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 [제이누리 DB] 한라산 정상을 방문하는 입산객 수를 제한하는 '탐방 예약제'가 내년 1월1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올 가을부터는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제주도는 등반객에 의한 훼손 방지를 위해 한라산 탐방예약제를 본격 시행한다고 28일 밝혔다. 한라산은 단풍철 등 등반 성수기에 성판악 코스의 경우 하루 1000명이 몰리면서 생태 환경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 도는 내년부터 탐방 예약제와 함께 정상 등반인원은 최대 수용능력의 80%로 조정하는 등 앞으로 수용 인원을 최종 확정해 시행하기로 했다. 도는 온라인 시스템으로 등반객을 선착순 선발하고, 적정 인원이 마감되면 더는 접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예약제를 운영할 계획이다. 시행 구간은 한라산 성판악 및 관음사 코스에서 정상까지 구간이다. 백록담 정상까지 갈 수 있는 하루 인원은 성판악 코스 720명, 관음사 코스 426명 등 모두 1146명이다. 도가 지난해 실시한 탐방객 수용 방안 용역 결과, 하루 적정 탐방객은 5개 탐방로를 모두 합해 3145명으로 제시됐다. 물리적 수용 인원을 코스 별로 보면 백록담 정상 304명, 성판악 774명, 관음사
▲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자,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전투다. [사진=연합뉴스] 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다. 나로도에 이르렀다. -무술년 10월 12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 마지막 일기를 남긴 다음날인 10월 18일,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출진합니다.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숱한 전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이 순국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일기는 돌아가시기 48시간도 되기 전에 쓰였을 것입니다. 7년간 이어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 원균이 부임한 후 계책을 도모하던 제승당은 애첩과의 밀회 장소로 전락했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을 중건하고 제승당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하고 나서 이순신이 시행하던 규정을 모두 바꾸고 이순신을 보좌하던 장수와 사졸 등을 다 쫓아버렸다. 특히 이영남(李英男)은 자신이 패전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더욱 미워했다. … 원균은 사랑하는 첩과 운주당에
▲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의 유적계에 당한 왜군은 59척의 배가 침몰하고 6000명이 넘게 전사했다. [사진=연합뉴스]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포위돼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왜선은 조선 수군의 함포에 두들겨 맞아 하나둘씩 박살났습니다. 때마침 해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 쪽에 유리하게 바뀐 데다, 학익진의 날개에 갇혀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서구의 모든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칸나에전투가 1800여년 후에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산도대첩을 외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분들도
▲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 군대는 학인진과 유사한 포위섬멸전을 사용해 대승했다. [사진=연합뉴스] 인터넷에 한산도대첩을 검색하면 진주대첩ㆍ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전투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과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 전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한산도해전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거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투가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과 맞붙었던 ‘칸나에 전투’입니다. 전투에서 압승하기 위해선 포위섬멸전이 가장 좋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군의 주력과 지휘관들을 놓치면, 언제든지 전열을 재정비해서 반격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해 전멸시키는 게 가장 유효한 전술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적을 포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속도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기병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한신의 군대가 항우의 군대를 몇겹으로 포위해서 섬멸했던 초한전의 마지막 전투는 동양의 대표적인 포위
▲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으로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사용했다. [사진=연합뉴스] 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해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고,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지만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돼 사면ㆍ복권됐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고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말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통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격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육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순신의 수군은 피해조차 거의 없는 대승을 이어갔습니다. 일본군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일본은 원래 해전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수송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수군의
▲ 배설은 열두척의 배를 빼돌리고 한산도에 불을 놓았다. 이순신은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8월 15일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됐습니다. 앞서 말했듯 통일된 지휘체계의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로 내정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되기 한달 전인 1593년 7월 15일, 이순신은 한산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한산도 통제영의 건축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순신은 한산도 곳곳으로 진을 옮기며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전라도로 가는 바닷길을 틀어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593년 3월 8일, “한산도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처음으로 「난중일기」에 등장합니다. 이때는 한산도에 시험적인 진을 설치해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개월 뒤인 6월 21일 한산도 망항포로 진을 옮겼습니다. 7월 10일에는 “한산도 끝에 있는 세포로 진을 옮겼다”고 일기에 나옵니다. 7월 14일엔 한산도 두을포로 진을 옮깁니다. 한산도에 지은 정식 통제영으로 진을 옮긴 것입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 통제사에서 해임되고
