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토)

  • 구름많음동두천 22.4℃
  • 구름많음강릉 23.7℃
  • 맑음서울 24.0℃
  • 구름많음대전 24.7℃
  • 구름많음대구 23.5℃
  • 구름조금울산 24.7℃
  • 구름많음광주 25.8℃
  • 구름조금부산 27.9℃
  • 구름조금고창 26.8℃
  • 구름조금제주 27.7℃
  • 구름조금강화 23.1℃
  • 구름많음보은 23.4℃
  • 구름많음금산 24.8℃
  • 구름많음강진군 25.9℃
  • 구름많음경주시 24.7℃
  • 맑음거제 25.1℃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의 거지 (28) 장영덕(張永德), 거지로 분장해 난리를 피하다

장영덕(張永德), 낡은 옷을 입고 때 묻은 얼굴로 분장한 후 도적에게 구걸해 온가족이 소란을 피하다

 

거지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며 코웃음 치는 사인도 있지만 긴급한 상황에서 거지 모양으로 분장하여 재앙을 피해간 사인도 있다. 『송사·장영덕전(張永德傳)』의 기록은 이렇다.

 

장영덕, 자는 포일(抱一), 병주(幷州) 양곡(陽曲) 사람으로 부친 장영(張穎)은 안주(安州) 방어사를 지냈다. 장영덕이 4세 때, 모친 마(馬) 씨가 이혼 당하자 조모가 부양하였다. 계모 유(劉) 씨는 효부로 유명하였다. 시위(侍衛) 관리를 시작한 주조(周祖)는 장영과 가까이 지내며 딸을 장영덕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장영덕이 모친과 함께 송주(宋州)로 처자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도적떼가 도처에서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장영덕은 낡은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흙을 발라서 더럽힌 후 골목길에 머물다가 도적이 나타나면 그들 앞에 나아가 구걸하였다. 상대방은 적선하지도 않고 “이곳은 거지들을 먹여 살리는 비전원(悲田院)이다.”라고 말하며, 소동도 일으키지 않고 떠나갔다. 그렇게 온가족이 재난을 면했다.

 

기지가 뛰어나다 할 밖에. 당시 상황은 ‘거지와 어울리면 조상의 명성을 더럽힌다’는 모욕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시기였다.

 

무훈(武訓), 구걸해 자금을 모아 의학(義學)을 일으키다

 

청나라 도광 18년 10월 19일, 즉 1838년 12월 4일, 산동 당읍(堂邑, 현 요성聊城 서쪽)현 무가장(武家莊)의 가난한 농민 무종우(武宗禹) 집안에서 가문의 일곱 번째 항렬의 아이, 무칠(武七)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구걸하며 자금을 모아 의학1)을 일으킨, 중국근대사상 ‘광세(曠世)기인’이라 불리는 무훈(武訓)이다.

 

무칠은 본래 사림에 속하지 않은 어린 거지였다. 출신은 학자 가문도 아니요 땅 파먹는 농민세가였다. 부모 이외에 시집간 누나 1명, 형 무양(武讓)이 있었다. 무칠이 5살 때, 부친이 죽었고 흉년도 들었다. 나이가 조금 많은 형은 혼자 밖에서 살길을 찾아 나섰다.

 

무칠은 모친 최(崔) 씨와 함께 곳곳으로 구걸하고 다니며 지냈다. 음식을 구걸해 오면 나쁜 것은 골라 자신이 먹었고 좋은 것은 모친에게 주었다. 어떤 때에는 노래를 불러 모친을 기쁘게 해드렸다.

 

거지였으니 공부할 돈이 없었다. 그래도 공부하고자 하는 갈망은 억제할 수 없었다. 구걸할 때에 학당에서 책을 읽는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칠은 저절로 걸음을 멈추어 자리를 뜨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마을 아이들이 등교하거나 하교할 때 부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한참을 뒤따라가곤 하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질책과 혐오가 뒤따랐다.

 

어느 날, 무칠은 갑자기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바람을 억제하지 못하고 학당에 뛰어들어 선생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과는? 계척과 욕설이 날아왔고 학동들의 비웃음만 들었다. 마음에 상처 입은 무칠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모친에게 말했다.

 

“다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저는 왜 학교에 가지 못하나요?”

 

최 씨는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안위하며 말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여 먹을 밥도 없는데 학교에 갈 돈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학교에 가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 법이란다! 불쌍한 녀석, 터무니없는 생각, 다시는 하지 말거라.”

 

어쩔 수 없이 무칠은 매일 타구봉(打狗棒)과 낡은 바구니를 들고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대문을 두드리며 구걸하였다.

 

7세가 됐을 때 모친마저 세상을 뜨자 마음 착한 백모(伯母)가 거두어들여 부양하였다. 백모의 집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까지는 아니었다. 무칠은 2년간 잠시나마 거지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어린이는 천진무구하지 않던가. 무칠은 구걸하러 다니지 않으면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고 여겼다. 9살 때에 무칠은 결국 마음속 갈망을 참지 못하여 대담하게 백모에게 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을 말했다.

 

“책은 가난한 아이가 읽는 게 아니다. 나중에 커서 머슴살이 하면서 먹고 살 생각이나 하거라!”

 

백모의 처참한 대답은 무칠을 다시 절망 속에 빠뜨렸다.

 

공부할 수 없다! 어찌 할 것인가. 그저 모진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거듭 몇 번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겪으니, 의학을 일으켜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강열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허황되다 싶은 망상은 끝내 실현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의학(義學), 청나라 때 정규 지방학교에 접근하긴 어려운 일반 민중을 위하여 설치한 지방의 초급학교다. 지방관의 주도하에 주로 지방 유지들의 출연에 의해 설립됐으므로 의학이라 한다. 강희(康熙) 41년(1702) 숭문문(崇文門) 밖에 설립한 것이 최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아래 전국적으로 세워짐으로써 명나라 말기 이후 쇠퇴해오던 사학(社學)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학과 사학은 행정적으로는 유사하게 취급되었다. 빈한한 학생을 위해 일반 농촌지역에 설립된 의학 말고도, 소수민족 교화를 위한 변방의 의학도 있었다. 지배민족인 만주족의 가난한 계층을 위한 팔기의학(八旗義學)도 있었다. 명청 시기의 사학, 의학에 의해 교육이 지역적, 계층적으로 확대되었다. 의무교육은 아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1명
100%
반대
0명
0%

총 1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2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