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홍진의 손자, 고만첨(1672~1730) ‘(고홍진의) 손자인 만첨(萬瞻)은 자가 사앙(士昻)이고 어릴 때 이름은 만추(萬秋)다. 김춘택(金春澤)을 사사했고 글짓기를 잘하여 산남의 훌륭한 선비라는 칭찬을 들었다. 산남이라 한 것은 만첨의 집이 정의현에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 32년 병술(1706)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정랑(禮曺正郞;정5품)에 이르렀고, 해남군수과 평해현감을 역임했다.’ ▲ 고만첨 묘의 비석 심재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나오는 고만첨에 관한 내용은 그의 조부인 고홍진의 기사 안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당대 아무리 이름을 날린 인물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버리는 것은 당연지사. 만첨 또한 그러했다. 지난주에 소개했던 오정빈과 마찬가지로 김진구와 그의 아들 김춘택에게 배우고 제주섬에서 당당히 문과 전시에 합격하였으니 당대에는 제주 섬 안에 그 이름이 자자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만첨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는 극히 드믈다. 필자 또한 근래에야 알게 되었으니…. 고만첨을 떠올릴 때면, 그의 무덤이 떠오른다. 고색창연한 빗돌과 그 표면에 새겨진 자잘한 글씨의 예스러움은 어제 본 듯 기억에
제주 삼절의 하나, 고홍진. 풍수로 유명했던 그에게 어느 날 정의고을[旌義縣]에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자리를 봐주십시오.” 예사롭지 않은 풍모의 그 청년에게 고홍진은 이렇게 답한다. “자네가 우리 딸아이와 혼인하면 좋은 자리를 봐주겠네.” 당대의 풍수가가 봐주는 산자리라도 인륜지중대사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젊은이는 그날로 집으로 돌아가 여차한 사정을 말했고, 집안어른들이 모여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은, “마당에 빙애기 다올릴 정도만 되민 혼인해라." 과년한 딸이 이런저런 이유로 혼사를 올리지 못하자 내심 근심하고 있던 고홍진의 눈에 정의고을의 총명한 젊은 선비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혼인은 이루어졌고 고홍진은 약속한 대로 산자리를 점지한다. 산자리를 잘 쓴 덕분일까, 고홍진의 따님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그가 정의고을 최초의 문과 급제자 오정빈(吳廷賓:1663~1711)이다. 고홍진을 찾아간 젊은이는 바로 오정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오정빈은 제주에 귀양 온 김진구(金鎭龜:1651∼1704)에게서 글을 배우고, 아버지에 이어 제주에 귀양 온 김진구
제주삼절 고홍진(高弘進:1602~1682), 문영후(文榮後:1629~1684), 진국태(秦國泰:1680~1745) 제주의 풍광을 대표하는 말로 영주십경이 있다. 해가 뜨고 짐에 성산일출과 사봉낙조가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영구춘화 정방하폭 귤림추색 녹담만설을 배당하고, 산과 바다에 영실기암 고수목마 산방굴사 산포조어를 두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 일년의 사계절, 제주의 고유한 풍광을 하나씩 뽑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영주십경은 일반에게 잘 알려진 꽤 익숙한 숙어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물을 이렇게 묶어 부르는 경우는 없는가? 있다. 바로 제주 삼절로 불리는 사람으로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각각의 분야에서 이름을 후세에까지 떨쳤으니 풍수로는 고홍진(高弘進:1602~1682), 점술로는 문영후(文榮後:1629~1684), 의술로는 진국태(秦國泰:1680~1745)를 일컫게 되었으니 제주에서 삼절은 이들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심재 김석익은 제주 삼절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홍진 ‘고홍진은 제주사람이다. 선조 35년(1602)에 태어났다. 김진용(金晉鎔)과 함께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배웠는데 동료들에게서
명도암선생 김진용(1605~1663) 김진용(1605~1663)은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글을 배워 문장으로 크게 이름 난, 조선 중기 제주의 석학이다. 그는 경서에 밝고 행의(行誼)가 깨끗하였는데 1635년(인조 13년) 진사시에 합격, 1643년 숙녕전(肅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후생을 가르치기로 마음먹고 이를 사양, 제주로 귀향하여 제주 삼읍의 어린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이로 인해 제주의 유학은 크게 흥성하게 되었다. ▲ 명도암 선생 김진용의 집터에서 바라본 사라봉과 바다 향토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으로 알고 있는 두 가지, 김진용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제주의 지명이 둘 있다. 하나는 그가 살던 마을인 명도암(明道菴), 또 다른 하나는 오현단이 그것이다. 김진용은 원래 구좌읍 한동리 출신으로, 명도암은 혼인을 하면서 옮겨 살게 된 처가마을이다. 지금은 본래의 이름 명도암보다 ‘조선시대 때 큰 학자 명도암선생이 살았던 마을’인 명도암으로 일반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오현단은 원래 귤림서원이 있던 자리다. 