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귤림서원 제주에는 서원으로 귤림서원과 삼성서원 두 곳이 있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 이념에 따른 유교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지금의 경북 영주에 세운 소수서원 설립 이후, 타 지방에는 사학인 서원이 들어섰지만 제주에는 백년이 지나도록 서원이 세워지지 않았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받는 등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서원이 국가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려면 사(祠: 제사기능인 사당)와 재(齋: 교학기능인 교실)를 갖추어야 했다. 1578년(선조 11년) 조인후 판관은 제주에 귀양 왔다가 사사된 충암 김정(1486-1521)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사후 57년 만에 산지천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廟)를 세웠다. 기묘사화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어 간신들의 모함에 제주에서 사사된 충암 김정은, 1년 4개월 동안 지방 유생들을 교학하고, 그의 조카에게 보낸 ‘제주풍토록’은 당시 제주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암은 왕의 자진 명령에 따라 사약을 받고 36세 나이에 제
향교와 서원은 오늘날의 학교에 해당될 것이다. 향교와 서원은 인재 양성과 유교 이념을 보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당시에는 토호세력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보장해 주던 근거지이기도 했다. ▲ 오현단 산책로 너머로 보이는 향현사 향현사는 귤림서원에 있는 지방출신의 이름난 학자를 모신 사당이며, 향사당은 지방자치의 근거지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떠한 과정을 거쳐 제주에 이러한 기관들이 들어섰고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의 부침을 알아보고자 한다. 제주에는 학교가 없어 토관들이 글을 모르고 법제를 알지 못하여 대개 어리석고 방자하여 작폐가 심하므로 교수관을 두어 10세 이상의 토관자제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제주목에는 태조 원년인 1392년에 향교를 세웠다. 이후 조선의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되고, 1읍 1교의 원칙에 따라 현에도 향교가 설립되었다. 향교의 배치구조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 선현의 문묘를 모시는 동·서무 그리고 공부방인 명륜당, 기숙사인 동·서재로 되어 있다. ▲ 제주향교(대성전) 제주향교는 세워질 당시 지금의
다음은 서련 판관 사후 2백 년 즈음에 김녕사굴에 관하여 적은 글로, 1712년(숙종 38년) 제주판관으로 부임한 남구명의 글이다. 5월에 성산에서 돌아오다 처음으로 김녕굴에 들렸다. 굴은 평지에 있는데, 입을 크게 벌린 모양이 마치 도자기 가마 아궁이 같았다. 여럿이 횃불을 들고 속으로 들어가니, 높이가 수십 길이 되고, 크기는 누각을 들일 만 하였다. 열 걸음쯤 가니 서쪽으로 난 굴이 문처럼 좁았는데, 떨려서 더 나갈 수 없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고 크기가 바깥 굴의 배가 되고, 그 깊이는 땅 밑바닥 까지 뚫렸는지 종일을 걸어도 그 끝을 알 수 없습니다. 북쪽으로 뚫린 굴은 바로 바다에 닿는데 조개껍질과 자라와 물고기의 뼈가 높다랗게 쌓여 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굴 안에 쌓인 물고기 뼈와 조개껍질 등이다. 바다도 아닌 동굴 안에 물고기 뼈와 조개껍질이 있음이 의아하다. 어쩌면 이곳은 수만 년 전 빙하기에는 바다였을 것이다. 바다에 잠겼던 이 지역이 간빙기가 되어 육지가 되었을 거라는 과학적 추측을 해본다. 동굴에 있는 어패류와 물고기의 흔적이 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 김녕사굴 우리나라 쳔연기념물 98호인 김녕사굴은 필자가 초등학교 6년 동안이나 소풍 갔었던 곳이다. 김녕사굴은 제주에서 가장 먼저 관광용 동굴로 개발된 곳이자, 한국의 동굴 중에 맨 처음인 1962년 12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굴이다. 김녕사굴이라 불린 과학적인 이유로는, 동굴 형태가 마치 대형 뱀이 살아서 구불구불하게 뻗어 나가는 S자 모양을 띄기 때문이라고 한다. 뱀 닮은 동굴 모양 때문인지 김녕사굴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굴 안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온갖 변괴를 부려 흉년이 들게 하며 주민들을 괴롭혔다. ▲ 탐라순력도 41 화폭 중 김녕관굴 조선시대 제주판관으로 부임해온 청년 서린이 뱀을 물리쳤다는 업적이 김녕굴 입구에 세워진 ‘제주판관서린공사적비(濟州判官瑞麟公事蹟碑)’에 적혀 있어, 뱀굴의 전설을 사실인양 전하고 있다. 김녕사굴의 뱀을 죽인 판관 서련은 실존인물로 무과에 장원급제를 했고, 1513년(중종 8년) 2월에 제주판관으로 부임한 후 2년 만인 1515년 4월 제주에서 숨을 거뒀
