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도봉 2016년 3월 필자 우도초·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교육감과의 불화 때문에 교육국장이 섬으로 간다고 입방아를 찧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여러 언론에서는 신선한 충격(?)이라며 꽤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그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교육감이 펼치고 싶은 철학이 있고, 나 역시 교장으로서 펼치고 싶은 교육철학이 있다. 교육감께서는 교육청에 더 남길 바라지만 임기를 1년 앞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학교현장에 있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문 국장은, 우도를 지원한 이유를 묻자, 향토의 풍물들을 수많은 시로 남긴 조천 출신 김양수(1829- 1887) 선생의 이야기를 꺼냈다. ‘난곡 김양수 선생의 한시에서, 그의 부친인 김석린 진사 이야기를 접했다. 우도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학교가 필요하니 그 분이 조천에서 우도까지 건너갔다. 참 멋진 삶이라고 생각해 저도 그런 삶을 살고자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는 우도에 가게 되어 많이 설렌다.&rs
성산일출봉 근처의 시골식당에서 치루는 친지 결혼 피로연에 어머니와 함께 갔다. 베트남에서 온 색시가 반가운 표정으로 우리가족에게도 인사한다. 요사이 시골총각의 배필로 베트남 여성들이 인기짱이란다. 여필종부 하리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물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새삼스레 묻느냐고 모친은 반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와 천생연분처럼 맺어진 일화들을 잘도 들려 주신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 말씀을 귀 쫑긋 세워 듣는다. 그런 자식이 어머니는 좋은가 보다. 손아래 동생이 어머니 고향인 산촌 마을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어머니에겐 고향하면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4·3이란다. 무장대의 최후 사령관인 이덕구가 고향청년들에게는 꽤나 유명했단다. 그를 따르다보니 많은 청년들이 산에 올랐고 희생자가 많았단다. 일본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해방 이듬해에 외할머니 따라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았다. 우리말과 일본말이 유창한 어머니는 고향에서 4·3을 겪어야 했고, 할아버지와 중부(仲父)를 4·3에게 뺏긴 아버지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 시절의 한 서린
할머니는 100여 년 가까운 세월을 이승과 저승 드나들 듯 살다 가셨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제주의 크고 작은 민란들이 준비되던 1898년에 태어난 할머니는, 제주도 수난사의 축소판처럼 그렇게 사셨다. 두 살 아래인 할아버지와 열네 살에 결혼한 할머니는 국권 뺏긴 조국의 이지러진 역사처럼 모진 삶을 이어가야 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나 큰고모와 큰아버지를 대동아전쟁에 잃었고, 할아버지와 둘째아버지도 ‘4·3’사건에 뺏겨야만 했다. ▲ 고향집 올레의 정겨운 모습 당시의 삶이 그러했을 텐데 누가 가족 잃은 할머니의 상실감과 허망함을 위로라도 했겠는가.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식들을 위해 아픔을 삭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 할머니는 험난한 세월의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어야 했다. 길손이 먹장구름 속을 뚫고 나온 햇살을 반기듯, 할머니는 장손인 나의 탄생에 환호했고, 늦게나마 찾아준 삶의 위안에 기쁜 눈물 흘렸으리라. 젖이 갖 떼인 나를 품안에 재웠고, 휘어진 등에 업고선 자랑스럽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할머니 젖가슴을 만지며 잠을 청하곤 했다. 할머니는 밤에도
▲ 행원리 풍차 마을 어느 곳이든 정들면 고향이다. 필자의 고향집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온 젊은이가 집의 구조를 자기의 솜씨로 리모델링하여 살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건축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와 맺은 임대차 계약서에는 다음의 내용도 들어 있다. 자녀를 낳아 기를 경우 자녀 수 만큼 거주할 연수를 연기할 수 있다. 교육기부하여 학교장의 감사장을 받은 만큼 연수를 연기할 수 있다. 특히 문화가 꽃피는 마을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동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에는 수년을 연기할 수 있다. 이런 계약 이면에는 그 청년에게 고향집을 자기 집처럼 여겨 정 붙이고 살라는 격려와 지원인 셈이다. 고향집은 청년에게 세 없이 5년 이상을 빌려주고 있다. 다음은 지면에 발표했던 필자의 수필들이다. 어느새 고향 마을이 다가온다. 요사이는 더 멀리에서도 잘 보인다. 높다랗고 커다란 풍차들이 돌아가는 곳이 내 고향 마을 행원리이다. 이웃 마을인 월정리 어귀에 있는 초등학교인 모교가 먼저 날 반긴다. 그 시절 ‘월정 까마귀, 행원 까마귀’라고 부르며 우리는 서로를 놀리곤 했었다. 하필 까마귀라하며 서로를 놀렸을까. 제대로 먹지도
