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시인...고순
귀가 먹었다고 가슴마저 막혀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의 시끄럽고 탁한 소음이 차단되어 맑은 정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슴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머리로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에.
심재는 고순(高淳)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순의 자(字)는 희지(熙之) ․ 태진(太眞) ․ 진진(眞眞)이며 중추(中樞) 득중(得中)의 아들로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배우기를 좋아했다. 귀머거리 병이 있어 사람들이 땅에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써서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무술년(성종 9년;1478)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조칙(詔勅:임금의 명령)에 응해 시정(時政)을 논하는 글을 올렸다가 ‘망령되다’[妄]는 이름을 얻었다. 혹자가 이를 고하니 공이 이를 기쁘게 여기며 망인[妄人]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공이 신영희<辛永禧;1442(세종 24)∼1511(중종 6): 김종직의 제자로 당대 학덕과 문장으로 뛰어남>를 처음 본 것은 여러 선비들 가운데에서였다. 여러 선비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데 자신만만들 하였다. 공이 작은 종이에 절구 한 수를 써서 말하기를, ‘작은 누각에 봄바람 불어(小閣春風靜) / 담박한 맛 넘쳐 나지만(淡淡摠有餘) / 귀머거리 사람인지라(聾人無一味) / 머리 숙여 책이나 보네(垂首獨看書)’. 영희가 이를 기쁘게 여기며 그 시에 화답하여 말하기를, ‘세상의 소리는 괄괄(世聲聒溷濁) / 악취는 코에 넘치니(糞壤嗟鼻餘) / 그대가 부러웁그려(羨君勝房老) / 낮에도 책에 묻히니(晝隱千卷書)’. 이때부터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라 여겨 사귀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묘 곁에서 거상(居喪)의 예를 지켰다. 하루는 시를 읊다 잠이 들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속에서 시 한 수를 주면서 말하기를, ‘하얘진 머리털에 창백해진 얼굴로(華髮蒼顔減昔年) / 혼자서 쓸쓸이 묘자리를 지키는구나(孤身寂寂守山前) / 백골이라 생각과 감정 없다 하지 마라(莫言白骨無知感) / 네 읊는 소리 듣고 내 잠들지 못한다(聞汝吟詩我不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단종 2)∼1492(성종 23):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 일찍이 그의 시집에 서문을 쓰면서 간략히 말하기를, ‘천지에 있어 하나의 기운[一氣]은 이르러 펴지고, 흩어져 돌아가는데, 그 실체는 하나일 뿐이다. 사람이 죽은 후에 그 기는 각각 자손의 몸에 나뉘어 있게 된다. 자손에게 움직임이 있으면 신명(神明)에게 느낌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록 그렇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마음이 발라져 오직 맑아져서야만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부모님을 뵙는 듯 하게 된다. 그러한 연후에야 부모님이 오르고 내리면서 언제나 곁에 있게 되는 것이다. 고희지(高熙之) 같은 자가 이른바 ‘오직 마음이 맑은 자[惟淸]’라고 할 것이다.’(원문, 심재집 2, 401쪽)
이름자 밑에 심재 김석익은 ‘융희 4년(1910)에 특별히 (정2품인) 자헌대부(資憲大夫) ․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의(孝義).’라 기술해 넣고 있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은거하여 살았다고 전하는 고순이 어째서 사후 400여년이나 지나 ‘특별히’ 정2품에 추증이 되었을까? 사림의 영수인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들과 교류하였기에 가능하였을까? 한 가지 숙제로 남는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