▲ 한산도는 왜적이 도망가도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곳이 없는 섬이었다. [사진=연합뉴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청구영언」 영조 때 김천택이 유명한 글을 모은 문집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척과 중선 스물네척, 소선 열세척 모두 일흔세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 곤란했습니다.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죽을 것이므로,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 엄습할 기세를 보이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나왔습니다. 그러자 왜적도 따라 나왔습니다. 그때 장수들에게 명령해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일시에 진격해 각각 지자ㆍ현자ㆍ승자 등의 총통을 쏘아 먼저 두세척을 깨뜨리
▲ 병기(兵器)를 씻는다는 뜻의 세병관(洗兵館)은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의 핵심건물이다. [사진=연합뉴스] 최초의 착량묘는 작지만 정갈한 초가집이었습니다. 이후 고종 14년 1877년에 이순신의 10대손인 통제사 이규석이 기와집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이와 함께 호상제라는 건물을 지어 지방민의 자제를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1979년과 1980년에 건물이 추가돼 어엿한 서원 양식을 갖췄습니다. 매년 음력 11월 19일엔 이순신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냅니다. 통영 = 삼도수군 통제영. 가배량주가 통영이 됐지만 정작 이순신은 근무한 적 없는 곳. 세병관(洗兵館)에 간다는 말은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에 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세병관이 통제영의 핵심 건물이었으니까요. 세병관에 가면 조선 최대ㆍ최고 해군시설의 위용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은 1895년에 폐관됐습니다. 그때부터 통제영의 흔적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핵심건물인 세병관은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병관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목조건물 중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세개의 목조건물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국보 제224호인
▲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1606년 강건됐다. 사진은 방문자 명부인 '심원록尋院錄'. [사진=뉴시스] 통영시는 통제영이 있던 도시입니다. 통영시의 일부는 한때 충무시(忠武市)였습니다. 충무시의 충무는 충무공(忠武公)에서 왔습니다. 충무 김밥의 유래도 충무시입니다. 통영 충렬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선조 39년 1606년, 제7대 이운룡 통제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습니다. 현종 4년 1663년에는 남해 충렬사와 함께 사액사당이 됐습니다. 사액사당이란 임금이 ‘현판(額)을 내린(賜)’ 사당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역대 수군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통영 충렬사에는 유물 전시관이 부속돼 있습니다. 충렬사 유물 전시관에 가면 꼭 봐야 할 것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내린 여덟 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 보물 440호이고, 다른 하나는 정조대왕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1질을 충렬사에 내리면서 함께 하사한 어제사제문(御製賜祭文)입니다. 정조대왕은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개혁 군주입니다. 그런 정조대왕이 충무공 이순신
▲ 통영.충무 모두 이순신 시대에 생겨난 단어다. [사진=뉴시스] 익숙한 단어 몇 개를 떠올려 봅니다. 통영, 충무 그리고 충무김밥. 모두가 임진왜란이나 충무공 이순신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400여년 전에 만들어진 단어를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다니, 새삼 신기합니다. 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통제영(三道水軍 統制營)’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원래 이름은 ‘가배량수’였는데 통제영이 세워진 후부터 통영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 통제사였습니다. 삼도(三島)는 충청도ㆍ경상도ㆍ전라도를 뜻하고, 삼도 수군은 충청 수영ㆍ전라 좌수영ㆍ전라 우수영ㆍ경상 좌수영ㆍ경상 우수영을 의미합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각각 우수영과 좌수영이 있었습니다. 충청도에는 충청 수영 하나만 있었죠. 임진왜란 전까지는 삼도의 수군이 독자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조선 수군 전체가 단일한 명령계통 아래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에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 통제사라는 관직을 신설하고 이순신을 초대
▲ 2017년 5월 26일 제주종합경기장에서 제4회 에코랠리 개막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제주도] 국내 대표의 순수 전기차 친환경 이벤트인 에코랠리가 제주의 관광명소를 중심으로 달리는 주행 코스로 열린다. 제주도와 JIBS제주방송은 다음달 5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일원에서 ‘제5회 제주 전기차 에코랠리’를 연다고 25일 밝혔다. 행사 참가 신청은 오는 27일까지 JIBS 홈페이지를 통해 전국 누구나 가능하다. 총 100팀을 모집한다. 올해 대회는 어린이 날인 5월 5일 열려 친환경 전기차를 친근하게 체험하고 에코랠리에 함께 동참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드라이버와 보조드라이버 2명이 한팀을 이뤄 약 100km로 구성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와 해비치리조트 구간을 최소한의 배터리로 왕복 주행하게 된다. 랠리를 진행하는 도중에는 체크 포인트별로 스템프 투어, 포토제닉, 제주 부루마블, 보물찾기, 친환경 운동회 등 다양한 미션 과제와 특별한 경품들이 제공된다. 태양광 자동차 만들기, 내가 주차왕, 에코 모빌리티 체험, 카네 이션 만들기 등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함께 즐길수 있도록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