▲ 송당리 마을제 [제이누리DB] 제주선인들의 민간신앙은 무속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의인 포제와, 심방이 주도하는 무속식 제의인 당굿이 그것이다. 당굿은 남녀 모두 하나가 되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던 공동의 축제였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유교제법(儒敎祭法)이 보급됨에 따라 남성들이 당굿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포제를 지내게 된다. 포제(酺祭)란 정월과 유월에 지내는 동제로, 이삿제·거릿제·천제·산천제·마을제·포신제 등으로 불린다. 마을 사람들의 불상사 예방, 오곡의 풍성, 농사의 풍년과 축산의 번성, 바다에서의 풍어, 자손의 창성을 위해 포제단에 치성을 드린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쌀을 모은 제물인 성미(誠米)를 올렸으나, 지금은 마을공동자금으로 운영되기도 한다. 본향당제가 낮에 지내는 것에 반하여 포제는 고사와 같이 고요한 한밤중에 제를 지낸다. ▲ 필자의 고향 마을 행원리의 포제단과 포제 유래를 적은 표지석 포제단은 사람과 사물에게 재해를 주는 포신에게, 액을 막고 복을 줄 것을 빌
▲ 한라산신제 조선시대 제주는 무속신앙과 불교가 성행하였던 사회였다. 당굿은 오랜 기간 동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축제였다. 음력 정월에는 마을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신과세제, 음력 2월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제, 한여름에는 우마의 번성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제(마불림제), 9월과 10월에는 1년 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만국대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칠성제, 바다 수호신에게 비는 용왕제, 산신제, 풀무고사제 등 다양한 형태의 굿과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후기 유교정책이 펼쳐지면서 19세기 전후하여 유교식 제사인 포제가 남성중심으로 행해지고, 이때부터 마을제가 여성중심의 당굿과 남성중심의 포제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와흘리이다. 오늘날까지 와흘 본향당에서는 포제를 따로 지내지 않고 당굿으로 마을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제주도에는 350여 곳에서 굿이 행해지고 있으며, 1만8000여 신이 제주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데, 신들의 70% 정도가 여성신이다. 고려시대의 절인 수정사
▲ 구억리 서코지 할망당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이다. 손자의 무슨 말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할망이다. 나의 할머니는 나를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삼으며, 한 많은 세월을 살다 가셨다. 제주에서 할머니는 속내의 어려움과 바람 등 뭐든지 들어주는 대상이다. 그래서 제주에는 신앙의 대상으로 할망당을 모셨고, 집안에 어려움이 있을 때면 수시로 할망당을 찾아가 속내에 있는 사연들을 털어놓곤 했다. 그런 사랑을 받았을 김순이 시인은 할망당을 영혼의 주민센터에 비유하기도 했다. 제주도는 1만8000 신이 살고 있는 신들의 고향이다. 산에는 산신당, 바다에는 해신당, 마을에는 본향당이 있다. 본향당이란 마을마다 있는 신당(神堂)으로, 송당 본향당·와흘 본향당·수산 본향당·월평 다라쿳당 등이 제주도민속자료로 지정된 대표적인 마을 신당이다. 제주신당 조사에 따르면 모두 554곳으로 추산되고 있다. 새로이 할망당을 조성하는 곳도 더러 있을 것이다. 무격신앙의 행위와 문화유산으로서의 자긍심이 혼재된 영혼의 성소로서 할망당을 조성하는 것도 영혼을 살찌게 하는 행위라 여겨진다. 교육청 근무
▲ 고향마을 행원리 본향당(웃당)에 게시된 무신도와 내부모습 고향선인들은 주변을 에워싼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기 위해, 자연신·조상신·토지신·해신 등 많은 신들에게 끊임없이 정성을 드리며 옹골차게 삶을 이어왔다. 마을 설촌 당시부터 선인들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당과 포제단을 마련하여 신성한 장소인 성소로 여기며 제의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생산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어 왔다. 조선시대 이형상 목사에 의해 당이 파괴되고 심방들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고향선인들의 뿌리 깊은 마을제가 미신행위이자 허례허식으로 매도되기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인들은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승되어 온 마을공동체 신앙으로서의 당과 포제를 주민생활 속에 깊숙하게 뿌리내리며 그 명맥을 유지시켜 왔다. 당굿은 오랜 기간 동안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축제였다. 제주의 불교는 애초 무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민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국가종교로서 장려되었던 고려의 불교가, 조선시대에서는 억불정책의 시행으로 무속신
