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 유배지인 수성초당. 1843년 어느 날, 추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차를 갖고 초의선사 일행이 제주에 오자, 제주의 제자들도 추사 유배지인 수성초당에 모여 선비다례가 열렸다. 조선 후기 유교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와 불교를 대표하는 초의선사가 차를 통해 종교적·학문적 한계를 뛰어넘는, 교류·화합·공감의 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팽주는 수성초당의 주인인 추사 김정희이며, 팽주 측 선비로는 추사의 제주제자들인 매계 이한우(이한진)·강공규·강도순이다. 손님은 초의선사와 향훈 스님 그리고 소치 허련이며, 그 외 화동과 다동이 곁에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추사 이외의 인물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 초의선사는 추사가 태어난 해인 1786년에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침체되었던 조선 불교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선승(禪僧)이며, 특히 차문화를 중흥시켜 다성(茶聖)으로도 불린다. 그는 불교 이외에도 도교와 유학 등 여러 분야에 능통하였다.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두터운 교분을 쌓는 한편, 추사 김정희를 불교에 귀의케 한 비범한 역량을 발휘하기도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현대는 빠름의 시대이고 편리함의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현대는 느림의 시대이고 차의 시대이기도 하다. 차의 예절이 곧 차례이니, 이는 차를 조상신에게 올린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때 나는 다도 (茶道) 교사이기도 했다. 한라산 중턱 전망 좋은곳에 위치한 탐라교육원에서 중·고생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차를 다려 마시며 예절을 익히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공수자세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살아있는 분에게는 왼손이 오른손 위로, 돌아가신 이에게는 오른손이 왼손 위로 포개어 예를 표한다. 정성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표정에 아이들은 평소에 보지 못한 친구들의 표정을 훔쳐보며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절을 할 적에도 차를 다릴 적에도 여유로운 마음과 정성을 주문하였다. 바쁜 와중에도 여유로움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산중에 있는 탐라교육원에서만큼은 통하듯 했다. 한복을 차려 입고 차를 마시는 아이들은 옛 선비의 길과 풍류도 함께 배우려 했다.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우면서도 의젓하고 정성으로 차를 다리고 상대에게 권하는 표정에서 대견함을 떠올랐다. 당시 학생들과 함께 과
우연의 일치인지 특별한 만남인지 모를 또 하나의 색다른 축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등할망이 지나가는 시각에 학교에서는 개교기념일을 축원하는 고사(告祀)를 지내기 때문이다. 텅 빈 학교에서 축문을 손질하고 있었다. 교정에 나서니 바람이 더욱 거센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정도 강풍이면 뭍을 오가는 도항선도 운행을 멈출 것이다. 낮의 흥겨운 거리축제에서 만난 날씨가 밤이 되어 이렇게 변화하다니. 이 소리는 어쩜 영등할망이 우도를 떠나는 기별일지도 모른다. 목욕재계(沐浴齋戒) 후 학교의 ‘안뜰 갤러리’로 갔더니, 앞서 온 교직원들이 병풍 앞에 상을 차리고 음식을 진설하고 있었다. 바람만이 기별을 전하듯 지나가는 심야 교정. 초헌관인 학교장이 개교기념일에 부치는 축문을 읽어 내려가는 소리만이 우도교육가족의 바람과 함께 바람속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천지대왕님과 저승과 이승을 관장하는 대별왕님과 소별왕님, 제주도와 우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시고 영험한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설문대할망과 이제 제주를 떠나시는 영등할망, 그리고 우도초·중학교와 병설유치원을 살피시는 토지신과 건
섬 속의 섬 우도는 지금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우도점마(牛島點馬)에서 보듯 우도는 말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다 1844년부터 김석린 진사를 비롯한 구좌·조천 출신의 궁민들이 대거 입도하여 밭일과 바다일을 하며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영등할망축제에 나서려는 아이들과 함께 햇볕이 따사하게 내리쬐던 날, 우도학교 초·중학생 70여 명도 저마다 제작한 가면과 탈을 쓰고 영등 길거리 축제에 나섰다. 행렬 맨 앞에는 풍물패가, 그 뒤에 영등할망 대형 조형물과 나란히 깃발을 든 나도 따라갔다. 풍랑으로 외눈박이 거인 섬에 갇힌 한림읍 한수리 뱃사람들을 도와준 죄로 영등할망은 온몸이 찢겨 머리는 소섬, 사지는 한수리, 몸통은 성산으로 떠밀려왔다. 그 후 제주선인들은 할망을 영등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단다. 당나라의 포목장수가 제주로 오다가 비양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는데, 머리는 협재, 몸통은 명월, 손발은 고내·애월에 떠밀려 영등신이 되었다는 설도 전한다. 이런 연유로 영등절에 내리는 비는 영등할망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고,
