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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블릿 트레인 (4)

 

2인조 킬러 ‘탠저린’과 ‘레몬’은 삼합회 조직에 납치당한 ‘하얀 사신’의 외아들을 구출하고 몸값으로 지불했던 1000만불 돈가방까지 회수하는 미션에 성공해 교토행 탄환열차에 탑승한다. 이제 교토역에서 ‘하얀 사신’에게 아들과 돈가방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차츰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열차 안에서 ‘하얀 사신’의 아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돈가방까지 사라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열차 안에 누군가 만만치 않은 ‘나쁜 놈’이 타고 있다. 2인조 킬러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직감한다.

‘탠저린’과 ‘레몬’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긴장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결사의 행동요령을 다시금 확인한다.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shoot first, ask questions later).” ‘탠저린’과 ‘레몬’뿐만 아니다. 연인의 원수를 찾아 열차에 탑승한 ‘늑대’의 행동요령도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이다.

늑대는 애인이 살해당한 피로연 연회장에서 ‘무당벌레’를 본 것 같다는 어슴푸레한 기억 하나만으로 다짜고짜 칼을 꺼내 먼저 찌르고 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수라장에서 살아가는 킬러들의 행동강령이자 생존법칙이다. 뭔가 미심쩍고 혐의가 있으면 먼저 죽이고 볼 일이다. 상대가 정말 범인이거나 최소한 연루자이거나 혹은 위험인물이었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그만이고, 확인할 수 없어도 그만이다. ‘생사람’ 잡았어도 어쩔 수 없다.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라는 행동요령은 꽤나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텍사스가 독립국이었던 1850년대, 텍사스는 국경을 마주한 멕시코인들의 불법 유입과 소요 사태로 골머리를 앓던 끝에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텍사스 수비대)’라는 준(準) 군사조직인 민병대를 만든다. 이 민병대의 묵시적인 근무수칙이 바로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였다.

그렇다고 아무나 마구 쏘는 것은 아니다. 누더기 같은 ‘판초’를 걸친 멕시코인이 뭔가 수상한 모습을 보이면 일단 먼저 잡아넣든지 쏴버린다. 당연히 멕시코인들에게는 ‘텍사스 악마들(Texas Devils)’로 불렸던 조직이었지만, 백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조직의 근무수칙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텍사스를 대표하는 야구 구단 이름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를 자랑스럽게 내거는 모양이다. 문득 ‘텍사스 레인저스’에 멕시코 출신 야구선수가 있을지 궁금해진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어서였는지 2012년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원칙을 이라크에 적용한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하고 있다는 매우 근거가 희박한 혐의로 우선 이라크를 초토화시켜 놓고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오판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요즘도 미국 경찰들은 흑인이나 무슬림에게만큼은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란 근무수칙을 암암리에 적용하는 듯하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통은 오늘도 면면히 이어진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책임 문제로 온 나라가 부글부글 끓는다. 많은 이가 ‘책임 있어 보이는’ 인사들을 당장 파면하거나 경질하라고 요구한다. 진상규명은 그다음이라고 한다. ‘텍사스 레인저스’ 방식이다. 

반면 대통령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실 확인 후에 인사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먼저 확실히 확인하고 쏘겠다’는 거다. 어느 방식이 옳은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검사 시절 일단 수상하면 영장부터 치고, 소위 ‘조국 사태’ 때는 소환 조사도 없이 기소부터 해버리던 한국판 ‘텍사스 레인저스’들이 지금은 ‘철저한 확인도 없이 쏴버리는 짓은 현대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니 좀 어리둥절하다. 1년 새 중세사회에서 현대사회로, ‘유죄추정의 원칙’이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바뀐 듯하다.

반면 ‘텍사스 레인저스’에 분노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거꾸로 ‘철저한 사실규명 후에 책임을 묻겠다’는 권력 핵심부의 신중한 방침에 분노한다. 참으로 밀가루 반죽 같은 비결정(非結晶)적 원칙들이다. ‘내로남불’의 완결편이다.

‘내로남불’의 정신적 고향은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sophist) 철학자들이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한 말의 본뜻은 ‘자기 자신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곧 정의”라고 결론내린다.

폴레마르코스(Polemarchus)는 “적에게 해를 끼치고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곧 정의”라 하고, 트라시마코스(Thrasymacus)는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총정리를 해준다. 
 

 

이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소피스트: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며 뿌듯해했다. 그들은 섭섭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궤변론자(詭辯論者)’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말솜씨 현란한 사기꾼’이다. 플라톤이 「국가론(Republic)」에서 이들의 ‘정의론’에 조목조목 반박하지만 이들은 플라톤을 ‘촌놈’이라고 비웃는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2500년 전 그리스 ‘소피스트’들의 정의론이 득세한다. 소피스트들의 지혜에 따르면 ‘이니 하고 싶은거 다 하는 것’이 정의였다가, ‘여리 하고 싶은 거다 하는 것’이 정의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소피스트들을 비판했던 플라톤이 정말 ‘촌놈’이었고. 지금 상황에 마음 불편한 우리도 ‘촌놈’들인가.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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