 쉽게 받아들였다.

 

“콩나물국밥을 잘하는 식당을 아느냐?”

 

헬레나는 희수에게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었다. 어제 혼자 먹은 콩나물국밥이 생각났다. 희수가 순순히 안내한 식당은 충장로 안 골목에 있었다. 국밥이 나오기 전에 용산에 근무하는 미군이라며 자기를 소개하자 희수가 멈칫했다. 밥이 나오기까지 침묵이 흘렀다. 헬레나가 웃어보이자 고등학교의 영어선생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현재?”

 

그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반응을 보였지만 한편 가능하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는 외부자극에 의한 손상이지만 내적자각이기도 하다.

 

‘도피자로만 산다는 게 두렵다. 외면하고만 산다는 게 두렵다.’

 

고 했던 그다.

 

첫술을 뜨면서 희수는 의외의 말을 걸어왔다.

 

“미국에 가서 살고 싶다.”

 

그가 성급하다싶을 만큼 바로 또 물었다.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느냐?”

 

그가 또 다른 도피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희수가 거리에서 하던 말들 중에 제자에 관해서는 그 사건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목격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갓난아이를 업은 엄마의 죽음이나 아들을 구하려다가 함께 죽임을 당한 아버지... 최근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과 유사하면서도 달라보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콩나물국밥을 광주에서만 두 번째 먹어보는데 참 맛있다.”

 

하자,

 

“광주에서 제일 잘한다는 식당에 우리가 온 것이다.”

 

라고 대답하는 희수는 절대 비정상적이거나 더욱이 스트레스를 받는 환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희수에게서 다정다감한 남자가 느껴졌다.

 

“미국은 왜 가고 싶은가?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건가?”

 

물음에 대답은 차가웠다. 그는 급하게 국밥을 먹어댔다.

 

“광주로 도망 나온 이유와 같다.”

 

그는 고향 제주도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한 말을 이어갔다.

 

“제주도에 가보았나?”

 

헬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구멍이 숭숭한 돌로 만들어진 땅이다. 물을 담아둘 흙이 없는 곳이다. 제주도 땅은 잘 스며든다. 스며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받아들임이다. 순순하다는 말이다. 거기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 그러나 받아들이던 순순함이 죽음을 초래했다. 제주도를 죽였다. 구멍 숭숭한 돌도 다 받아주던 물에 의해서 갈라지고 파괴될 수가 있다. 한국에서 제주도만 그런 줄 알았다. 여기 광주에 와보니 땅은 다르지만 광주도 제주도와 다르지 않았다. 너희 미국은, 미국의 땅은 어떤가?”

 

헬레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짚이는 게 있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의 역사를 훑어보았고 미국과 관련된 근현대사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쏠렸다. 2차세계대전 후의 한국과 미국, 승전국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 한국을 패전한 일본으로부터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실수는 이 때 시작되었다. 한국은 더럽고 미개해보였다. 이런 한국이 두 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나뉜 두 파란, 자립과 의존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자주독립을 인정할 수 없었고 더구나 독립을 주장하는 지지자들의 사회주의적 성향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미국은 외부세력에 의존하려는 한국의 온건한 정치가를 밀면서 친미·친일세력을 끌어들였다. 미국은 한국을 배제시킨 채 한국의 미래를 적국 일본과 상의를 했다. 피만 한국일 뿐 일본의 대리인이 한국의 새 지배층으로 다시 득세했다. 하지만 중앙으로부터의 무관심으로 무시를 받던 지역이 있었다. 바로 제주도였다. 무관심과 무시는 바뀐 지배 방식의 소외이긴 하지만 해방 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에게는 기회였다. 강대한 미국의 힘에 의해 상실된 중앙의 독립 또는 자립의지와는 달리 제주도 섬에서 소외는 기회로 분출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어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도민들은 여전히 일본식민시대 그대로 순사의 폭압에 시달렸고 여전한 수탈로 인해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은 일본의 수탈과 다를 게 없었다. 육지 한반도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저항이 제주도에선 일어났다. 그 정책에 반발하고 나섰다. 반발로 나타난 도민의 주장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느냐, 우리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지 않느냐라는 생존의 외침에 불과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묵살시키기 위해서는 명목이 필요했다. 북한 공산당을 끌어들이며 빨갱이로 몰았다. 미군정의 눈치를 보고 있던 한국의 새 지배층은 미군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아 학살하기 시작했다. 칠년을 넘는 긴 시간 동안 제주도민학살은 이어졌다. 갓난아이를 업은 엄마와 흙 밖으로 드러난 갓난아이의 손가락, 아들만은 살려달라던 아버지의 애원, 자수한 이모, 밭을 갈고 집으로 오던 작은 아버지의 이런 죽임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곳에 일곱 살 꼬마 희수가 있었고 어린 희수는 작은 몸을 제주도 돌웅덩이에 숨기고 그것을 다 보고만 있어야 했다.

 

제주 4·3이로구나, 헬레나는 바라보던 눈을 차마 더 희수에게 둘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에게 미안했다. ‘미국인이라는 게 부끄럽다.’ 글. 사진=오동명/ 19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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