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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7)

9 문규범은 변호사를 통해 변호 받기를 극구 거절했으나 한소연은 아들의 불행이 어머니인 자기 탓인 양 아들의 의사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변호사 선임은 할 수 없어도 고소인과의 합의라든가 법정 밖에서의 수단을 원로 법조인인 안수철과 상의하기 위해 자주 만났다.

 

“언론이 떠들어대니 문규범 검사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어. 고소인이 합의하려 들지 않고 뻗대고 있는 것도 다 언론 때문이지. 검찰에서도 이 사건을 하루 빨리 수습하고 적당히 처리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해. 문 검사가 어수룩했어. 들켰을 때 그쪽에서 요구한 대로 따라만 줬더라도 지금처럼 문제가 커지진 않았을 거야. 내가 뒤에서 손을 써보곤 있지만 역시 언론을 많이 의식하고 있더라고. 그런데 밥은 먹고 다니니? 얼굴이 학창 때보다 무척 안 좋아졌군.”

 

변호사 안수철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소연이가 두부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나? 맞을 걸? 남현동에 내가 잘 아는 두부요리전문식당이 있지.”

 

“아니. 지금은 먹고 싶은 심정이 아냐. 그냥 집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겠니?”

 

한소연은 안수철이 자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말았구나, 생각하니 세월이 덧없고 인생이 무상했다. 내 삶은 있었나, 돌아보게 하는 대학 동창생은 법조계와 정치판에서의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중후했고 그의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곱게 늙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으며 떠오른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란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안수철을 보는 한소연은 어두운 배경에 유리가 거울이 된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이 한없이 추리해보였다.

 

‘보잘 것 없는 친구였는데.’

 

하지만 문재수는 참으로 멋이 있었다. 법대 동창들이 갖지 못한 하나가 있었다. 타인의식의 결여는 자기 삶에의 몰입으로 보였다. 없는 것을 가졌던 문재수가 멋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재수, 넌 이미 삶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라고 소연이가 재수에게 말했을 때 재수는 피식 웃기만 했다. 한소연은 야무졌다. 한소연의 꿈이 야무졌다. 대학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여성법조인으로서 출세해보겠다던 꿈은 꿈이 계획일 수 있게 상당히 현실적이어서 실현이 거의 가능했다. 이미 이학년 때 고시 일차에 합격하며 동창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안수철도 그 중 하나였다.

 

“스터디그룹을 소연이가 주도해주면 좋겠다.”

 

 

수철이 주동이 돼 일학년 때 만든 고시준비 스터디그룹에 소연이를 끌어들이려 했다.

 

“난 혼자가 좋아.”

 

거절했을 때만 해도 한소연의 꿈은 다이어리의 스케줄과도 같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그 꿈이 진정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짜 자기를 위한 것인가, 자문하게 한 문재수가 한소연 앞에 나타났다.

 

‘뭐 이런 막무가내 인간이 있어?’

 

재수는 소연에게 앞으로의 계획이 꼭이 없다고 했다.

 

“지금이면 충분하지 않나?”

 

따져 묻듯 의아한 표정으로 소연이가 재수의 말을 풀이해보았다.

 

“지금에 충실하면 된다는 말이니?”

 

재수가 지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으로 지금을 이해하는가 보구나. 지금이란 시간만이 아니지. 공간의 의미가 더 깊을걸.”

 

궤변 같고 현학적이어서 소연은 재수를 무시했다.

 

“말장난하려 하지 마. 결코 멋있게 보이지 않으니깐.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는 따위의 그런 개 같은 철학을 말하고 싶은가 본데, 지금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 바로 이 시간이 아니니?”

 

역시 재수가 그렇게 웃었다.

 

“그러니까 공간이지. 무엇과 무엇의 사이니까.”

 

소연은 엉뚱한 재수의 대답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서 퍼지는 섬광을 느꼈다. 자기의 꿈이 고작 출세라는 생각이 들며 머리가 지근거리며 아파왔다.

