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상 수고본 중 남환박물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섬에는 지금 개벽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삶의 터전을 제주로 옮긴 이들이 많듯 객지나 타국으로 떠난 제주사람들도 많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제주를 탈출하듯 바다로 떠난 제주선인들의 슬픈 역사를 만나기도 한다. 여러 역사서에 근거해 추정한 인구기록에 의하면, 탐라국 8천 명, 고려 중기 1만 명, 고려 말 5만 명, 조선건국 이후인 1443년엔 6만 4천 명이었다. 1703년(숙종 29년)에는 4만 3천여 명으로 이전보다 줄었다고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은 전한다. 송상과 왜인이 수시로 왕래하던 탐라는 조선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조선술과 항해술은 출륙금지령(1629~1823)으로 쇠퇴해 제주해안에는 쪽배인 테우만이 떠다녔다. 방성(房星)이 비춘다는 제주는 오래전부터 말 키우기에 좋은 자연환경인 반면, 토질은 화산회토로 농사짓기엔 척박한 편이다. 자연히 제주선인들은 농사보다 말 교역에 관심을 더 가졌다. 기록에 의하면 말 교역에 매달린 제주선인들은 밤에 출발해 아침이면 육지에 가서 말을 팔고
지난 세월 몇 신문사의 고정필진으로 참여하여 여러 유형의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중 제주역사문화에 관한 칼럼들을 선정하여 여기에 실는다. ▲ 필자가 조직한 동아리가 펴낸 책자 표지. 흔히 뜻한 바를 이룰 경우 3대의 덕을 잘 쌓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1977년 교직에 입문해 2017년 2월 퇴임하는 내게도 3가지 덕이 쌓이고 있으니, 조상덕.스승덕.제자덕이 그것이다. 특히 요사이는 제자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우도초.중학교 백여 명의 학생 모두에게 선물을 보내온 제자, 우도에 자원한 은사가 자랑스럽다며 난분을 보내준 제자, 건강을 염려해 주는 제자 등. 세월을 나는 화살에도 비유하곤 한다. 교직 초입에 내가 쏘아 올린 교육의 화살은 어디쯤 날고 있을까. 교직생활에서의 나의 교육 과녁은 ‘사제동행이 일상화 된 학교’이다. 변화의 세월이라 화살도 진화해 미사일 수준이 됐나 보다. 화살은 궁사의 마음을 읽고 거리도 시간도 재며 날고 있는 병기이기도 하다. 제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화살이 나를 겨냥하기도 한다.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고, 선생은 있으나 스승은 없다.’라는
▲ 현재의 우도초.중학교 모습. 1915년에 개설된 영명의숙을 모태로 하는 우도초등학교는, 1938년 사립연평심상소학교의 설립으로 근현대 학교로의 기반을 다지고, 해방과 더불어 연평공립국민학교로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아 학교체제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다. 광복 후 우도는 매해 80여 명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을 배출했지만,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9년 연평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에 대한 바람을 일부 만족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공민학교는 특별학제의 일환으로 정규 학교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학교교육 기관으로서의 중학교 설립을 위해 우도선인들은 적극 나섰는데, 특히 고태주 등이 중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함으로써 본격화 되었다. 설립기성회에서는 학교부지 마련을 위한 설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출향민들을 비롯한 재일교포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호소하였다. ▲ 학기별로 개최된 아.나.바.다 장터. 수익금 전액은 우도 노인회에 기부되다. 마을지주들의 후원에 힘입어 토지무상 지원이 이루어지고, 재일 향민들도 뜻을 모아 성금을 마련
▲ 김석진 진사의 훈학터에 복원된 서당. 우도교육은 제주교육과, 제주교육은 국가교육·세계교육과 교류하며 나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우도교육을 더 넓은 시야로 파악하기 위해 제주교육과 연관하여 소개한다. 제주교육은 항을 달리하여 10번째의 항목으로도 소개한다. 서당은 우리나라의 교육역사상 생명이 가장 긴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서는 보편화된 마을학교였다. 이로 미루어 우도에도 1844년 이후 사람들이 거주할 때부터 김석린 진사가 앞장서 설립한 마을서당에서 주민들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김진사가 서당을 짓고 훈학을 한 터에는 최근에 옛 서당 형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1900년 성읍(표선면 가시리) 출신의 한학자 오완철이 우도에 초빙되어 훈학하며 교학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1년 우도의 지명을 연평(演坪)이라 개명했으며 1902년에 건립된 진사김공석린유애 비에 실린 ‘임에게 힘입은 일, 숨소리 그친 듯하니 천추에 길이 빛나리. 아픈 민폐로 실의에 찬 백성에게 독한 세금을 감하도록 애썼으니’의 문장도 그가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1905년 조정에서 우도 출신 고달인에게 효자 완문(完文)과