고향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버스정류소의 이름은 금산목이다. 금산목이란 이름의 유래는 조금 높은 곳인 이 동산에 신성한 할망당이 있어, 함부로 다니지 말라는 데서 온 듯하다. 금산목 서쪽은 월정리 해변이고, 그 사이에 있는 모래밭 지경을 일컬어 ‘토롱을 했던 생병터’라 전해진다. 토롱은 시신을 가매장한다는 뜻인 제주어다. 시신을 놓고 고구마를 저장하기 위해 감저눌 눌듯이 주위를 람지로 빙빙 두른 다음, 가운데는 ‘주젱이’를 덮고 나서 손으로 모래를 덮는 방법으로 토롱한 무덤을 생병막(生病幕)이라 하며, 이와 같이 토롱했던 곳을 생병터라 한다. 아무 탈도 없던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전염병인 돌림병으로 죽는 것을 생병이라 했다. 생병터는 주로 콜레라 전염으로 죽은 사람들을 가매장했던 데서 생긴 이름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콜레라를 호연개 또는 호영개라고 불렀다. 1920년 경신년 호역차단 대참사와, 1946년의 호열자 사건 등 도내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콜레라 전염으로 희생자가 많이 생겼었다. 1920년 7월 발생한 대참사는 같은 해 11월까지 도내 환자 수가 1만 명에 육박했고,
▲ 행원리 4.3사건 희생자 위령탑 ③ 리민이 세운 4·3사건 희생자 위령탑 제주 어느 곳에서든 비경 속에 숨겨진 아픔이 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 역사의식이다. 후손들 가슴속에 선조들의 삶과 죽음이 같이 할 때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이 되리라.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 마을에서는 4·3 광풍에 휘날려간 슬픈 영혼들을 기리기 위해 행원리와 월정리의 우회도로인 행원리 1573번지에 ‘사삼사건희생자위령탑’을 세웠다. 4·3 당시 ‘반장·조합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사건’ 등으로 젊은 청년들과 마을 유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행원리 주민들은, 4·3의 비극을 가슴속에 묻었다가 1998년 희생자 93위를 모신 ‘4·3사건 희생자 위령탑’을 제막했다. 이 위령탑은 당시 행원리 사삼유족회(회장 홍승대)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강공천씨가 기부한 2백여 평의 부지 위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위령탑이 제막되던 해부터 매해 4월 3일이면 행원리
▲ 4.3 때 불타버린 팽나무에서 다시 생긴 후손목 4·3 광풍은 우리 마을에도 휘몰아쳤다. 나의 할아버지와 셋아버지도 허무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다. 고향집 한쪽에 굴을 파 조부와 함께 숨었던 5촌 당숙은 당시의 사연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난 경찰은 산사람이 피신한 집이라 여긴 곳에 불을 질러댔다. 아침밥을 짓던 우리가문 장손댁은 얼른 방으로 가 어린 아들을 등 뒤에 숨기고 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비명횡사하였고, 이불속에 숨었던 아들은 지금 80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당시 장손 집에 있던 팽나무 거목이 불에 타 주인과 명을 다했다. 훗날 그 자 리에 새싹이 나와 종손댁의 보호수가 되어, 당시를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팽나무 후손목은 나이가 70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나의 조부 일행이 들은 호루라기 소리는 학살 광풍의 전주곡이었을까. 이후 우리 마을에는 11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조합장·반장 학살 사건과 곱은재우영 학살 사건’ 등이 벌어져 공포의 나날로 이어졌다. 1948년 11월 토벌군인들에 의해 우리 마을의 반장과 가신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한수풀 해녀학교에 세워진 해녀상과 표지석 제주해녀문화가 2016년 11월 30일 드디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바다 속에서 산소통 없이 하는 채취 작업 ‘물질’이 보여주는 해녀정신에 대해, 유네스코는 ‘제주해녀는 감사받을 만한 물질기술로 생계에 기여해 여성의 권리를 신장했다.’라고 평했다. 해녀의 물질은 공복 상태로 짧게는 3-4 시간, 길게는 6-7 시간동안 이루어진다. 물숨 한번 잘못 먹어버리면 아차 하는 순간 등에 지고 가는 물질 도구가 혼백의 칠성판이 될 수도 있다. 제주의 어촌마을 어디를 가도 해녀 노래가 있다. 해녀들은 육지나 섬으로 물질을 나가는 돛배에 노를 젓거나, 테왁에 의지하여 바다로 뛰어들며 노래와 숨비소리를 토해 내곤 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바다에서 해녀는 삶의 의지를 노래를 통해 분출했던 것이리라. 해녀 노래는 어업노동요로 해녀 노젓는 소리, 네짓는 소리, 좀녜 소리, 좀수질소리, 이여싸소리, 이어도사나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해녀들이 돛배의 노 젓는 동작에 맞춰 선소리와 훗소리로, 간혹 교환창이나 독창 방식으로 불리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