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삼절의 하나, 고홍진. 풍수로 유명했던 그에게 어느 날 정의고을[旌義縣]에서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자리를 봐주십시오.” 예사롭지 않은 풍모의 그 청년에게 고홍진은 이렇게 답한다.
“자네가 우리 딸아이와 혼인하면 좋은 자리를 봐주겠네.”
당대의 풍수가가 봐주는 산자리라도 인륜지중대사를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젊은이는 그날로 집으로 돌아가 여차한 사정을 말했고, 집안어른들이 모여 의논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은, “마당에 빙애기 다올릴 정도만 되민 혼인해라."
과년한 딸이 이런저런 이유로 혼사를 올리지 못하자 내심 근심하고 있던 고홍진의 눈에 정의고을의 총명한 젊은 선비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혼인은 이루어졌고 고홍진은 약속한 대로 산자리를 점지한다.
산자리를 잘 쓴 덕분일까, 고홍진의 따님이 아들 하나를 낳으니 그가 정의고을 최초의 문과 급제자 오정빈(吳廷賓:1663~1711)이다. 고홍진을 찾아간 젊은이는 바로 오정빈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오정빈은 제주에 귀양 온 김진구(金鎭龜:1651∼1704)에게서 글을 배우고, 아버지에 이어 제주에 귀양 온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金春澤:1670∼1717)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도덕을 닦으니 이후 군위 오씨 일파는 김만일의 경주김씨와 더불어 한라산 남쪽의 영향력 있는 집안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심재 김석익은 탐라기년에서 오정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정빈의 본관은 군위로 전적(典籍) 고홍진의 외손이다. 북헌 김춘택을 사사하였고, 문장과 덕행을 일찍 이루었다. 숙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술년(1706)에 과거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쳤고, 만경현령(萬頃縣令)에 이르렀다.’
심재의 글에 설명을 덧붙이면, 자는 흥숙(興叔). 호는 조헌(兆軒). 본관은 군위. 서귀토평(吐坪) 출신. 전적 고홍진(高弘進)의 외손으로 대정에 유배 온 집의 신명규(申命圭)에게 배웠고, 다시 제주 성안에 유배 온 김진구(金鎭龜)에게 배워, 1706년(숙종 32) 어사 이해조(李海朝)가 제주에 와서 시취(試取)할 때 고만첨, 정창원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1707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 학록, 학정, 저작, 박사 등을 두루 거쳤다. 그 사이 승정원 가주서를 지내 규모 있고 민첩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어 전적, 승의랑, 예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하고, 1710년 윤7월에 만경현령(萬頃縣令)이 되어 1711년(숙종 37) 1월 관아에서 죽었다. 김춘택은 그와 시로 화답했으며, 조헌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1707년 오정빈이 과거 보러 서울로 갈 때 김춘택이 써준 글[送吳興叔 赴殿試序]이 북헌집에 다음과 같이 남아있어 오정빈의 사람됨과 교류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濟州)는 큰 바다밖에 있어서 풍속이 본래 거칠고 누추하여, 글을 하는 선비들의 풍조는 떨치지 못하였다. 전부터 거듭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선비를 시험보아 시험지를 바치게 하여 그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전시(殿試)에 나아가게 허락하여 대과(大科)를 보게 권장한다. 그러나 그 시험 보는 곳이 한 주(州)에 그치며 비록 과거보러 갈 수 있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간혹 비하를 할 것이다.
나는 말하건대, 한 주(州)는 참으로 한 나라보다는 협소하며, 한 나라라고 해도 천하(天下)보다는 작지 않은가. 더구나 비록 천하의 선비들과 더불어 나아가 뽑히는 것은 반드시 한 때에 그치는 것인 즉, 그는 다만 옛 사람이 비루하다고 여기지 못 할 것은 오직 그 사람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천하라고 반드시 큰 것은 아닐 것이며, 한 주(州)라고 좁은 것은 아닐 것이니, 세상은 참으로 제주과(濟州科)를 구실꺼리로 반드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가 점점 내려오면서 사람의 재주는 더욱 쇠퇴하였음을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알지를 못한다.
잠시 한 나라를 말해 보자. 서울이 있어서 8도(道)의 선비들과 득실(得失)을 다투어 선발된 자라 할지라도 비루함에 이르지 않는 자는 너무나도 드물다. 가령 그 사람이 제주(濟州)에 본적을 옮겨, 어사(御史)의 시험에 나갔을 때, 나는 참으로 그가 과연 우수하게 선발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풍속이 고루하고 문풍이 떨치지 못한 것이 어찌 꼭 제주(濟州)라고 말하겠는가. 혹시 어떤 정말 우수하고 정말 마땅히 선발될 사람이 제주(濟州)에서 나왔다면, 시험 보는 곳이 크다거나 작다거나는 참으로 논할 수 없을 뿐이며, 비록 옛사람을 추앙하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안 된다고 할 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하겠는가. 즉 지금 전시(殿試)를 보러가는 사람인 흥숙(興叔) 오정빈(吳廷賓)일 뿐이다.
나는 제주(濟州)에는 지금 실은 두 번째 도착했다. 흥숙(興叔)은 전후에 곧 욕되게도 함께 서로 지내며, 글에 대한 것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대강 일찍부터 그의 재주를 잘 알고 있다. 흥숙(興叔)의 뜻은 정말 옛사람을 추앙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여, 마침내 그는 기예와 학업을 성취하였다. 지금 서울의 선비들에게 견주어 보더라도 우월한 점이 많고, 혹시라도 못 미치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하물며 흥숙(興叔)이 이른 나이에 이미 서울의 8도(道) 선비들과 기예를 다투어 뛰어났기 때문에 즉시 성균관<上庠>에 올라가 이름이 실로 무성하였다. 오직 그의 어버이가 늙어서 다시는 서울에 유학하지를 못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전국에서 보는 과서에 합격한지 오랬을 것이며, 어찌 기꺼이 이곳에 있으면서 어사(御史)가 내는 시험에 갔겠는가. 오늘날 옛 친구로 남의 재주를 알아주는 사람은 또한 드물다. 나는 서울의 사대부(士大夫)들이 흥숙(興叔)에 대해서 혹시 제주의 급제자라고 하여 비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므로 그 가는 길에 아무런 말이 없을 수 없다. 다만 나는 바야흐로 죄로 욕되게 되어 죽음에 위태스럽지만, 반드시 남에게 믿음을 얻게 하려한다. 그리고 흥숙(興叔)을 아는 사람은 장차 내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을 것이고 비록 그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나의 말에서 거의 혹시라도 사람을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김익수 역, 『북헌집』, 전국문화원연합회 제주도지회, 2005
글=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