▲ 우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해장성 제주의 농·어·산촌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정겨운 밭담이다. 특히 우도 밭담과 한림 귀덕리의 일주도로변 밭담은 더욱 눈길을 끈다. 우도 도처에서 만나는 아지자기한 밭들이 주로 외담으로 담을 둘러졌고, 귀덕리의 밭담들은 잣담으로 둘러 있어, 담 모양들이 퍽이나 독특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우도의 경치와 어우러진 올망졸망한 밭담들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져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디에서 보든 제주선인들의 땀방울이 맺힌 밭담과 돌담들은 이젠 영롱한 현무암석의 보물들로 진화하고 있다. 이원진 목사가 쓴 탐라지에는 ‘밭 사이에 경계가 없어, 힘센 자들이 약한 자의 토지를 잠식하기에, 김구(고려시대 제주 판관)가 지역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선을 구분 지으니 지역민들이 편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친 바람으로부터 흙과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밭에서 골라낸 돌들로 밭담을 쌓는 일은 농경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돌담 중 잣백담 또는 머들은 농경문화 이래 밭에서 캐낸 돌들을 성처럼 쌓아올린 담이고, 잣성은
▲ 갈대화석 1999년 5월 천진리 공유수면 조간대 상부인 쇠머리오름 응회환 퇴적층의 최상층에서 10만 년 전에서 수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갈대줄기, 잎과 꽃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발견한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측에서는 ‘이번에 발견된 갈대의 줄기와 꽃과 잎 등은 퇴적하면서 복잡하게 섞인 형태로 수중화산 쇄설성 퇴적층의 층리면에서 다량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나무와 떡갈나무 잎으로 추정되는 화석과 내만(內灣)에 서식하던 해양생물인 갑각류 등이 기어간 흔적인 생물흔적화석도 함께 산출되었다.’라고 밝혔다. 또 쇠머리오름에서 갈대화석이 발견된 것은 우도가 수중폭발로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성산포와 연결된 육지이며, 우도는 성산포와 종달리와 유사한 갈대숲이 내만에 넓게 펼쳐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곳의 화석들은 파도에 의해 훼손되기도 하고 도난에 의해 없어지고 있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 들고 있다. 보존이 시급한 시점이기도 하다. 다음은 우도봉 인근에 있는 표지석의 내용이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갈대화석: 우도의
▲ 방사탑 우도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홍조단괴가 서빈백사 지경에 형성 되어 있다. 이밖에도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유물들이 산재해 있는데, 환해장성과 연대 그리고 방사탑 등이 대표적이다. 우도에 산재 한 비지정 문화재들을 소개한 여러 서적들을 근거로 재구성하여 소개한다. 우도에는 설촌과 더불어 쌓아진 것으로 추정되는 방사탑이 여럿 있다. 투박하지만 우도선인들의 삶이 고수란이 배어있는 모습을 닮은 방사탑들이,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겨져 소개한다. 바다에서 삶을 캐는 어부와 해녀들의 무사안녕을 염원하기 위해 해신당과 포제단 그리고 방사탑 등이 우도 도처에 세워져 있다. 그 중에서도 방사탑들은 주로 바닷가에 위치하여 잡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속은 잡석으로 채워졌다. 특히 영일동의 할망 하르방 방사탑은 제주도 방사탑 중 유일한 사다리꼴로, 평면사각과 정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어 듬직하고 균형미가 돋보인다. 더욱이 이 탑은 도대불(등대) 역할도 하였다. 방사탑들은 마을의 액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워졌다. 마을에서 보아 바깥쪽에 해당하는 해변에는 시체들이 떠올라 옴에 따라, 이를 예방하기 위한
▲ 우암선생문집. 우암 남구명(1661-1719) 판관은 1712년(숙종 38년) 10월부터 1715년 5월 사이 제주판관으로 재임하면서 제주도의 산천과 형승, 풍속과 신앙, 기후와 풍토 등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기록하였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그의 4대 손이 1860년에 목판본 시문집으로 간행한 서책이 우암선생문집이다. 다음 소개하는 시 ‘소섬’은 우암선생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로, 우암이 직접 우도에 건너가 지은 글로 보인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김정의 우도가 등을 읽고, 우도에 방목 중인 말떼들과 주간명월과 동안경굴 등을 둘러보고 쓴 시로 여겨진다. 소섬(牛島) 拏岑一脚走東南 한라산 한 줄기 동남으로 뻗치다가 (나잠일각주동남) 斷入滄溟忽起峰 바다에 들며 끊기더니 홀연 봉우리로 솟구쳤네 (단입창명홀기봉) 龜背草芽浮半沒 거북이 등에 띠풀 지고 뜬 듯 잠긴 듯 (구배초아부반몰) 鵬霄雲日遠還通 넓은 하늘에 구름 태양 멀리 둘려 어울렸네 (붕소운일원환통) 洲平霧鬣千群飮 섬은 평평하고 풀 무성해 말떼 먹일 만하고 (주평무렵천군
충암 김정은 오현(청음 김상헌, 규암 송인수,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중 한 사람이다. 김정은 중종 기묘사화 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어, 간신들의 모함으로 제주에서 사사된 인물이다. 그는 1년 4개월 동안 제주유생들을 교학하고, 그의 조카에게 보낸 ‘제주풍토록’은 당시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암은 제주목에 위리안치되어 우도에 올 수 없는 몸이었으니, 우도에 관한 여러 일화들을 당시 적지 않은 이들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특히 방생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우도 이야기를 듣고 시를 쓴 것이 충암 김정의 ‘우도가’이다. 2006년 발간된 牛島誌에는 현행복 교수가 충암 김정의 우도가를 번역하여 해설까지 실었다. 다음은 우도가에 대한 현 교수의 해설에서 일부 발췌한 글이다. 오백여 년 전에 김정이 남긴 우도가는 우도동굴의 신비로움을 환상적으로 노래한 한 편의 장대한 판타지이다. 고대 동양의 신비로운 신화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드는 시상이야말로 이 시만이 갖는 매력이자 특징이다. 무수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신비로움은 퇴색되지 않은 채 동굴의 현묘한 이치를 늘 우리의 곁에 전하고 있다.
