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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삼절...고홍진, 문영후, 진국태

제주삼절

 

 고홍진(高弘進:1602~1682), 문영후(文榮後:1629~1684), 진국태(秦國泰:1680~1745)

 

제주의 풍광을 대표하는 말로 영주십경이 있다. 해가 뜨고 짐에 성산일출과 사봉낙조가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영구춘화 정방하폭 귤림추색 녹담만설을 배당하고, 산과 바다에 영실기암 고수목마 산방굴사 산포조어를 두었다. 하루의 시작과 끝, 일년의 사계절, 제주의 고유한 풍광을 하나씩 뽑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영주십경은 일반에게 잘 알려진 꽤 익숙한 숙어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물을 이렇게 묶어 부르는 경우는 없는가?

 

있다. 바로 제주 삼절로 불리는 사람으로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서 각각의 분야에서 이름을 후세에까지 떨쳤으니 풍수로는 고홍진(高弘進:1602~1682), 점술로는 문영후(文榮後:1629~1684), 의술로는 진국태(秦國泰:1680~1745)를 일컫게 되었으니 제주에서 삼절은 이들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심재 김석익은 제주 삼절에 대해 「탐라인물고」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홍진

 

‘고홍진은 제주사람이다. 선조 35년(1602)에 태어났다. 김진용(金晉鎔)과 함께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배웠는데 동료들에게서 높이 받들어졌다. 널리 배우고 옛것을 익혔으며 겸하여 풍수에 통달했다. 목사 이원진(李元鎭)이 일찍이 본도의 옛 사적을 궁구하여 읍지(탐라지)를 편찬할 때 감수와 교정을 맡겼고, 사실이 간략하고 상세한 것과 지리가 명확한 것은 실로 고홍진이 헤아려 기린 것이었다. 현종 5년(1664)에 벼슬길에 올라 본 고을의 교수(敎授)의 보직을 맡았으며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다가 죽었다. 후세사람들이 공(公)의 풍수와 문영후(文榮後)의 복서(卜筮;점술), 진국태(秦國泰)의 의술과 더불어 삼절(三絶)이라 했다.…’

 

문영후

 

‘문영후는 왕자(王子) 창우(昌祐)의 후손이다. 문예(文藝)가 남보다 뛰어났고, 점치는 일에 더욱 교묘하여 기이하게 많이 맞혔다. 숙종 갑진년(1664)에 어사 윤심(尹深)이 「越裳氏獻白雉賦」로 뽑았고, 과거의 예규에 따라 6품 벼슬을 받았다. 숙종 때 제주 교수(敎授)를 보직 받았다. 옛날 사목(事目:公事에 관하여 정한 관청의 규정 또는 규칙)에 교수가 판관의 윗자리에 앉기 때문에 교수와 판관의 자리다툼이 많았다. 영후는 제주사람으로 도판(道判)에게 관민(官民)의 분수를 말하고, 목사 앞에서 앉을 때에는 스스로 도판의 아래에, 양현감(兩縣監)의 위에서 처신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목사 임홍망(任弘望)이 일찍이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하여 개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후가 그 일을 실제로 주관하여 너그럽고 고르게 하도록 힘써 명목이 없는 세(稅)를 없애니, 백성들은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벼슬은 곡성현감(谷城縣監)을 지내다 죽었고, 묘는 조천리(朝天里:실제로는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집필자 주)에 있다.’

 

진국태

 

‘진국태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월계촌(月溪村:명월리)에 살았으며, 의술이 세상에 떨쳤다. 죽음에 이르러 중국사람이 와서 “의성(醫星)이 동남에 떨어졌으니, 이곳에 명의(名醫)가 죽었으리라.” 하였다. 사람들은 진국태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며 실망했다고 한다.’

 

제주도 입도조 진계백(秦季伯)의 10세손이다. 전설에 따르면, 진국태가 다른 마을로 글공부를 하러 밤에 다니게 되었는데, 여인이 항상 나타나 구슬을 입에 물고 서로 입으로 넘겨주며 놀게 되었다. 여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그대로 했더니 나날이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제자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눈치 챈 훈장은 진국태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범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다시 여인이 나타나 구슬을 주면 그 구슬은 여의주이니, 여의주를 입에 넣거든 바로 삼키고 하늘과 땅과 사람을 쳐다보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여인을 만난 진국태는 구슬을 건네받자 구슬을 삼킨 후 사람만을 보았다. 이 사실을 들은 스승은 “네가 구슬을 삼킬 때 하늘과 땅을 아니 보고 사람만 보았다니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는 되지 않겠지만 사람의 병을 너의 뜻대로 고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신의(神醫)라 일컬어졌을 만큼 의술에 능통했던 진국태는 월계 진좌수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멀리 중국까지 그 명성이 전파되어 중국인들이 처방을 청해오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병에 걸린 사람들이 진국태의 무덤을 찾아가 빌고 있다.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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