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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블릿 트레인 (10)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보스로 등장하는 ‘하얀 사신’이 적을 제거하는 방식은 조금은 독특하다. 항상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처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병법 36계에 나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이다. 남의 칼을 빌려서 죽인다는 뜻이다.

 

 

차도살인은 최고의 병법 중 하나다. 우선 비용이 덜 든다. 상대를 제거하지만 상대는 그가 누구의 칼에 죽었는지 헛갈려서 누구에게 복수해야 할지도 헛갈린다. 관전자들도 누가 범인인지 알쏭달쏭하다. 살인의 후폭풍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하얀 사신’은 마음에 안 드는 아들도 남의 손을 빌려 처단하고, 아내를 죽인 원수도 남의 손으로 죽인다. 하얀 사신은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애비’란 비난에서 벗어나고, 교통사고로 죽었을 뿐인 아내의 죽음까지 피로 응징했다는 비난에서도 비켜선다.

하얀 사신은 자신을 겨눈 상대의 총이나 칼을 빼앗아 상대를 죽이는 것을 ‘종특’으로 한다. 자신을 겨눈 31번의 암살기도가 있었는데 31번 모두 자객의 무기를 빼앗아 자객을 죽였다는 야쿠자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그는 ‘차도살인’의 달인이다.

‘장로’와의 마지막 결투에서도 하얀 사신은 벽에 박힌 장로의 칼날에 장로의 목을 밀어 32번째 차도살인의 전설을 이어가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열차가 탈선하는 바람에 신기록 경신에 실패한다.

아버지 하얀 사신에게 보고 배운 게 그것이어서 그랬는지 하얀 사신이 내팽개친 딸 ‘왕자’도 아버지를 향한 복수를 유키치라는 아버지의 조직원을 통해 실현하려 든다. 아버지를 죽이고도 패륜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해법이다.

하얀 사신이 상대의 총을 빼앗아 상대를 죽이는 장면을 익히 봐서인지, 왕자는 한술 더 떠서 누구든지 자신의 총을 빼앗아 자신을 쏘면 총알이 거꾸로 발사돼 상대가 죽는 장치를 자신의 총에 설치해두기까지 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하얀 사신은 왕자의 총을 ‘무당벌레(브래드 피트)’를 향해 발사하는데, 그 총알에 자신의 머리통이 날아간다. 차도살인은 진화를 거듭한다.
 

 

차도살인의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지」에서 영윤이라는 자가 당대 최고 권력자 동탁을 양아들 여포를 시켜 죽이고, 조조는 손권을 꼬드겨 관우를 죽인 다음 ‘나는 관우의 피와 무관하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시치미를 뗀다.

현대에도 ‘차도살인’의 전법은 널리 채택된다. 일본 야쿠자 조직은 처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가 커진 내부의 골칫거리는 슬그머니 경찰에 그의 죄상을 밀고해서 경찰이 죽이도록 한다. 슬기로운 야쿠자 생활이다. 손도 안 대고 시원하게 코 푼다. 차도살인이 36가지 병법 중에서도 상책上策으로 꼽히는 이유다.

모두가 ‘차도살인’을 희망하지만 ‘하얀 사신’과 같은 야쿠자 보스가 아닌 일반인들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인들에게 남의 칼을 빌릴 수 있는 곳은 경찰과 검찰밖에 없다. 검경이 칼을 독점한다. 일단 검경이 칼을 들고 나서면 칼 보관ㆍ소지 자체가 금지된 일반인들로서는 감당이 안 된다. 검경의 칼을 빌릴 길이 막혀버린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직접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보지만 그 자체가 불법이다.

야쿠자만이 ‘차도살인’을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인들도 애용하는 듯하다. 모든 정치인이 자신들이 법을 만드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잊은 듯 모든 정치적 사건을 검찰로 가져간다. 검찰의 칼을 빌려 정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칼을 빌릴 곳은 그곳밖에 없다. 어떤 당에서 미운 털이 박힌 젊은 당대표는 석연치 않은 루트로 ‘성상납’이 고발돼 당에서 축출되기도 한다.

경찰과 검찰은 권력자에게만 칼을 빌려주기로 작심한 듯 보이기도 한다. 칼을 독점하는 곳에서 ‘가까운 놈’ ‘있는 놈’에게만 칼을 빌려주면 곤란해진다. 정말 이들이 ‘정의의 사도’들인지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한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눈을 가린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모든 나라의 법무부나 대법원에는 빠짐없이 정의의 여신 디케가 자리잡고 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고려하지 않고 정의와 불의의 무게를 정확히 측정해서 엄정하게 벌을 내리겠다는 의지의 상징이다. 실제로 미국 세인트루이스 지방재판소 베크(Beck) 판사는 14년 동안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재판에 임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은 협상하고 타협해야 할 정치문제를 검찰과 법원으로 가져가고, 법조인들은 법대로 처리할 문제를 이리저리 눈치 보고 타협해가면서 정무적으로 판단하고 정치적으로 풀어가는 기묘한 세상이다. 사실상 상극(相剋)이어야 할 법과 정치가 한데 뒤섞여버린 꼴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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