관광지인 이곳에서조차 이러한 아픔이 생각나는 것은 4·3에 대한 나의 멍에 때문이기도 하다. 제주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듯, 어릴 적 할머니의 눈물과 함께 들어야 했던 이야기들이 내겐 몇 있다. 태평양전쟁과 4·3에게 빼앗긴 백부와 고모, 할아버지와 중부의 사연들…. 마을의 유지였던 할아버지는 낮에는 서북청년단과 경찰을, 밤에는 산사람들을 상전으로 접대해야만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자 할아버지는 제주시내에서 공부하는 작은 아들인 나의 부친이 걱정되어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다음날 고향을 탈출했다는 죄목으로 서청특별중대가 진을 친 지금의 구좌중앙초등학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할아버지 죽음을 지켜본 중부는 4·3의 광풍을 피하려고 마을 외곽 동굴 속에 피신했다가, 산사람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끝내 청년의 삶을 마감하였다. 중부가 목숨을 잃은 곳은 우리 마을회관 옆 공터였다. 모름지기 우리는 역사라는 과수원에서 교훈의 열매를 수확하는 농부이다. 황무지 밭을 개간하여 튼실한 수목을 심은 탐라선인들을 회상한다.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과거에 베인 속살까지 보여주고 현재와 미래의 밭을 개척하려 할 때
어린이날을 맞아 가족과 함께 ‘중문관광단지’를 찾았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시장처럼 그곳에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들러본 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역사 흔적들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람 구경이 더 신나는 모양이다. 이곳 백사장에는 파도에 밀려온 모래들이 쌓여진 모래동산이 있다. 그 모래 둔덕에서 어린이들이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숨을 헐떡이며 미끄럼 타느라 온몸이 모래로 뒤범벅이다. 꼬마들의 손발에 채어 모래가 밑으로 내려오고 또 내려오지만 모래 산의 높이는 낮아지지 않는다. 밤새 바다에서 밀려온 모래들이 사구(砂丘)를 다시 빚어놓기 때문이다. 이곳 백사장 입구에는 일본군이 포를 숨겼던 곳으로 알려진 해안 동굴이 하나 있다. 이러한 인공동굴들은 4·3이 일어나기 4, 5년 전에 일제가 제주선인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뚫어놓은 것이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데 동굴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섬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노역의 늪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 는 처절한 모습을 부질없이 상상해 본다. 패전을 예감한 일제는
법구경에 쓰인 고통에 관한 글 중 원증회고와 애별리고가 유독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 요사이 나는 더욱 배려하고 경청하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려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과 같이 살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전함을 달래려 고향을 자주 찾는다.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자식들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리니, 평소 이별 연습하듯 살라는 교훈으로 삼으라는 금언이 바로 애별리고이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들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고통이 원증회고이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바로 내가 평소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만나는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스트레스가 새로운 질병으로 활개 치는 세상이다. 인생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면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을 만들지 말라. 이것이 원증회고가 주는 교훈이다. 이 글들을 만나기 전에 나는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살고 있다는 허무함과 자괴감을 갖고 있었다. 매사에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정처 없는 세상을 살았다. 나를 에워싼 원망하는 사람들속에는 가장
▲ 필자가 디자인하여 근무지인 중문고 현관에 게시한 영주십경 올(2011년) 9월부터 나는 경관 좋기로 유명한 탐라교육원에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이곳 못지않게 전 근무지인 중문고등학교의 교정도 매일 나를 홀릴 정도로 근사하다. 그 풍경에 반한 나는 학교에서 교단일기를 쓰곤 했는데, 다음은 그중 일부이다. 오늘도 나는 한낮의 땡볕을 피하기 위해 교정 서쪽에 있는 청송원(靑松園)으로 향했다. 청송원은 푸른 소나무를 비롯한 백여 그루의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300여 평의 학교정원이다. 고요한 분위기에 취할 수 있고, 너울대는 나무들의 속삭임을 들 수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다. 2년 전 이곳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무슨 담배꽁초가 그리 많던지. 아이들이 피우고는 버린 꽁초를 줍고 또 주우면서 새내기 교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을 자주 찾게 하자, 나무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소리 바람소리를 듣게 하자, 이곳은 내 사색의 공간이기에 앞서 저들의 놀이터여야 한다. 그러한 바람으로 나무들과 바위들이 산재한 이곳에 산책로를 만들던 우리는 놀라운 것을 보고야 말았다. 공사를 맡은 이들이 잡목과 잡풀을 들
