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기점으로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리며 제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제주섬은 처절하고 처참한 시절을 마딱뜨려야 했던 곳이다. 제주선인들은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목숨 걸고 제주를 탈출하려 했고, 해방 후에도 돌아온 고향을 다시 떠나야 했던 슬픔과 비애가 가득했던 곳이다. 도민 수가 급격히 줄자 1629년(인조 7년)에 제주에는 끔찍한 포고령이 내려진다. 제주선인들의 육지 출입을 금하는 출륙금지령이 그것이다. 탐라순력도를 남긴 이형상 목사는 제주의 상황을 기록한 남환박물(1703)에서 세 고을(제주·정의·대정)의 호구는 9552호, 인구는 남녀 4만3515명이라고 했다. 이 수는 200년 전보다도 줄어든 수이다. 제주선인들은 조세뿐만 아니라 진상품, 군역, 탐관오리들의 수탈, 지방 세력가들의 압력, 왜구의 침입, 식량난까지 겹치면서 하나 둘 고향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줄어들어 여다(女多)의 섬으로 오랫동안 지내야만 했다. 다도해 등 육지로 탈출한 제주사람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제주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조정으로 보내는 특산물의 양이 줄어 들고 제주도를 방어할 군인이 부족하게 되었다. 급기야
▲ 원당봉 이곳은 기황후의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기황후는 고려의 공여(貢女)로 몽고에 갔다가 원나라 순황제의 제2왕후가 된 이다. 그녀가 아들을 얻기 위해 고심할 때 한 승려가, ‘동해 바다 북두의 명맥이 비친 3첩7봉 아래 사찰을 짓고 탑을 세워 기원하라’라는 계시를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황후가 짓게 한 절이 원당사이다. 그녀는 원당봉에 절과 탑을 세워 부처의 공덕으로 아들을 낳아달라고 빌었고, 그 뜻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원당봉 정상 아래의 굼부리에도 절집이 들어서 있다. 그 절집을 둘러싼 능선을 타고, 산책하는 것도 별미이다. 나무들 사이사이로 한라영봉과 오름 군락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장생의 생약이 있으렸다. 원당봉에는 진시황제가 보낸 사자들이 불로초를 찾으러 들렸었다는 전설도 있다. 3첩7봉이 있는 곳에 불로초가 자란 다는 믿음 때문이란다. 하산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선사유적지로 향했다. 제주의 조상들이 살았음직하게 복원된 움막집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로 그 곁에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재현한 전시관도 있다. 삼양동 곳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아주 오래전 탐라선인들
▲ 제주 유일의 고려시대 5층석탑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 나…, 국악가요를 흥얼거리며 달린다. 나의 애마인 싸이클자전거 타고 어디로 갈까? 그래 오늘은 삼양동 주변을 둘러보는 거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스치는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로 달리는 쾌감을 어디에 비하랴. 자전거 타기는 항상 조심을 요한다. 아차하면 쌩쌩 달리는 차량 땜에 넘어질 수도 있기에 가급적 골목길과 오솔길로 다닌다. 안전을 위하고, 숨겨진 비경을 찾기 위함이다. 오솔길로 접어든 나는 이내 삼양초등학교 주변에 닿는다. 옳지, 지석묘가 이곳 어디에 있었지. 저만치 철책 안에 갇힌 돌무덤들이 나를 반긴다. 고인돌은 당시의 부족장의 무덤이 아니던가. (이 글을 다시 쓰는 지금, 택지개발로 옛날의 모습이 사라진 이곳에서 먼저 떠오르는 고사성어는 상전벽해였다.) 삼양동만큼 볼거리가 넘치는 마을도 흔치 않을 거다. 검은모래 해수욕장은 물론, 선사유적지와 유물전시관도 있다. 제주역사의 상흔이 배어 있는 환해장성, 탐라국 시조인 고·양·부 삼성이 활을 쏘아 경계를 정했다는 삼사석지(三射石址)도 있다.