그곳에 귤림서원이 들어서게 일을 성사시킨 장본인이 바로 명도암선생 김진용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1550∼1632) 조선시대 이전부터 말은 교통과 군사상의 목적으로 다른 가축과는 달리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탐라가 원에 복속되어 목축이 성행해진 이래 제주는 국력의 상징인 말을 생산해 내는 주요 지역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감목관을 목사가 겸할 만큼 목장의 관리는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다. 이런 감목관의 자리가 조선 중기에 오면서 경주 김씨에 의해 3백여 년간 세습되기에 이른다. “정의현(旌義縣)의 김만일이 젊었을 때 어느 날 제주성을 향하여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숲 속에서 수말 한 마리가 울면서 그를 따라오기에, 만일은 그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말이 하룻밤을 지내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던 몇 달 후 사라졌던 그 말이 암말 8십여 마리를 거느리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해마다 새끼를 낳았는데 3~4년 사이에 1천 마리가 넘어 산야에 말들이 그득하게 되었다. 산마(山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조선조 헌마공신 김만일의 묘역과 문인석.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다. 제주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 김씨에게 세습되던
충암의 제자...문세걸(文世傑:1487~1521). 오현(五賢)의 한 분인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의 제자로 34세에 요절한 인물, 문세걸(文世傑:1487~1521). 충암은 그를 탐라의 호걸[耽羅之傑]이라 일컬으며 애도시(哀悼詩)를 남겼으니, 심재의 탐라인물고에 전해지는 충암의 시를 통해 그의 사람됨을 가늠해볼 따름이다. 심재는 문세걸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세걸의 자는 사호(士豪), 왕자 창우(昌祐)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활달하고 …(원문 3자 삭제). 34세에 세상을 떠났다. 충암 김정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술 깨고 그대를 생각하니 / 눈앞에 떠오르는 그대의 모습 / 백 년 인생 그 의미 어찌 알리 / 급히 지은 기장밥은 다 익었고 / 두다 만 바둑은 그대로인데 / 누가 와서 바둑판을 정리할거며 / 술 모임 어찌 없으리오만 / 마음을 붙일 곳 정녕 아닐세 / 기개는 귀신도 물리칠만하여 / 만나는 사람들은 허리 굽혔지만 / 순박한 기질로 밭을 일구니 / 가슴을 터놓을 상대였는데 / 그대는 지금 저 세상에서 / 어디에다 마음을 열어두었나 / 탐라에 있던 이
조선초 제주교육의 기틀을 다진 김양필 유교국가인 조선의 건국원년(1392)에 제주향교가 세워졌다. 조선의 흥망과 함께 그 성쇠를 같이 하였던 제주향교. 그 흥망의 세월 속에 제주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제주향교의 교수(敎授)가 된, 현 제주시 영평동 출신의 김양필이 있었다. 심재는 김양필(金良弼:생몰년 미상)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김양필의 본관은 경주이다. 문장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써서 충암(冲菴) 김정(金淨)이 일찍이 -원문에 5자 삭제-라고 일컬었다. 중종 때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본주(제주)의 교수(敎授;종6품)로 임명되어 주자(朱子)의 백록동강규(白鹿洞講規)를 모범으로 삼아 후진을 권면(勸勉)하고 장려하였다. 1536년(중종 31)에 목사 심연원(沈連源)을 도와 (제주 남성 안에) 향학당(鄕學堂)을 새로 짓고 제주향교를 수리하였는데, 모두에 지화(指畵;내력을 밝힌 記文을 뜻함인 듯)가 있다. 명륜당(明倫堂)의 게판(揭板) 위에 다음의 율시 1수가 있다. 유학이 기울까 그 누가 걱정할까(誰憂斯學向頹傾) 공부할 학교가 새로 다시 지어졌다네(致使黌堂得再成) 촉군(蜀郡)엔 문자(文子)의
귀머거리 시인...고순 귀가 먹었다고 가슴마저 막혀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시끄럽고 탁한 소음이 차단되어 맑은 정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슴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머리로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에. 심재는 고순(高淳)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순의 자(字)는 희지(熙之) ․ 태진(太眞) ․ 진진(眞眞)이며 중추(中樞) 득중(得中)의 아들로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배우기를 좋아했다. 귀머거리 병이 있어 사람들이 땅에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써서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무술년(성종 9년;1478)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조칙(詔勅:임금의 명령)에 응해 시정(時政)을 논하는 글을 올렸다가 ‘망령되다’[妄]는 이름을 얻었다. 혹자가 이를 고하니 공이 이를 기쁘게 여기며 망인[妄人]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공이 신영희<辛永禧;1442(세종 24)∼1511(중종 6): 김종직의 제자로 당대 학덕과 문장으로 뛰어남>를 처음 본 것은 여러 선비들 가운데에서였다. 여러 선비들이 서