판관은 목사를 대신해서 행정과 군사에서 상당 부분의 업무를 담당했다. 그래서 제주성 안에는 판관이 거처하며 정사를 살피던 관아인 이아(貳衙)가 설치되었다. ▲ 관덕정 옆 제주목관아 전경 목사가 근무하는 관아인 상아(上衙)와 구분하여 관아에 버금가는 이아 동헌의 공식명은, 눈썹 밑의 백성들을 살핀다는 의미로 찰미헌(察眉軒)이라 불렸다. 판관이 머 물던 찰미헌은 외대문과 내대문이 설치되는 등 격식을 갖춘 관아였다. ▲ 1912년 일제가 찰미헌을 허물고 신축한 제주자혜의원 본관 건물 전경 1910년 일제는 제주판관이 근무했던 찰미헌을 개조해 제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라 하는 제주자혜의원을 개설했다. 1912년 일제는 병실을 갖추기 위해 옛 제주대학교 일대에 있던 찰미헌을 철거했다. 제주판관의 집무처인 찰미헌에서 근현대식 의료기관이 태동했으나,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관아이다. 찰미헌 터를 지켜온 수령 3백 년 된 녹나무만이 옛 자취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찰미헌터 표석 제주에 목사와 더불어 판관이 파견된 것은 행정단위가 제주목으로 개
▲ 홍종우(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사진) 조선시대 제주라는 특수성으로 목사들은 병마수군절제사와 방어사, 조선 말기에는 판관까지 겸하여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도 유별한 삶을 보여주는 이가 홍종우 목사다. 방선문과 산방굴사 그리고 용연에 마애명이 있는 홍종우 목사는, 19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905년 4월에 면직되어 떠났다. 조선 최초 프랑스 유학생으로 알려진 홍종우는 일본을 거쳐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박물관 연구보조원으로 근무하면서, 심청전 등 고문서들을 불역하고 일어와 중국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유학 후 일본에 도착한 홍종우는 망명객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동경에 온 이일직으로부터 김옥균 암살 제의를 받았다. ▲ 1894년 6월24일 프랑스 르몽드 일뤼스트레에 실린 홍종우 관련 기사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동양과 세계정세를 논하는 한편 중국행을 유도했다. 1894년 3월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홍종우는 권총으로 김옥균을 사살하고, 그의 시신과 함께 조선에 돌아와 홍문관 교리에 특채되었다. 김옥균 암살의
▲ 기건 목사 묘역 여러 선정비에 이름이 적힌 목사는 고을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목민관으로 오래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조천읍 봉수동에 1개 밖에 없는 기건 목사는 언관이자 문관으로 특별한 선정으로 제주 선인들에게 칭송되었다. 한편으론 임금과 신하의 격의 없는 의사 소통 과정에서 우리는 세종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을 것이기에 여 기 소개한다. ▲ 제주목사 안내서 표지 기건은 1443년 12월에서 1445년 12월까지 2년간 제주목사로 재직했다. 세종대왕이 언관인 기건을 제주목사로 제수하자 여러 신하들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좌정언(左正言) 윤면이 아뢰기를, ‘집의(執義) 기건으로 제주목사를 삼았사온데, 언관을 외직에 보하는 것은 전례가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대 고쳐 제소하소서(이하 청고제하소서로 줄임)’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후일의 폐해를 염려하여 그러는 것이니, 이후로는 내가 마땅히 잘 생각하겠다.’ 하였다. 바로 다음 날에도 장령(掌令, 사헌부의 정사품) 조자가 아뢰기를, ‘무릇 언관은 반드시 과실이 있어야 외임에
절해고도 유배의 섬 제주에는 조선시대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재임기간은 보통 500여 일.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됨직한 벼슬 아치인 목사들은 제주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명종실록(1555년)의 한 구절이다. “근래에는 제주목사로 적임자를 가리지 않고 탐오한 자에게 맡기므로 침학(侵虐)을 극도로 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기를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라고 한답니다. 이로 본다면 백성들의 곤궁과 고통을 알 만합니다. 대정현 등의 고을은 현재 남아 있는 백성이 50, 60여 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주는 군사 요충지이기에 주로 무관이 파견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무관 목사들이 문관 목사보다 더욱 혹독한 형장을 자행하였고, 그게 문제가 되어 선조는 ‘방어가 긴요한 곳에 번번이 문관을 보낼 수는 없다 해도 이따금 문관을 차견하여 보내라.’라는 칙지를 내리 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더욱이 화산회토로 된 척박한 토지, 자연재해, 과다수취와 더불어 말 교역 통제에 다른 경제기반 붕괴가 수많은 제주선인들을 출륙유량으로 내 몰았던 것이다. 급기야 1629년 출륙금지령으로 이어지는 원악의 섬 제주에는 제주선인의 원성을 실은
