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릿 트레인(Bullet Trainㆍ2022)’은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의 신작 액션 코미디 물이다. 제작비 1억 달러를 투자해서 전 세계적으로 2억4000만 달러를 거둬들였다면 흥행에 성공한 셈인데, 우리나라에선 흥행 보증수표라 일컬을 만한 브래드 피트가 주연임에도 흥행에 참패한 듯하다. 왜 일까.
우리나라에서 ‘불릿 트레인’이 실패한 까닭을 말하라고 한다면, 첫번째 ‘왜색(倭色)’을 꼬집을 수 있다. ‘왜색’을 향한 우리나라 관객의 거부감은 제아무리 브래드 피트라고 해도 ‘넘사벽’이다.
우리가 ‘불릿 트레인’의 ‘왜색’에 섭섭했다면, 정작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에 듬뿍 뿌려진 ‘표백제’에 섭섭했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이 일본 소설인데, 영화 속 배역은 대부분 백인 서양인들이다.
원작에 나오는 일본 킬러 대신 백인 킬러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가 산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영화의 주제가 ‘운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운명’을 보는 시각은 동서양이 확연히 다른 편이다. 영화의 원작자는 동양적인 운명관을 배경에 깔고 있는 듯한데, 백인 배우들이 나와서 동양적 운명관을 이야기하고 연기하는 게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설날 특집 방송에 외국인이 한복 차려입고 윷놀이하는 느낌이다.
어느 날 일본이 자랑하는 ‘신칸센 탄환열차’에 도쿄올림픽에 외국 스타선수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미국, 영국, 멕시코,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온 세계 정상급 킬러들이 모여든다. 탄환열차에서 ‘세계 킬러 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를 기획한 인물은 ‘하얀 사신(死神)’이라는 러시아 출신 야쿠자 두목이다. 하얀 사신은 시시하게 중국 폭력 조직 ‘삼합회(三合會)’에 잡혀갔다가 몸값 내고 풀려나온 신통치 않은 아들, 자신의 아내를 죽인 카버(Carver), ‘말벌’ ‘탠저린’ ‘레몬’ 등 세계 굴지의 킬러들이 탄환열차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여버리고 킬러계에 자신만 독야청청하는 신묘한 기획을 한다. 후계구도 정립과 정적 제거를 동시에 도모하는 셈이다.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다.
이 러시아 출신 야쿠자 두목은 원작에서도 유일한 백인으로 등장하는 인물답게 운명관 역시 유일하게 서양스럽다. 하얀 사신의 구호는 ‘운명을 지배하지 못하면 운명에 지배당한다’이다. 자신의 운명을 주어진 틀 속에서 개척하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창조하려든다. 이 정도면 ‘난 천명(天命)을 받았다’고 믿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자신이 속한 야쿠자 조직의 보스를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다. 백인이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보스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영국 왕실에서 물먹은 앤드류 왕자가 일본으로 건너와 왕의 자리에 오르는 꼴이다. 그야말로 운명쯤은 씹어먹고, 숙명도 모두 극복하고 천명을 받들어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는 셈이다.
상대를 제거할 때마다 러시아 출신답게 ‘러시안 룰렛’을 시전한다. 권총 리볼버 탄창을 팔뚝에 대고 드르르 돌려 자신과 상대의 머리에 한번씩 방아쇠를 당긴다. 생사를 운명에 맡기는 듯하지만 사실은 자신은 불사(不死)의 천명(天命)을 받았다고 확신하기에 가능한 퍼포먼스다. 이처럼 하얀 사신은 자신의 운명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천명을 받았다고 믿는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하면서 이렇게 천명을 받았다고 믿는 인물의 최후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진다. 결국 하얀 사신이 믿는 ‘천명론’은 허구였음이 밝혀진다. 영화의 마지막, 하얀 사신은 또 한번 ‘러시안 룰렛’을 시전하는데, 자기 총에 머리통이 날아간다.
영화 마지막에 해결사 ‘무당벌레(브래드 피트)’를 이 아수라장 탄환열차에 탑승시킨 의뢰인 ‘마리아(샌드라 불럭)’가 등장한다. 무당벌레는 영어로 Ladybug다. 여기서 Lady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무당벌레의 또 다른 이름이 아예 Maria beetle(마리아의 딱정벌레)이기도 하다. 무당벌레의 일본이름은 ‘텐토무시(천도충天道蟲)’이다. 모두 천명을 받은 이름이다.
하얀 사신은 탄환열차의 살육극을 자신이 설계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마리아’가 설계하고 자신의 집사 ‘무당벌레’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던 사건임이 밝혀진다.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마리아에게 무당벌레가 ‘당신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냐’고 묻는다. 마리아는 자기도 몰랐다고 답한다. 누가 감히 마리아도 모르는 천명을 안다고 하겠는가. 마리아의 아들이자 ‘신의 외아들’인 예수도 천명을 알 길이 없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Eli, Eli, lama sabachthani)’하고 탄식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천명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흔히 왕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권력자들의 언행은 자신만 아는 천명을 받은 듯 ‘하얀 사신’만큼이나 거침없고 사납다.
권력자들에게 천명이란 무엇일까. 동양에서도 ‘민심이 천심’이라 했고 고대 로마에서도 ‘Vox populi, vox Dei(국민의 소리가 신의 소리)’라고 한 것을 보면 민심이 곧 천명인 듯한데, 민심이 성나면 권력자들은 경찰과 검찰부터 내세우니 모를 일이다. 천명을 받들어 천심과 싸우겠다는 말밖에 안 되는 듯하다. 성난 민심(천심)에 대고 ‘너희들 종북주사파 아니냐’면서 하얀 사신처럼 러시안 룰렛을 하자고 달려드니 당황스럽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