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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미션 (3)

멘도사(로버트 드 니로)는 최악의 죄인이다.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 하며 살아간다. 인류문명사 최악의 ‘스캔들’로 남아있는 스페인의 남미 정복 과정에 ‘용병’으로 참전한 전쟁영웅이었지만 남미를 정복한 이후엔 ‘노예사냥꾼’으로 전업한다. 

 

 

노예사냥을 하는 멘도사의 모습을 보면 전투력이 뛰어난 용병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만큼 많은 남미 원주민을 학살했음도 확실해 보인다. 그 전투력과 경험을 ‘노예사냥’에 접목한 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둔 듯하다. 스페인 총독과도 서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다. 이런 죄악罪惡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던 멘도사는 자신의 약혼녀와 ‘바람 난’ 이복동생까지 죽여버린다. 죄악의 3종세트를 완성한다.

 

멘도사는 스페인 정부와 과라니 원주민 노예를 독점 거래하듯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를 ‘독점’하다시피 하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용병으로서의 살인은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부여받은 ‘살인면허’가 있으며, 노예사냥과 그 과정에 벌어지는 살인 역시 스페인 총독 카베사의 묵인하에 이뤄진다. 이복동생을 죽인 것도 ‘정당한 결투’로 폭넓게 해석돼 무죄방면된다. 아마도 유능한 노예사냥꾼을 잃기 싫어하는 카베사 총독의 입김이 작용한 듯하다.

 

적어도 멘도사에게는 ‘죄와 벌’의 상관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미 원주민에 대한 학살은 ‘제국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원주민 사냥은 ‘식민지 경영’이라는 명분으로 은폐되고, 이복동생 살해 역시 ‘결투’라는 형식논리를 적용해 없던 일이 돼버린다. 세상에 죗값을 치르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멘도사뿐이겠는가. 

 

사람들이 저지른 죄들은 항상 권력과 금력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해석되고 그에 따라 작은 죄가 큰 죄로 둔갑하기도 하고, 큰 죄가 작은 죄로 둔갑하거나 아예 지워지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선 끔찍한 죄를 찬미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천벌 받아 마땅할 듯한 죄인들이 영웅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약혼녀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자기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멘도사는 깊은 상념에 사로잡히고 비로소 이제까지 자신이 저질러온 온갖 악행과 죄에 눈을 뜬다. 법은 그에게 무죄라고 말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유죄임을 자각하고 괴로워한다. 법은 그를 가두지 않았지만 스스로 수도원 골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브리엘 신부는 노예사냥꾼으로 악명 높았던 멘도사를 용서하고 이구아수 폭포 위에 자리잡은 과라니 부족의 마을로 데리고 간다. 멘도사는 그동안 자신이 과라니 부족의 살육과 사냥, 그리고 동생을 찔러 죽이는 데에 동원했던 모든 무기를 담은 짐을 ‘업보’처럼 목에 걸어메고 깎아지른 듯한 이구아수 폭포 절벽을 오른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의 형장으로 향하는 예수의 형상이다.

 

그 처절한 모습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존 사제(리암 니슨)는 견디지 못하고 멘도사가 끌고 있는 밧줄을 칼로 끊어 버린다. 천근만근의 ‘업보’가 굴러떨어진다. 멘도사는 허겁지겁 다시 내려가 다시 ‘업보’를 멘다. 

 

분노에 찬 시선으로 자신의 ‘업보’를 끊은 존 사제를 한번 노려본다. 가브리엘 신부와 존 사제가 아무리 ‘하나님도  이미 너를 용서하셨다’고 일러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법의 용서가 자신에게 무의미했듯 하나님의 용서도 그에게는 무의미할 뿐이다. 마침내 폭포 위에 자리 잡은 과라니 부족의 마을에 도착한다.

 

한눈에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사냥해가던 노예사냥꾼 멘도사를 알아본 원주민들이 달려들어 멘도사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가브리엘 신부도 존 사제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멘도사 역시 저항하지 않고 그들에게 목을 맡긴다. 멘도사의 진정성에 과라니족은 마침내 칼을 거둔다. 멘도사는 피해자인 과라니 원주민들의 용서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오열하고 모든 ‘업보’를 내려놓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악덕 전당포 노파를 죽여버린다. 완전범죄가 된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 자수하고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른다. 유형길에 오르면서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인간들이 저지른 죄를 과연 누가 정죄하고 혹은 그 죄를 누가 감히 용서할 수 있을까.

 

 

신문과 방송을 보면 큰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많은 사람이 유유히 법정을 빠져나오기도 하고, ‘반성의 기미가 보여서’ 형이 경감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기도 한다. 정작 피해자의 의사와 용서 여부와는 상관이 없다. 또한 죄를 짓고도 성당이나 교회에서 신부님이나 목사님 앞에서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은 듯 마음 홀가분하게 또 다른 죄를 짓는다. 또다시 용서받으면 그만이다.

 

법도 하나님도 ‘죄와 벌’을 제대로 관장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라스콜리니코프와 멘도사가 그랬듯 오직 믿을 것은 양식에 따른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정죄밖에 없는 듯하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 역시 법과 하나님에게 묻고 구할 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묻고 피해자로부터 받아야만 완성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이쯤 되니 ‘법꾸라지’들도 떠오르고 ‘야스쿠니’도 떠오르고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도 떠오른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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