▲ 하귀1리에 있는 고광림박사가족현양비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하귀1리 입구에 세워진 고(故)고광림박사가족현양비(顯揚碑)를 만난다. 마을사람들이 분재가 있는 멋진 비를 고향을 빛낸 고 박사(1920-1989) 가족에게 선사한 것이다. 미국사회에 공헌한 역대 재미 한국인 100인 중 4명이 포함될 만큼 고광림 박사 가족은 미국인들도 부러워하는 가정교육의 산실이다. 6남매 모두를 세계적인 석학으로 키운 자식교육에 대한 비결이 궁금하다. 그 비결은 바로 덕승재의 일상화 속에 숨어 있었다. 고광림·전혜성 부부는 자식들에게 덕승재, 즉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고 평소 가르쳤다. 덕승재란 자식들이 재주만을 믿고 거만해질 것을 미리 경계하라는 고 박사 부부의 교육철학의 별칭이다. 무엇을 잘한다는 것은 재주이다. 하지만 상대가 잘하는 것을 찾아내 상대에게 칭찬하고 지원하는 것은 덕이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덕이 모자라면 그 재주는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용될 것 이다. 그러한 사회는 이기주의가 팽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반면에 재주뿐만 아니라 덕이 넘치는 사회는 관용과 배려하는 마음이 넘치
▲ 소쇄원 필자는 지금 마누라와 둘이서 제주에 산다. 집 떠난 딸 둘은 미국 뉴욕과 시카고에 거주하고, 아들은 장교생활을 막 마치고 백수생활 중이다. 자식 떠난 가정의 쓸쓸함이란. 그 빈자리를 메워주려는 듯 매달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새 보금자리를 찾아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타지에서 삶의 터전을 제주로 옮긴이들이 많듯, 국내는 물론 일본과 미국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제주사람들이 20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다. 여기에서는,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전남 담양 근처의 소쇄원을 세운 양산보와 출퇴근 길에서 현양비를 통해 수시로 만난 고광림 박사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고·양·부 삼성의 후예들을 제주가 아닌 객지에서 만나는 날이면, 어떤 역사적인 일로 그들 조상들은 제주를 떠났을까 하고 궁금해 진다. 남도여행 중 들렸던 소쇄원에서도 나는 제주출신을 객지에서 만나는 기쁨을 얻기도 했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알려진 소쇄원을 가꾼 이는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이다. 본관이 제주인 양산보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 제주마 [제이누리DB] 제주는 말의 고장이다. 말의 성품에는 지각이 있는 듯하다. 마장 마술에서 보듯 동물 중 유일하게 인간과 함께 (하계)올림픽 종목에 참가하는 동물이 말이다. 그만큼 사람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온 동물인 셈이다. 다음은 제주판관을 3년여 지낸 우암 남구명(1661-1719)이 쓴 마설(馬說)의 일부이다. 한라산은 방성(房星)이 주관하도록 나눠진 들이다. 그러므로 말을 길러 늘어나게 하는 것이 익주(冀州: 중국의 말 생산지)의 북쪽에 견줄 수 있다.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완종(宛種)이라고 불리는 것은 원나라 사람이 말을 기를적에 가지고 와서 풀어놓은 완마(宛馬: 西域에서 생산된 말)에게서 씨를 받은 것이다. 용마 또는 용종(龍種)이라고 불리는 것은 진용(眞龍)이 내려와서 암말과 교접하여 새끼를 낳아 길러진 것이다. 특별히 산 위에 떼를 지어 사는 것들을 산마(山馬)라고 하는데 오래도록 깊은 산의 안개와 구름 속에 살며 여러 차례 용과 교접을 가졌으므로 그 종류는 털이 곱슬곱슬하고 색은 얼룩점이 많아서 골격의 모양도 또한 뭇 품종과는 다르다고 한다. 무릇 말의 성품이 자못 지각이 있는 듯하다. 지금 각
▲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7호 제주마. [제이누리DB] 제주마 기록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고려사 사료들을 모았다. 1071년(문종 25년) 섬의 목장에서 말을 기르는데 잘 돌보지 않아서 말을 죽게 한 사람에 대해서는 벌을 주게 하고 관마가 늙었거나 잃어버렸을 때는 공수둔전(公須屯田)의 수입으로 다시 사들이게 했다. 1073년(문종 27년) 11월 팔관회를 열고 왕이 신봉루에 나가서 풍악을 즐겼다. 이튿날 연등대회에는 송나라, 흑수, 말갈, 탐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제각기 예물과 명마를 바쳤다. 1258(고종 45년) 제주에서 공납한 말과 최의가 가르던 호마를 문무 4품 이상의 관원에게 나누어 주었다. 1200년(원종 원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1275년(충렬왕 원년) 사신을 경상도, 전라도에 보내어 여러 섬의 소와 말을 검열토록 했고, 동왕(同王) 14년에는 마축지장 별감을 두었다. 이에 앞서 말을 여러 섬에 놓아길러 번식시켜 그중에서 굳센 것을 상승국(尙乘局)에 보내고 나머지는 여러 왕족과 중신, 문무 관리들에게 보냈는데, 탐라의 말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제주마가 원의 제주 지배 이전
▲ 고수목마로 알려진, 한라산 자락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제주마들. 2014년 갑오년은 청마의 해이다. 갑은 푸른색을, 오는 말을 의미한다. 무리지어 생활하길 좋아하는 말은 인간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하계올림픽 종목에서 동물과 함께 하는 유일한 종목이 마장마술이다. 육십갑자에서 얘기하는 청마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천우속(天雨粟) 마생각(馬生角)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하늘에서 곡식이 쏟아지고 말머리에 뿔이 난다는 뜻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말은, 어쩜 청마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2014년 환갑을 맞은 필자가 수없이 들은 동물은 말이다. 말의 고장인 제주는 생사고락을 다한 후 나의 뼈를 묻으려는 곳이기에, 나와 말과의 관계는 상상속의 벗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영주10경 중 9경인 고수목마를 내세우기도 한다. 한라산 자락 수풀 속에서 뛰노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보는 이들에게 삶의 생동감을 안겨준다. 정부가 제주를 전국 유일의 말산업 특구로 지정한 것은 어쩜 늦었다 싶다. 41면 화폭에 제주의 다양한 풍광이 그려져 있는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도 말이 유독 많이 등장한
