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문화상징-해녀 [사진=제주대박물관] 나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귀향했다. 어머니 고향은 산촌 마을인 표선면 가시리이다. 현해탄을 건넌 이후 어머니가 해녀를 처음 본 것은 시집온 후였다. 그러니 해녀의 삶은 그려보지도 못했고 헤엄칠 줄도 모르니 시집살이는 오죽했을까. 반면 나의 장모는 대정골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해녀였다. 삼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물질 덕분이었다. 오래전부터 시행된 잠녀의료보험 덕택에 의료비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서로 다른 삶의 유형을 살아왔으면서도 두 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살림살이 기질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인간은 비극에서 희망을 보고, 위기에서 기회를 얻는다. 우리 마을 해녀들은 거친 밭일과 바닷일을 하며 노래를 통하여 기운을 얻기도 한다. 해녀의 노래 역시 삶의 에너지를 스스로 얻기 위함이고 특히 노젓는 기운으로 바다물질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노래는 더욱 더 힘찬 가락과 기상을 지닌다. 마을 바다 가까이에서 하는 곳물질 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심지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원정물질을 나갔던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누이들.
광해 임금의 제주 첫 기착지인 어등포는 제주 8개의 수군방어소 중 하나가 있었던 포구였다. 제주에서는 일찍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을 마련했다.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는 읍성을 쌓았고, 왜구의 피해가 잦은 화북과 조천 등지에 9진을 쌓아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왜구의 상륙이 예상되는 화북포·조천포·어등포·열운포·서귀포·모슬포·애월포·명월포에는 수군방호소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수군방호소에는 전선 1척, 격군, 사표, 식량 3석을 비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전선과 수군은 1664년(현종 5년)에 제주목사 이익한이 ‘제주는 풍랑이 심해 배를 관리하고 운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백성의 고통이 크다.’라고 건의함에 따라 수군을 없애고 배를 징발하지 않게 되었다. ▲ 참고서적인 김찬흡 은사의 ‘제주 인물대사전’과 ‘제주 향토문화 대사전’의 겉표지 왜구를 감시하고 위급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해
▲ 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에 서 있는 표지석 바다를 유영하던 고기들이 포구로 떠밀려 오를 만큼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포구라는 의미를 담은 어등포는, 광해 임금이 오른 포구로도 유명하다. 광해 임금은 제주도의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상륙했다. 이때 호행별장(護行別將)인 무신 이원로 등 호송하는 그 누구도 광해 임금에게 가는 곳을 말하지 않았으며, 배 위의 사면은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제주에 닿아야 비로소 휘장이 열리고 제주라고 알렸다. 배가 도착해 휘장을 떼고 광해 임금에게 내리기를 청한 뒤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가 깜짝 놀라고는 크게 슬퍼하며,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하였다. 제주목사 민기가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을 것입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가운데 사람이 모두 적국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하니 광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임금으로 있을 당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는 대북파 신
▲ 필자의 고향이자 광해 임금이 제주유배 시 오른 어등포 마을인 행원리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 한때 나는 TV 연속극인 ‘왕의 여자’에 빠져든 적이 있다. 여기에서 왕은 광해군이고, 여자는 개똥이라는 무수리로 훗날 광해군 애첩인 김상궁이다. 왕의 여자에 흠뻑 빠진 것은 사극을 좋아하는 탓도 있지만, 광해군이 우리 마을 포구를 통해 제주에 유배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광해군(光海君) 대신에 광해 임금이라 적는다.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 임금은 인조반정에 의해 허망하게 정권을 내주어야 했던 불운한 군주이지만 매우 영특한 임금이었다. 비운의 임금으로 제주에서 그 생을 마감한 광해 임금은, 아버지 선조(宣祖)와 어머니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1575년에 태어났다. 1608년에 임금에 올라서 1623년까지 15년간 조선을 다스렸다. 이름은 이혼, 본관은 전주이며, 비(妃)는 판윤 유자신의 딸이다. 