 

‘나에게 지금이란 미래를 위해 유보해놓은 현재이고 따라서 나에게 지금은 없다.’

 

소연이 재수에게 물었다.

 

“너의 미래는 생각해보지 않았니?”

 

재수가 역시 또 웃었다.

 

“소연이는 미래를 현재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미래를 위해 현재가 있는 듯이 말야.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네가 난 부럽다. 현재 어떻게 살면 훗날 어찌 될 것이라는? 삼년 죽어라 법전을 파면 판사가 돼 있거나 검사가 돼 있고, 그리고 승진하고, 이게 꿈이니? 꿈이 계단 올라가듯 단계적이네. 엘리베이터 층수 누르듯이 올라가는 꿈이 편의점 진열대 위의 상품 같게 느껴져. 소연인 좌절이란 걸 경험해 본 적이 없는가보구나. 일테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 말야.”

 

소연이 재수의 눈을 훔쳐보았다. 웃고 있는 눈이 슬펐다.

 

“이제 스무 살의 우리야. 그 사이에 겪어봐야 얼마나 큰 좌절이 있었을까.”

 

슬픈 눈으로 웃으며 재수가 대꾸했다.

 

“같이 출발했는데 앞서 달리고 있는 친구의 등을 헉헉 따라 달리며 보는 것에서도 좌절은 있어. 좌절이 커야만 하나? 좌절에 크기가 있을까? 대학입시 낙방의 충격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니 크기로 말할 수 없고, 또 어떻게 크기로 재려할 수 있겠니.”

 

“대학에 떨어졌었어?”

 

재수가 또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비유일 뿐이야.”

 

“근데 지금이 무엇과 무엇의 사이라서 공간이라는 말도 이해하기 힘들다.”

 

소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랑 나랑 같이 있잖아. 바로 지금, 시간보다는 공간 아니니? 너랑 나랑 몇 시에 함께 있다? 이것보다는 함께 있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지 않니?”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둘 다 의미가 있지. 시간도 공간도.”

 

“그러니까 지금이면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미래도 필요한 거잖아.”

 

소연이 고개를 저을 때 재수는 얼굴을 끄덕였다.

 

“지금을 포기하면서 미래를 채울 수 있을까? 지금을 시간으로만 간주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 편한 대로 생각 없이 막 살자는 말로도 들리네.”

 

“생각 없이? 좋아. 직접화법을 써볼게. 사법고시 일차합격, 이차합격, 최종합격. 이런 것이 생각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오히려 이것이 생각 없는 것 같이 보이는데. 소연이, 너를 비난하고자 하는 말은 아냐. 단지 나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 변명이라고 해야 맞겠다. 난 무능하잖아. 꿈도 갖지 못하니 더욱.”

 

소연이 재수가 참으로 멋있다고 여긴 것은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능력을, 가진 것을, 그리고 미래의 꿈을 얘기하지 무능,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능력을 입에 오르내리는 뭇사람들에게서 곤충을 보는 것 같았다. 떠오르는 단어는 맹목이었다. 맹목은 생각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소연이 재수의 스케치북을 보여 달라고 했다.

 

“화가로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은 없는 거야?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마음으로 그릴지 궁금해.”

 

소연은 공부를 하며 등수를 따지고 합격을 염두에 둔 자신을 곱씹으며 재수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듣고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재수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웃지 않았다.

 

“내가 방금 소연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욕심일까? 욕심이라면 어떤 욕심일까? 그려서 공모전 따위에 큰 상을 바라며 출품하는 것? 입상작가가 되는 것?”

 

얘기를 하며 재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눔이지 않겠니? 네게서 느끼고 싶은 나. 채움이지 않겠니? 나에게 들어차는 너. 그리고 싶은 것은 안고 싶은 것과 같은 거야. 갖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거지.”

 

“결국 갖고 싶겠지. 나를 그린다는 것은 나를 안아보겠다는 건가, 그럼?”