풍류남아 백호 임제(1549-1587)는, 부친인 임진이 제주목사로 재임 당시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기 위하여 제주에 와 약 4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임제가 제주도의 명승지와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쓴 일기체 기행문이 남명소승이다. 남명소승은 1577년 (선조 10년) 11월 3일 출발에서 이듬해 3월 3일 귀경까지의 기행문으로, 존자암(영실 근처에 있는 곳으로 제주 최초의 절이라는 설이 있음)의 실체와 특산물 등 그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우도를 직접 방문하여 우도동굴을 둘러보고 그 감회를 남긴 조선 최초의 선비이다. 김정의 우도가를 통해 우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산포항에서 우도로 올 때 뱃사공이 파도가 세어 도저히 건너가기 위험함을 알려도 임제는 ‘사생(死生)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늘의 굉장한 구경거리는 저버리기 어렵도다.’ 하고 강행했다. 다음은 임제가 쓴 남명소승 중 우도동굴 답사기 전문이다. 사람을 수산방호소(水山防護所)로 보내 배를 대령시키도록 하였다. 우도를 선유(船遊)하기 위함이다. 정의 이 현감이 벌써 기다리고 있다는 기별이 왔다. 성산
▲ 우도전경 우도에는 1844년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우도를 다룬 자료들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한다. - 조선왕조실록 속 우도 세종대왕 당시 제주도안무사인 한승순이 임금께 올린 장계에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정의현 동쪽 우도봉과 대정현 서쪽 죽도(고산 차귀도 혹은 한림 비양도로 추정)는 자고로 왜선이 숨어 정박하여서 가장 요해의 땅이 되옵는데, 우도의 인근에 있는 수산(성산읍 수산)과 죽도의 인근에 있는 서귀 방호소에는 모두 성곽이 없사온데 만일 왜적이 밤을 타고 돌입해오면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사와 응적하기에 형편이 어려우니 형편을 요량하여 성을 쌓게 하시고 적변을 대응하게 하소서.'하니 세종께서 그대로 하라 했다. -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산천조 우도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 등이 조선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기록한 책으로, 중종 시에는 동국여지승람을 보강하여 나온 책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다음은 이 서책의 제주목산천조에 실린 우도에 관련한 내용이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 북해석문에서 맞는 일몰 풍경 우도는 밤이 되어야 평화롭고 더 정감이 간다. 이때를 이용하여 도처로 산책을 나가곤 했다. 특히 여름에는 해수욕장이 여기저기 있어 좋다. 그중에서도 동쪽에 있는 하고수동 산호사 해수욕장과 서쪽의 홍조단괴 해수욕장으로 갔다. 한밤중에 옷 입은 채로 물속으로 들어가 온 몸에 바닷물을 적시곤 했다. 바다에 누워 하늘도 올려다 보고 우도를 생각하곤 했던 시절이 다시 내게 올 수 있을런지. 지미봉의 마을 종달리와 맞보는 서빈백사 지경에는 국가지정 문화재인 홍조단괴 해빈이 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소개한다. ※ 문화재 명칭: 우도 홍조단괴 해빈(지정일: 2004.4.9.) ※ 분야 및 종류: 지형 및 지질일반(고생물, 식물화석, 해안) ※ 문화재 지정면적: 98만1373㎡ (육지부 2만5108, 공유수면 95만6265) ※ 문화재 현황: 제주특별자치도 북쪽 해안에는 대부분 폐사로 이루어진 사빈 또는 사구들이 여러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시 우도의 해빈은 폐사가 아닌 홍조사 또는 홍조단괴로 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우도의 해빈을 이루는 홍조단괴의 직경은 1㎝ 내외부터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