세자 책봉 문제로 그의 형인 임해군과 갈등을 빚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 향사당 제주목관아에서 남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향사당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필자가 속한 문학단체에서 주최한 시 낭송회에 참석하였다. 복원된 팔삭 지붕과 처마 그리고 마루와 천장이 퍽이나 정겨웠다. 하지만 유감도 있었다. 다음 안내의 글에서 찾아보자. 향사당 안내의 글 향사당은 제주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2회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 (1691년) 절제사 이우항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향사당이라 이름하였다. 정조 21년(1797년) 방어사 유사모는 그 이름을 향사당이라 고쳐 불렀다. 위의 안내문에는 향사당이 3회 등장하는 데, 한자가 다른 향사당이다. 한자로 병기하는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데도, 관에서 그대로 방치한다는 느낌이다. 아래의 글에서 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향사당(鄕射堂)은 봄과 가을에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던 곳이다. 주연을 열어 고을의 당면 과제를 논의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향사당은 지방의
▲ 향현사 제주성지와 오현단을 다시 찾았다. 이번 방문은 향현사, 상현사, 영혜사 사당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여러 문헌을 대할 때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소개되고 있어, 상현사도 있고 영혜사도 있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상현사와 영혜사는 시대에 따라 달리 이름을 붙여 목사들을 모셔 제향하던 중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향현사와 함께 훼철되었다. 이후 향현사는 2007년 지금의 위치에 복원되어, 오현단 터의 주인이기도 한 영곡 고득종과 장수당 건의를 한 명도암 김진용을 모시고 있다. 복원된 향현사(鄕賢祠) 향현사를 세우기 전 이곳 오현단에는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나 충신의 공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들어서 있었다. 이후에 설치된 향현사는 조선시대 이름난 학자나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었다. 그러나 1841년(헌종 7년) 이원조 목사가 주목(州牧)을 지낸 사람은 향현이라 칭할 수 없다고 하여, 상현(象賢)으로 개명하였다. 1848년(헌종 14년) 장인식 목사가 다시 영혜(永惠)라 개명하고, 김정희가 제액(題額)하였다. 다음은 제주성지 내 복원된 향현사 앞에 있는 안내판의 내
▲ 귤림추색(橘林秋色) 제주성지와 제이각 사이 동문시장으로 내려가는 큰길이 있는 이곳 일대에는 귤림서원과 과원이 있었던 곳이다. 이를 알리려 제이각 아래에는 귤림추색, 장수당 등 여러 표지석들이 오래전부터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다. 아래에 그 내용들을 덧붙인다. 귤림추색(橘林秋色): 영주 10경의 하나인 귤림추색으로 알려진 옛 터. 예부터 제주에는 많은 귤이 생산되어 탐라지에 기록 돼 있는 것만도 10여 종에 이른다. 귤은 제주의 진상품으로 유명하였으며 가을에 귤이 진상될 때를 맞추어 감제(柑製)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도내에는 여러 곳에 과원이 조성되었으나 특히 이 일대에는 가장 넓은 과원이 형성되었다. 가을에 귤이 익을 때 이곳 남성(南城)에 올라 바라보면 온 천지가 황금물결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장수당(藏修堂): 장수당은 1659년(효종 10년) 제주목사 이회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집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회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조경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의 업적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후 충암사
▲ 제주성지와 제이각 주변에 있는 돌담의 정겨운 모습 제이각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천연요새인 남수각 절벽 위에 세운 누각이다. 제주성지의 정자 중 하나인 제이각의 복원에서 보듯, 역사적인 유물복원은 후손으로 하여금 유서 깊은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의 계승을 느끼게 한다. 다음은 2015년에 복원된 제이각에 대한 설명문이다. 제이각: 1599년(선조 32년)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읍성 남문 동측 치성 위에 건립하였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 위에서 제주읍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유사시에 왜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대(將臺)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제이각은 남쪽으로 n자 형을 이루고 있는데 남쪽은 적루(敵樓)이고 북쪽은 장대(將臺)의 구조로 되어 있다.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아 이층구조로 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누대이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1555년(명종 10년) 6월 을묘왜변으로 제주읍성이 포