 

“화가로 유명해지고 싶냐며? 그저 그리고 싶은 것뿐이야. 마음이 그리게 하고 있어. 유명은 꿈이나 계획하고는 무관하고, 유관하다면 그런 그림은 그림이 될 수가 없지. 그림이 적어도 몇 푼짜리로 매겨지는 공산품은 아니니까. 아니, 아니어야 하니까.”

 

“나를 안고 싶어서 그린 그림이 나중에 유명해질 수도 있고 없고... 모나리자도 그랬을 것 같네. 그래, 재수, 네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으로 충분하다는 말. 지금이 공간의 의미가 크다던 네 말. 이렇게 함께 하는 것, 이해할 수 있겠다.”

 

소연이 재수의 앞쪽으로 걸어 나가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돼? 설마 처음부터 누드를 그리겠다는 건 아니겠지?”
“소연인 코와 입술,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이 아름다워서 그것만으로도 족해.”

 

“그럼, 코하고 입만 그릴 거야? 다른 덴 아름다운 곳이 없어? 일테면 마음 같은 거. 그러게. 마음은 어떻게 그리지? 가슴을? 내게 마음은 머리에서 나오는데.”

 

모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중심을 자신에서 타인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자기의 타인화는 자신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자리바꿈하는 일이다.

 

‘이렇게 있으면 돼?’

 

소연은 재수가 자기의 벗은 몸을 그리겠다고 해도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단해. 나를 이렇게 바꿔놓다니.’

 

탈자기화는 더 강한 자기중심화임을 깨달으면서 소연은 출세라는 타인의식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소연이 기성을 벗겨내고 기존을 벗어던지기하며 사념에 빠져 있는 동안 재수가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흰 종이 위에 검정 목탄으로 흘리듯 흘기듯 대충 그린 듯한 간단명료한 선은 날고 있는 새 두 마리를 닮았다.

 

 

“이게 나야?”

 

뚫겠다는 시선이 담긴 재수의 얼굴이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몸은 자기의 감옥이지. 다 벗어던질 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겠지.”

 

소연이 의뭉스럽게 생각했다.

 

“벗을까? 나, 너 앞에선 벗을 수 있을 것 같아.”

 

재수는 고개를 가로저어댔다.

 

“옷도 자기의 감옥이지. 하지만 벗었다고 해서 자유로울까? 벗지 않아도, 더 가다듬어도 자유로울 때 옷은 몸이 되지 않을까.”

 

“내가 새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거야?”

 

“새로 봤구나. 내가 그랬잖아. 너의 코와 입술만으로도 족하다고. 그것을 그렸는데. 너를 다 그렸는데. 그래, 너를 다 벗긴 누드를 그린 건데. 그래, 다 벗어던진 너의 온몸을 그린 건데. 너에 대한 나의 바람이기도 하고. 꼭 끼인 옷을 입고 있거든, 소연인.”

 

“내가? 이렇게 헐렁하게 입는데?”

 

바지를 손가락으로 집어 흔들어 보였다. 계획이며 꿈이 흔들리는 바지바람에 날려가는 것 같았다.

 

재수가 스케치북을 들어올렸다. 일분도 안 돼 다시 그것을 내려놓았다. 역시 목탄의 검은 선이 장식한 간결한 크로키였다. 소연은 자기의 벗은 하반신임을 바로 알아차리며 입고 있는 청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속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안으며 그가 그의 손바닥을 펴 그녀의 등을 쓰다듬듯 더듬었다. 손이 등으로 느껴왔다. 그녀의 몸을 탄탄히 감싸고 있던 브래지어가 풀리려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부풀어 솟구치며 날으려는 풍선으로 느껴졌다. 풍선을 따라 날아갈 듯 가슴이 시원했다. 동시에 두 다리가 모아졌다.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떨고 있었다. 그녀도 팔을 감아 그를 안았다. 가벼워질 수 있는 긴장감에 흐뭇해하며 그녀는 그의 품에 꼭 안긴 자신에게서 자유를 더듬고 있었다. 이것이 아름다운 구속인가 보다, 더 조여 들어오는 그의 팔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글.그림=오동명/ 8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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