1980년대 뿌리가 앙상하게 드러난 채로 근처의 계곡 주변에서 발견된 소나무가 보호 차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2백년 이상 나이를 먹음직한 이 소나무를 신령스러운 소나무란 뜻으로 영송이라 부른다. 이러한 사연으로 탐라교육원 정원 이름도 영송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는 기품 있는 소나무들이 수석과 벗하고 있는데, 다른 소나무들이 서서 자나 이 소나무는 누워 잔다. 그래서 영송을 누운 소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제2횡단도로변과 이곳에 단 2 그루만의 영송이 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한라산 신령이 타고 다니던 사슴이 죽자, 산신은 사슴의 넋을 달래다 그만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렇게 아끼던 사슴이 신령님 옆에 와서 드러눕는 게 아닌가. 반가운 나머지 산신은 사슴의 등을 한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 날 그 자리엔 사슴 대신 한 그루 소나무가 누워있었다. 사슴이 환생한 것으로 여긴 산신은 밤마다 찾아와 사슴을 대하듯 쓰다듬어주었단다. 그래서인지 소나무는 위로 자라는 대신 옆으로 가지를 키워댔다.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자라는 이 소나무를 사슴 소나무라고도 부른다. 명산에 명석 난다는 말처럼 한라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 주변은 돌과
▲ 왼쪽부터 성산일출, 영구춘화 탐라교육원 본관 지하에 있는 영주10경관은 필자에겐 특별한 곳이다. 2001년 그곳에서 교육연구사로 근무하던 시절, 제주의 정체성 교육을 위한 게시환경으로 영주10경을 한시(漢詩)와 함께 제주도 지도에 디자인하여 게시하였다. 영주(瀛洲)는 신선들이 사는 물가라는 의미를 지닌 제주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기도 한 매계 이한우(이한진)는, 제주도 경치 중에서도 빼어난 경관들을 지역적 특색과 자연의 생성이치를 반영하여 ‘영주10경’을 선정하였다. 그가 10경을 선정한 이치가 매우 오묘하고 논리적이다. 해가 뜨고 지니(성산출일·사봉낙조), 사계절이 운행되고(영구춘화·정방하폭·귤림추색·녹담만설),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니(영실기암·산방굴사) 동식물과 사람이 태어나더라(고수목마·산포조어). 자연철학과 제주의 자연미와 우주의 생성이치를 심오하게 담아낸 것이 영주10경인 것이다. 영주10경에 녹아 있는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고 자랑스럽다. 다음은 매계 이한우 선생의 한시(漢詩)인 영주10경 중
▲ 삼성혈 제주도에는 구석기·중석기·신석기에 이르는 문화 층위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을 만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탐라의 역사가 이루어져왔다. 제주는 고인돌의 섬이기도 하다. 가파도에는 무려 40여 기가 있다. 한반도 본토에서 내려오던 석기인들이 더 내려가지 못하고 가파도에서 행로를 멈추고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사 정립의 목표를 내걸고 개최된 ‘탐라사 연구, 어떻게 할 것인가’ 심포지엄에서 제주출신 석학인 신용하 교수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은 바가 있다.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양맥(良貊)족과 부여(夫餘)족 일부가 바닷길로 시차를 두면서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AD 65년에 일어난 한라산 폭발 시 한반도 남해안에서도 밤에는 붉은 기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남해안에서 제주도는 청명한 날은 가시거리 안이므로 민족이동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시기를 조금씩 달리하며 제주도에 도착한 양맥족, 고구려족, 부여족은 각각 그들의 인솔 족장인 을나(乙那)의 지휘 하에 정착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한라산 북쪽 모흥혈에서 회의를 하여 BC 1세기에서
▲ 운명적으로 만난 탐라교육원 전경 탐라교육원에 필자가 첫 출근을 한 것은 1997년 3월이었다. 프랑스어 교사였던 필자에겐 학교와는 사뭇 다른 교육을 펼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던 40대 초반이었다. 파견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후 연구사와 연구관으로 세 번이나 탐라교육원에서 근무하였으니 이만한 만남도 흔치 않을 것이다. 탐라교육원은 수려한 경관을 관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제주 바다가 뒤로는 한라영봉이, 동으로는 제주의 최장 거리를 자랑하는 한천으로 이어지는 탐라계곡이, 서쪽으로는 열안지 오름이 에워 쌓고 있는 명당이다. 학생들이 자연의 품 안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자가 할 일이었다. 수련에 임하는 학생들 더러는 제주가 아닌 탐라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왜 '제주교육원이 아닌 탐라교육원'이냐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들을 듣고 보니, 이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자가 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주는 바다 건너에 있는 고을이고, 탐라는 신라와 같은 왕국이었다. 그래서 한라문화제도 탐라문화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탐라왕국은 BC 2337년 시조 고을라(高乙那)왕이 부족국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