▲ 제주성지의 모습 오현단 주변인 이곳은 귤림서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남수각을 자연해자로 하는 제주성지였다. 탐라시대의 고성 터가 바로 여기일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보면 탐라국 시대의 고성은 북으로는 해안을 끼고, 동성은 산지천 서안을, 서성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아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관덕정이 있는 제주목관아지 주변과 더불어 역사 표지석과 안내판이 많은 곳이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성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교육의 장소이기도 하다. 다음은 제주성지 주변에 세워진 표지석과 안내판의 내용이다. 제주도 기념물인 제주성지 제주목의 치소(治所)를 둘러쌓았던 성터로 오현단 남쪽에 그 일부가 복원되었고, 곳곳에 그 잔해가 남아 있다. 성의 규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둘레 4394자, 높이 11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차례 증축과 퇴축이 있은 후의 둘레는 6120자, 높이가 13자로 각각 불어 나 더욱 높고 견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증축과 퇴축이 이루어진 이유는, 성안에 물이 없어 백성들의 고통이 많았고, 가락천과 산지천이 자주 범람했기 때문이다. 1565년(명종 20년)에 목사 곽흘이 성을 산지천 밖으로 물려 쌓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제주시에서 보낸 필자는 제주성지와 오현단 주변의 길로 등하교를 했다. 최근 복원된 제이각(制夷閣) 주변을 가끔 찾아가곤 한다. 최근에 방문한 귤림서원 옛터에서 만난 충암 김정·동계 정온·청음 김상헌·규암 송인수·우암 송시열 등 5현이 쓴 대표적 시를 원본과 함께 양중해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된 시비를 읽으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충암 김정의 임절사(臨絶辭) 외딴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 되려하니 / 어머님 두고 감이 천륜을 어기었네 / 이 세상을 만나서 나의 목숨 마쳐도 / 구름을 타고 가면 하늘 문에 이르리 / 굴원을 따라 떠돌고도 싶으나 / 기나긴 어두운 밤 언제면 날이 새리 / 빛나던 일편단심 쑥대밭에 묻게 되면 / 당당하고 장하던 뜻을 중도에서 꺾임이니 / 아! 천추만세에 내 슬픔을 알리라 규암 송인수의 고충(孤忠) 외로운 충신이라 / 목숨도 가벼워 / 짧은 노에 맡겨 / 잠겼다 떴다 하였으니 / 해는 저물고 / 제주섬은 먼데 / 혼 부르는 이 마음 더더욱 / 아득하구나 동계 정온의 야음
▲ 삼성혈 1526년(중종 21년) 이수동 목사가 그동안 무격신앙의 성소인 광양당이 있었던 삼성혈에 담장을 쌓고 홍문을 세워 후손들이 춘추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비로서 삼성혈이 성역화되었다. 이어 1698년(숙종 24년) 유한명 목사가 삼성혈 동쪽에 삼을나 묘를 건립하고, 1702년(숙종 28년) 이형상 목사가 삼을나 묘를 가락천 동쪽으로 옮기고 후손들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740년(영조 16년) 안경운 목사가 삼성의 후예 중에 학문이 뛰어난 자를 학생으로 받아들이니, 1785년(정조 9년) 비로소 사액서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1827년(순조 27년) 이행교 목사에 의하여 전사청이, 1848년(헌종 15년)에 장인식 목사에 의하여 숭보당이 건립되었다. 삼성사 역시 1871년(고종 8년)에 훼철되어 삼성이 따로 위패를 봉안하다가, 1890년(고종 27년) 정언 고경준의 진정에 의하여 삼을나 묘가 복구되자 위패도 봉환되었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다른 지방의 서원과 달리 삼성서원은 제주민의 시조인 삼을나를 배향한 곳으로, 이는 제주의 토착세력을 회유하여 제주지방을
서원에는 충절과 학문으로 추앙받는 분을 모셔야 했다. 비록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어도 훗날 복권되어 시호(諡號)를 받은 공이 아니면 안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5년(숙종 1년) 부호군 이선이 제주도를 순무(巡撫)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한 40가지 중 하나로 귤림서원 배향문제가 들어있다. 내용인 즉, 충암 김정·청음 김상헌·동계 정온을 배향함은 마땅하나, 이인 목사가 유림과 상의 없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3현 위에 모셨는데 이는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귤림서원은 본사인 오현사와, 영혜사·향현사 등 2개의 별사와,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수당으로 구성되었다. 집정초기부터 서원을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근원으로 여긴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년)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서원철폐령으로 200년 넘게 유학 및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해왔던 제주의 귤림서원도 폐원되었다. 212년 동안 제주교육의 요람이었던 귤림서원은 1871년 폐원되었다가, 1892년(고종 29년) 제주 유생 김희정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