▲ 관덕정 옆 제주목관아 전경 목관아가 복원되지 않았던 시절, 필자가 본 가장 오래되고 품위 있는 유적은 관덕정이었다. 그 후 2000년대 들어 도민들의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지기 시작한 제주목관아지 복원은, 제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다리를 놓은 셈이다. 복원된 제주목관아와 관덕정 주변은 제주에도 소중한 역사문화가 숨 쉬고 있구나 하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 중에는 4·3의 직접 도화선인 1947년 3·1절 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4·3 장두 이덕구의 주검이 효시된 곳 또한 관덕정 주변이었다. 관덕정(觀德亭)은 올바른 심신을 수양하기 위한 연무관으로 덕을 닦는 도장이란 의미를 지닌 곳이다. 관덕정 앞에는 숱한 세월을 건너온 돌하르방 4기가 묵묵히 이곳을 지키고 있으며, 정치·문화의 중심이었던 목관아지 부근은 오랜 세월 제주인의 삶과 역사를 지켜본 문화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광장이기도 하다. 제주목관아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목사가 정사를 살피던 관아를 상아(上衙)라 했다. 반면 판관이 정사를 살피던 관아를 이아(貳衙)라 불렀다. 이아는 목관아에 버금가는 관아라는
한국명으로 임피제인 맥그린치 신부를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9월이었다. 한림공고 교장으로 부임한 필자는 한림읍민들이 추앙하는 인물인 맥 신부에게 부임인사하러 이시돌 목장을 찾았다. 안내 받아 간 신부관에서 턱수염을 기른 외국신부가 우리말로 자기는 말띠라고 소개했다. 나도 말띠인데, 우린 동갑내기가 아닌가. 일년 지기처럼 친해진 신부가 어디론가 전화를 하였다. 그러더니 맥 신부께서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며 자기 일인 양 즐거워했다. 비영리 재단법인인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직을 오랫 동안 수행하다 2011년에 모든 직을 사임하고 지금은 이시돌 목장 외진 곳에서 기거하고 있는 맥 신부는, 학교에 부임하는 교장이 자기를 찾아준 것은 처음이라며 나를 더욱 환대하였다. 두번째로 맥 신부를 만난 것은, ‘교육제주가 만나는 제주인’으로 필자가 맥 신부를 추천하여 인터뷰를 담당한 기자와 동행한 방문 때였다. 1시간 예정이던 인터뷰 시간은 1시간 반을 훌쩍 넘겼고 신부님의 건강을 염려한 이가 가급적 빨리 인터뷰를 마쳐달라고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인터뷰를 마치려 해도 맥 신부께서는 하던 말을 마치고 싶다며 2시간 넘게 교육에 대한 애정을 피력
평소 나는 지역주민과의 교류를 교육활동 활성화 차원에서 중요시하였다. 그런 연유로 한림지역의 적지 않은 단체들과 교류하여 교육기부를 받기도 했다. 한림지역 주민들로부터 추앙받는 외국인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이시돌 목장이다. 한림공원은 순례길에 포함되지 않은 제주의 명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수풀의 중심지로 부각된 한림, 그 이름을 딴 한림공원은 지역을 넘어 제주도의 주요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는 만큼 볼 거리가 많은 공원이다. 근무지였던 한림공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다보니 한림지역을 보고 알 기회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 실행한 것이 ‘우리 지역 바로 알기’ 체험학습이었다. 이를 위해 한림공원 관계자를 찾아가 방문의 취지를 말했다. 공원 측의 배려로 지역의 학생들에게 관람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 제주 한림고등학교 학생들이 2014년 9월 한림공원을 방문했다. [사진=한림공원] 오늘의 한림공원을 일군 송봉규 회장은 지역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 멋진 낙원을 꿈꿨고 그 꿈을 이룬 선각자이기도 하다. 불모의 땅을 초록의 낙원으로, 모래밭을 오늘의 한림공원으로 개척한 그
▲ 억새꽃이 장관인 새별오름의 가을 풍경 제주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의 현장인 애월읍 봉성리에 위치한 새별오름은, 가파른 높이만큼이나 처연한 역사를 묻고 오늘도 등산객들을 품고 있다. 새벨오름·효성악(曉星岳)·신성악(晨星岳, 新星岳) 이라고도 부르며, 많은 사람들에게 들불축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제주에서 자주 회자되는 목호의 난은 고려 후기 공민왕 시절(1352-1374) 제주도에 살았던 목호세력이 주동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제주섬은 1356년부터 몽골족인 목호세력과 고려가 수차례 맞부딪치는 싸움의 현장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개입으로 1374년에 치룬 거대한 전쟁으로 목호세력은 최후를 맞이했고, 제주는 고려에 다시 귀속 되었다. 제주와 몽골의 교류가 이루어진 후, 제주마를 원나라의 말보다 더 선호한다는 평이 나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의 강력한 요구로 제주마를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도 명나라는 고려에 제주의 양마 2000필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관리가 제주에서 말을 취하려 하자, 탐라목장을 관할하던 목호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풀어놓아 기른 말을 명나라에게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