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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블릿 트레인 (9)

1000만불이 든 돈가방을 노리고 세계 최고의 킬러들이 몰려든 ‘탄환열차’는 전쟁터가 된다. 전쟁은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수단과 방법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무력에 호소하는 ‘마지막 수단(last resort)’이자 궁극적인 해법이다. 말이 필요 없다. 탠저린과 레몬, 늑대와 말벌들이 닥치는 대로 쏘아버리고 베어버리고, 두들겨 패고 독침을 찔러버리기도 한다.

 

 

이 살벌한 전쟁터에 조금 특이하고 생뚱맞은 킬러가 등장한다. 더 이상 살상(殺傷)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무당벌레(브래드 피트)’다. 무당벌레는 살상은 하지 않고 ‘도덕적’이고 옳은 방법으로 돈가방만 찾아오겠다는 신념으로 총도 없이 전투장비라곤 폭죽과 수면제 따위만 준비하고 전쟁에 나선다.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

무당벌레는 자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킬러들에게 ‘대화와 협상’을 제안하고, ‘분노가 빠르면 빠를수록 이해는 느려진다’는 둥, ‘상대에게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는 둥 참 좋은 말만 골라 한다. 모두들 ‘전쟁’을 하자는데 무당벌레 혼자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자고 한다.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무슨 ×소리냐?’ 뿐이다. 기세등등하게 이미 승기(勝機)를 잡은 킬러들이 보기에 이미 전성기도 지난 늙수그레하며 몸에 지닌 무기도 없는 무당벌레의 도덕과 ‘정치적 해결’ 호소는 씨도 안 먹힌다. 결국 평화적인 해결책은 폐기되고 탄환열차는 전쟁터가 되고 만다.

전쟁과 정치는 흔히 헷갈린다. 프로이센의 유명한 전략가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정의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은 듯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무지막지한 말을 남긴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 안 흘리는 전쟁’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혼자 대견해한다.

전쟁과 정치를 동일시하고 전쟁이든 정치든 모두 ‘강자’가 이기는 게임이며 이겨야 하는 게임이라는 인식이다. 옳고 그름 따윈 상관없다. 철저한 힘의 논리다. 만약 무당벌레가 권총 정도가 아닌 기관총 들고 가슴에 수류탄 주렁주렁 달고 ‘정치적 해결’을 제안했다면 킬러들은 응했을지도 모르겠다.
 

 

무당벌레와 킬러들의 대화는 문득 역사학자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멜로스 대화(Melian Dialogue)’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던 기원전 406년, 아테네는 그리스의 작은 폴리스 멜로스(Melos)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협박한다. 백기투항하지 않으면 모두 죽이고 정복하겠다면서 말이다. 

멜로스는 ‘정의와 도덕적 원칙에 입각한 타협, 신의 뜻’을 내세우며 항변한다. 아테네 대표는 “강한 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약자는 원치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며 신은 강자의 편”이라고 꾸짖는다. 결국 투항을 거부한 작은 도시 멜로스 시민들은 도륙당하고 정복된다.

요즘 정치가 ‘불릿 트레인’의 킬러들이 펼치는 전쟁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방불케 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정치는 사라지고 오로지 상대를 제압하고 섬멸하겠다는 킬러들 같은 전의(戰意)만 번뜩인다. 

‘힘 있는’ 대통령은 야당에게 한치의 양보도 없다. 혹은 ‘힘 있는’ 아테네가 힘없는 멜로스를 족치듯 ‘강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며, 약자는 원치 않는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찍어누르는 듯하다. 밀어붙여 쓸어버릴 충분한 힘이 있는데 진격을 멈추거나 한 걸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모양이다. 전쟁터의 논리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공산혁명가 마오쩌둥이 믿었던 것처럼 정치와 전쟁은 같은 것이 아니다. 미국 정치학의 대부격인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집필한 정치학 입문서 「정치학: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차지하는가(Politics: Who Gets What, When, How)」는 정치의 정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쟁은 ‘누가 당장 무엇을 차지할 것인가’만 문제인 반면 정치는 ‘그것을 차지하는 때와 방식’까지 다룬다. 정치는 강압적이거나 무력으로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도덕과 윤리에도 부합해야 한다. 또한 미래에 좀 더 부드럽게 차지하기 위해 당장 물러설 수도 있는 것이 정치다. 정치로 풀어갈 일은 정치로 풀어야지 곧장 전쟁으로 달려갈 일이 아니다.

탄환열차의 아수라장에서 결국은 무력을 자제하고 대화와 타협을 추구했던 무당벌레가 최후의 승자로 남는다. 그렇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말은 어땠을까. 아테네는 무력으로 쉽사리 멜로스를 정복해버렸지만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은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멜로스에서도 쫓겨난다. 그리스 세계의 민심이 아테네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전말을 기록한 투키디데스는 “힘이 곧 정의가 아니다. 정의와 도덕을 존중하지 않고 힘을 자제하지 않는 자는 결국은 망한다”는 교훈을 후세에 전한다. 역시 멜로스와 정치로 풀 일을 전쟁으로 풀었기 때문에 아테네도 무너졌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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