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소룡은 TV 드라마에서 그가 연기했던 ‘케이토’란 이름으로 불린다. 전성기가 지난 배우 릭 달튼은 한때 잘나갔던 배역 ‘카힐’로 기억된다. 어디 이게 영화 속 이야기만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일지 모른다. 당신은 이름으로 불리는가 직職으로 불리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씨’라 통용되는가.
# 장면❶ =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촬영장에서 무료하게 대기하던 중, 자신을 천하무적이라 떠벌리는 당대의 스타 브루스 리(이소룡)를 만난다. 클리프는 그를 ‘Bruce’라 부르지 않고 ‘케이토(Kato)’라고 부른다. 케이토는 당시 TV드라마에서 이소룡이 연기했던 천하무적 배역의 이름이다.
이소룡도 케이토라는 배역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처럼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또한 자신을 정말 케이토와 같은 불패의 실전 무술가로 착각한다. 이소룡은 없고 케이토만 존재한다. 이소룡이 케이토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케이토가 이소룡을 만들어낸 셈이다.
# 장면❷ = 쇠락한 자신의 영화촬영장을 히피들에게 점령당한 채 살아가면서 시력도 잃고 히피들과 함께 마약을 장기복용한 스판(Spahan)은 정신도 혼미하다. 어렵게 찾아온 친구 클리프의 얼굴이야 당연히 못 알아보겠지만 그의 목소리까지 분별이 안 된다. 클리프는 “나야, 클리프 부스”라고 옛친구에게 자시의 이름을 말해보지만 스판의 기억엔 클리프라는 이름이 없다.
안타까운 클리프는 “릭 달튼의 스턴트맨 역을 했던 클리프”라고 바꾸어 설명한다. 그제야 스판은 희미하게나마 클리프를 기억하는 듯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역할’일 뿐이다.
# 장면❸ = 악당 조연으로까지 출연해야 할 정도로 배우로서 내리막길에 들어선 릭 달튼은 영화 촬영장에서 8살짜리 ‘천재’ 아역 배우를 만난다. 8살 먹은 영악스러운 아역스타 트루디는 촬영장에서 처음 만나 이름을 물어보는 릭에게 “내 진짜 이름은 트루디 프레이저이지만, 이번 영화 속에서 배역의 이름은 미라벨라”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곤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 촬영장에서는 본명 대신 배역의 이름만 사용한다”며 릭에게도 자신을 트루디가 아닌 미라벨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그만큼 8살짜리 배우는 자아自我보다 배역에 충실하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자아는 역할 수행에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릭 달튼을 대하는 모든 사람은 그를 드라마 ‘바운티 로(Bounty Law)’에서 보여준 현상금 사냥꾼 카힐(Cahill)이란 이름과 모습으로만 기억한다. ‘바운티 로’를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릭 달튼은 ‘nobody’와 다름없다. 이제 8살밖에 안 된 트루디가 릭 달튼이 출연한 ‘바운티 로’를 시청했을 리 없다.
트루디는 술과 담배에 찌들어 연신 가래를 돋우는 릭을 벌레 중에서도 징그럽고 위험한 벌레 보듯 한다. 배우는 계속 역을 맡아야만 한다. 카힐 역이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배역을 맡지 못한 릭 달튼은 그저 벌레일 뿐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變身)」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가족들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던 청년 그레고르는 어느날 벌레로 변신한다. 처음에는 동정하던 가족들도 그레고르(벌레)를 방에 가두고 멀리하고 꺼린다.
어느 날 그레고르가 아버지가 던져 준 사과에 맞아 죽자 가족들은 모두 홀가분해지고 안도한다. 그레고르에게는 가족을 부양하는 ‘배역’만 있었을 뿐이다. 브루스 리는 ‘케이토’ 이후에도 배역이 들어와 벌레가 되지 않았지만, 릭 달튼은 ‘카힐’ 이후 배역이 끊기고 벌레로 ‘변신’ 중이다.
배역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어디 배우들뿐이겠는가. 우리 모두 자신이 세상에서 담당하고 있는 직(職)과 배역으로만 기억되고 불린다. 사회에 나간 ‘홍길동’은 결코 ‘홍길동’으로 불리지 않는다. ‘홍일병’ ‘홍부장님’이거나 ‘홍사장님’이 된다.
이도저도 아니면 ‘홍씨’로 불리기도 한다. 아예 ‘홍’도 떼어버린 채 ‘부장님’이거나 ‘사장님’이라는 직으로만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럴 경우 ‘홍씨’는 ‘어이’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는 종합병원 대기실에서나 ‘홍길동님’으로 불리고 온전한 자아를 회복한다.
직(職)으로만 불리는 사람들은 잘리거나 정년퇴직하면 모든 게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퇴직은 사망선고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퇴직한 사람들도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조금 구차하지만 ‘전직(前職)’이라도 매달고 살아간다.
릭 달튼도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 ‘카힐 역을 했던 배우’라고 전직을 댄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를 알아모신다. 우리 모두에게 ‘본명’이란 불필요하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은 라틴어로 ‘가면’이다. 고대 로마 연극에선 모든 배우들은 가면(persona)을 쓰고 연기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탈춤극과 유사했던 모양이다. 가면(persona)이 곧 ‘사람(person)’이라는 말이 돼버렸다.
분명 겉으로 보이는 모습(person)이 곧 그 인간(human)은 아닐진대, 갈수록 그 사람의 ‘배역’이 그 ‘사람’이 돼버리는 듯하다. 우리 모두 세상에서 제법 그럴듯한 ‘배역’을 맡고 있으면 자신을 제법 그럴듯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모양이다. 남들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조금은 민망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보다가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 마지막 구절이 민망함을 일깨운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