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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걸과 고봉례...마지막 성주와 그의 아버지

 고신걸과 마지막 성주 고봉례

 


 

 탐라 토착세력의 제1인자였던 성주(星主). 고려에 딸린 변방의 조그만 섬나라[附庸]로 모질게 견뎌왔던 탐라국의 역사도 고려의 패망과 함께 종말을 고해야 했다. 탐라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성주와 왕자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뀐 세상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작호(爵號)만을 차고 있다가는 조선의 왕에게 왕을 참칭(僭稱)한다는 역모죄로 참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심재는 고신걸과 고봉례에 대해 「탐라인물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신걸의 초명은 보개(寶開)이며 탐라 성주다. 우왕(禑王) 원년(1376) 11월에 이 지방사람 차현유(車玄有)와 내성(內成) 등이 난을 일으켜 관청을 불사르고 지방관을 죽였다. 신걸이 왕자 문신보(文臣輔), 진무(鎭撫) 임언(林彦),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과 군사를 일으켜 토벌할 것을 모의하다 적당들에게 발각되었다. (적당들이) 이들을 포위하기를 여러 날에 걸쳐 가축을 모두 죽임에 신걸은 간신히 몸을 빠져 나와 마침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다음해에는 600여 척의 왜적의 배가 (섬의) 주위를 빙빙 돌다 쳐들어오니 신걸이 마음을 다해 이를 막아내었다. 화살에 맞으면서도 기운을 떨쳐 더욱 씩씩하게 진격해 나아가 크게 격파하니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기쁘게 여겨 특별히 호조전서(戶曹典書;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우왕 10년(1385)에는 붉은 혁대와 자줏빛 도포와 수레에 사용하는 일산과 활과 화살, 옷감의 겉감과 안감, 술을 내렸다. 우왕 12년(1387)에는 전의부정(典醫副正;종4품) 이행(李行)과 대호군(大護軍:종3품) 진여의(陳汝義)를 보내와 그의 아들을 불러 (왕의 뜻을) 보였다. (이에)  다음해 4월, 신걸이 아들 봉례(鳳禮) 등을 보내어 조정에 들게 하니, 조정에서는 봉례에게 군기소윤(軍器少尹;종4품)의 직을 하사하였다. 14년(1389) 9월 봉례는 축마사(畜馬使) 겸 안무별감(安撫別監)으로 왕경에서 돌아왔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 2년(1402) 10월에 봉례가 왕자 문충세와 함께 조정에 들어가 (작위를 버리고)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기를 청하니 비로소 성주의 작위를 내리고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삼았다."-원문, 심재집2, p.397

 


 

 고봉례를 마지막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태위태하게 지탱해 온  탐라왕국은 결국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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