고득종의 네 아들...태필 ․ 태정 ․ 태보 ․ 태익 “성 남쪽에 버려진 터가 하나 있는데, 옛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현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고득종의 옛터입니다. 고 판윤의 두 아들도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높이 되었기에 본디 이름난 터라고 불렸습니다.” 훗날 명도암선생(明道菴先生)으로 불려진 제주의 선비 김진용(金晉鎔)이 당시의 목사 이괴(李襘:1658.4~1660.5재임)에게 학사(學舍)를 짓되 고득종의 집터에다 세울 것을 권유하며 한 말이다. 심재는 고득종의 네 아들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태필(高台弼)은 판서 득종(得宗)의 아들이다. 세종 때에 부모의 덕[蔭仕]으로 현감이 되었다. 문종 신미년(1451), (전라도) 광양의 원님[倅]으로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 이후로 한성좌윤(漢城左尹;종2품), 전라감사(全羅監司;종2품), 개성유수(開城留守;종2품),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지중추(知中樞;종2품)로 자리를 옮겼다. 세조 정해년(1467) 때 나라에서 건주(建州)의 여진족 추장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였다. 공은 이조참판
오현단의 옛 주인-영곡 고득종 고려에 고조기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고득종(1389~1460; 우왕14~세조6)이 있었다.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나 제주성안, 지금의 오현단 바로 앞쪽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고득종. 비록 탐라 성주족의 후손이었다고는 하지만 탐라국의 유민(遺民)에 불과했던 그는 정승 황희와 안평대군 등과 교유하며 결국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이라는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심재는 고득종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득종(高得宗)의 자(字)는 자부(子傅), 호는 영곡(靈谷), 고려 상호군(上護軍) 봉지(鳳智)의 아들이다. 태종 때에 선대(先代)의 은덕으로 사온서(司醞署)의 영(令;종5품)이 되었는데, 부친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오년(1414)에 (조정으로) 들어가 의영고(義盈庫) 직장(直長;종7품)이 되었다. 이 해 가을 대책(對策;정치 또는 경의(經義)에 관한 문제를 내어 답안을 쓰게 하는 과거시험)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청관(淸官)과 현직(顯職)에서 두루 (명성을) 날렸다. 세종 병오년(1426)에 직학(直學;성균관의 정9품)을 경유하여 중시(
고신걸과 마지막 성주 고봉례 탐라 토착세력의 제1인자였던 성주(星主). 고려에 딸린 변방의 조그만 섬나라[附庸]로 모질게 견뎌왔던 탐라국의 역사도 고려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해야 했다. 탐라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성주와 왕자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뀐 세상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작호(爵號)만을 차고 있다가는 조선의 왕에게 왕을 참칭(僭稱)한다는 역모죄로 참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심재는 고신걸과 고봉례에 대해 「탐라인물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신걸의 초명은 보개(寶開)이며 탐라 성주다. 우왕(禑王) 원년(1376) 11월에 이 지방사람 차현유(車玄有)와 내성(內成) 등이 난을 일으켜 관청을 불사르고 지방관을 죽였다. 신걸이 왕자 문신보(文臣輔), 진무(鎭撫) 임언(林彦),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과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모의하다 적당들에게 발각되었다. (적당들이) 이들을 포위하기를 여러 날에 걸쳐 가축을 모두 죽임에 신걸은 간신히 몸을 빠져 나와 마침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다음해에는 600여 척의 왜적의 배가 (섬의) 주위를 빙빙 돌다 쳐들어오니 신걸이 마음을 다해 이를 막아내었다. 화살에 맞으면서도 기운을 떨
문씨 가문의 왕자들 - 문창우 ․ 문공제 ․ 문신보 ․ 문충세 신라가 한창 번성하던 때에 삼신인(三神人)의 맏이인 고을라의 15대 손 고청(高淸)이 신라의 왕에게 받아 세습되던 왕자의 작위가 고려에 와서 문씨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탐라의 토착세력으로 성주(星主)와 함께 최고위층에 속했던 왕자(王子). 아래의 이야기는 이 중 문씨 왕자에 대한 이야기다. 심재는「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공제는 왕자 창우(昌祐)의 아들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전라의) 보성군(寶城郡)에 있던 (중국의) 복성현(福城縣) 사람이 (탐라로 건너) 와서 고씨(高氏)에게 의탁하니 자손이 번성하였다. 창우 때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顯達)하니 왕자의 작위를 세습하기 시작하였다. (창우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원나라 조정(탐라가 원의 직할령이 되었을 때)에서 총관(摠官)과 안무사(安撫使)를 지냈다. 충렬왕 20년(1294)에 창우가 성주 고인단과 함께 원나라 조정에 탐라를 본국에 되돌려 줄 것을 청하였다. 탐라가 삼별초란 이후로 원나라에 핍박되어 예속된 까닭이다. 왕이 이를 듣고는 붉은색의 혁대[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