▲재일제주인 1세대들은 해방 전후 학교신축, 마을회관 건립, 도로 포장 등 지역개발사업과 교육사업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의 재일교포 수는 일본귀화 등으로 점차 줄어들어 50만 정도이고, 제주 출신이 9만여 명이라 한다. 전국 인구분포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100분의 1도 안 되는데, 유독 일본에 제주의 후예들이 많은 이유가 궁금하다. 재일제주인 1세들은 학업을 위해 건너간 이도 있겠지만, 일제의 침탈로 더욱 궁핍한 생활을 하던 중 정치사회적 혼란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인들이 꺼리는 유리, 금속, 고무, 방직 공장 등지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었다. 1922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기미가요마루(君大丸)는 제주와 오사카 간의 정기여객선으로, 제주전역 도민을 대상으로 일본이주를 부추기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1923년 도내인구 20만9060 명 대비 재일제주선인은 1만381명, 1927년 21만508명 대비 3만505명, 1934년 18만8400명 대비 5만45명으로 그 수가 급증했다. 이런 영향으로 오사카에 제주촌이 형성되어 2세들을 위한 교육기관들이 들
TS 엘리엇이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읊은 잔인한 달 4월을 맞아, 4·3의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화북 바닷가 마을이었던 곤을동을 다시 찾았다. 별도봉 산책로에서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가다 우연히 만났었던 곳이다. 바다가 앞마당인 이곳에 1949년 1월 국방경 비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주민을 학살하고 집집마다 불을 붙였다. 조상 대대로 7백 년 넘게 살았다던 그 터엔 옛 모습을 간직한 연자 방아와 야트막한 돌담들이 4·3의 비극을 대변해주고 있었고, 해원의 꽃인 양 노란 유채꽃들이 만개하여 넘실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잃어버린 곳인 원동마을을 만난 것은 학생들과 함께 간 수련회의 아침산책에서였다.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자연부락인 이곳에 1948년 11월 제9연대 군인들이 들이 닥쳤다. 그리고 그들은 6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고도 모자라 시신과 함께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인적이 끊어진 마을 터엔 대나무와 팽나무가 숲을 이루며 지난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원동마을 바로 지척에서 승용차들이 내달렸다. 아하, 이곳이 바로 평화로 중간지점이었구나. 이후 출퇴근길에 보는 원동마
▲ 제주밭담 제주 마을 이름에 가장 많이 들어간 단어는? 城(성)이다. 무근성, 고성, 봉성, 금성, 성산, 성읍, 보성, 인성, 안성, 월성부락, 죽성부락 등. 이 마을들의 공통점은 돌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화산섬 제주는 돌무더기와 바람이 많은 척박한 환경이었음에도, 선인들은 돌을 십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밭담, 울담, 축담, 올렛담, 산담, 잣담(성), 원담, 불턱(담), 진성, 환해장성 등 다양한 돌담이 이를 웅변한다. 이러한 돌담들을 보는 재미로 출퇴근길이 즐겁다. 한림읍 귀덕리의 밭담과 성로동의 돌담은 더욱 특이하다. 귀덕리의 옛 이름은 석천촌이다. 돌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촌락이란 의미의 고어에 더 애정이 간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방기념물인 명월진성이 있다. 이 지역은 1270년대에 삼별초에 이어 여몽연합군이, 탐라국을 백 년간 통치한 몽고군이, 목호 진압 차 제주에 온 최영 장군 군대가 상륙하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을묘왜란과 임진왜란을 전후한 일본인들의 노략질과 4·3의 아픈 역사가 배어있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전후하여 제주선인들은 환해장성, 성담, 잣성
▲ 영국 방문 당시 해리포터처럼 하늘을 나는 필자. 2016년 들어 세계를 달군 소식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Brexit)일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영국인들의 국수주의적인 몸부림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전성기의 로마와 지금의 미국은 다인종을 품은 나라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어쩌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조건은 다양성을 품는 격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제주는 지금 이주민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귀농인과 귀촌인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도 이주해온다는 점은 제주의 산업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주민과 정착민의 사회적 갈등이 없진 않지만, 장구한 세월 제주도는 자의타의로 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며 독특한 문화를 일구어 온 용광로 같은 저력의 땅이다. 탐라국의 개벽설화에 의하면 제주에는 애초에 사람이 살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혈에서 삼신인이 시차를 두고 솟아났다. 그들은 땅이 거칠어 주로 수렵을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쪽 바닷가에 오른 목함에는 벽랑국의 세 공주가 송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