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도비양의 등대와 방사탑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는 돌의자 우도8경이 알려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도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게다가 감추어진 비경이 서서히 명품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필자가 교직원을 비롯한 지역민들과 머리를 맞대 선정한 우도의 9경과 10경을 소개한다. 제9경은 남도비양(南島飛陽)으로, 최근에 많은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 우도1번지인 비양도의 풍광을 말한다. 제주본섬과 성산반도처럼, 우도와 비양도 그리고 안비양(비양도 안에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섬)이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연결되는 진풍경을 볼 수도 있는 곳이다. 특히 예부터 동비양(우도 비양도)·서비양(한림읍 비양도)은 기(氣)를 뿜어주는 곳이라 하여 신령스런 곳으로 여겨져 왔다. 이곳에는 돈짓당과 연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심신의 건강을 힐링 해주는 돌의자가 새로운 명물로 뜨고 있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제10경은 북해석문(北海石文)으로, 우도의 최북단 전흘동 바닷가에 산재한 돌로 된 문화유적지의 별칭이다. 돌로 빚은 연대&mi
8경이란 어떤 지역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뜻한다. 중국의 소상팔경에서 유래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관동팔경·단양팔경 등이 있다. 1982년 우도중학교 김찬흡(현재는 향토사학자로 널리 알려짐) 전 교장은 우도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우도의 지명과 경관에 대한 자문과 자료를 수집하여 우도의 8경을 선정하였다. 김찬흡 전 교장은 나의 고교 은사이기도 하다. 이후 우도8경은 오늘의 우도를 있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게 일반적인 평이다. 필자가 근무한 학교 학생들 모두가 우도8경을 알고 자랑할 만큼 친숙하다. 한자의 4자성어로 구성된 우도8경은, 낮이나 밤이나, 하늘과 땅 어디에서나,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동쪽과 서쪽 어느쪽에서 바라 보아도, 우도는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1경은 주간명월(晝間明月)로, 우도봉 남쪽기슭 해식동굴 중 하나인 이 동굴은 오전 11시를 전후하여 동굴 안의 물 위를 비춘 햇빛이 천장에 반사되어 마치 보름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주민들은 이 현상을 달그리안이라고도 부른다. 주변에는 보는 이와 보는 각도에 따라 만물상이 산재하고 있는데, 동굴 입구의 왼쪽
▲ 범섬. 범섬에 상륙하지 않고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다소 쑥스럽다. 서귀포여고에 재직시 딱 한 번 범섬 바닷가에 가본 후 언젠가 가야지 한것이 여태 가보지 못했다.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이섬을 범섬이라 부른다. 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들이 있는데, 같은 크기로 나란히 생긴 두 개의 해식동굴을 호랑이 콧구멍이라 하고, 반대쪽의 커다란 해식동굴을 호랑이 똥구멍이라 한다. 섬 위쪽은 평평하고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용천수가 솟아, 1950년대까지 가축을 기르고 고구마 농사를 지으며 사람이 살았다. 섬 남쪽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바위투성이지만, 북쪽에는 돈나무·구실잣밤나무·해송 등이 울창하다. 특히 난대성 식물인 박달목서라는 희귀종 1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상록활엽수림과 함께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가 서식하고 있어 섬 전체가 제주도지정 문화재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청정섬인 범섬 또한 제주역사를 지켜보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목호정벌을 위해 제주에 온 최영 장군과 그 진압군은 새별오름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밀
▲ 가파도(위)와 마라도(아래) 1990년대 23가구가 모여 살았던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에는 애처로운 전설이 깃든 신당 하나가 좌정해 있다. 마라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시절, 허씨 처녀가 아기업게로 하모리 이씨 주인을 따라 마라도에 갔다. 며칠 부는 태풍으로 사람들은 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뱃사공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한 사람을 공물로 바쳐야 섬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다. 여럿이 의논한 끝에 허씨 처녀만 남겨놓고 떠나기로 했다. 승선하기 전에 허씨 처녀에게 기저귀를 가져오라는 핑계로 꾀었다. 허씨 처녀가 가 버린 사이 배는 떠나버렸다. 몇 년 후 마라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위하여 가보니 허씨 처녀는 당이 위치한 자리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주민들은 그때부터 허씨 처녀의 원령(怨靈)을 당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전한다. 우도에는 설문대할망 전설이 있고 쇠머리오름과 알오름이 있다. 가파도와 마라도에는 오름이 없는 대신에, 최남단의 섬이란 상징성이 있고, 빚을 갑(갚)아도 좋고 마라도 좋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또한, 가파도에는 청보리(축제)가 있고 마라도에는 아기업게 전설이 있다. 그리고 우도
바다를 건너는 것을 도항이라 하고, 바람을 동력으로 하여 도항하는 배를 움직이던 시대에 항로를 벗어나 조난되는 해난사고를 표류라 한다. 표류자에게는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당시의 여러 나라의 통상적인 관례였다. 가파도와 우도는 표류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1794년 8월, 류큐인들이 표류하다 가파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항해 중 갑자기 동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가파도에 표착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제주판관 홍이조와 역학(譯學) 홍덕용이 표착지에 갔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하였다. 배에는 11인이 승선해 있었으나 7명이 익사하고 1명이 병사했는데, 병사자는 가파도에 묻혔다. 남은 3인은 전라도 영암 이진에 보내졌는데,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는 제주통사 이익청을 동행하여 표착인들에게 실정을 묻고는 심문조서인 문정기(問情記)를 작성하였다. 이후 생존자는 북경을 거쳐 다음 해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807년 7월 류큐인 6명이 탄 작은 배가 우도(당시 정의현 소속)에 표착하였다. 필담으로 조사한 결과, 그들은 류큐국의 순검관과 사관 일행으로 큰 배에 탄 인원은 모두 99명(여성 4명)이었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에 표착
바다는 희망과 두려움의 상징이다. 바다의 수평선은 무지개처럼 호기심이 일고 희망이 일지만, 바다 너머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또한 공포심이 일렁인다.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문화를 실어 나르는 것과 같다. 바다를 일러 문명의 바다라고 예부터 말하기도 했다. 바다에는 여러 바람이 인다. 제주선인들은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바람을 지혜롭게 이용하였다. 바람을 맞으며 섬 속의 섬인 우도와 가파도 그리고 마라도로 사람들이 몰려온다. 3형제 섬 중 맏이인 우도는 6.03㎢, 둘째인 가파도가 0.84㎢, 막내인 마라도는 0.3㎢의 넓이로,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지형과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으며 닮은 점들도 있다. 특히 국유 목장, 전설, 표류, 이양선의 출몰 등의 역사문화가 숨겨져 있다. 더하여 자그마한 섬인 범섬의 역사도 실었다. 어쩜 막내섬인 범섬에 역사 이래 가장 먼저 사람의 발길이 닿았을 것이다. 우도의 말 목장과 가파도의 소 목장 1697년(숙종 22년) 류한명 목사가 조정의 허가를 받아 우도에는 말 목장을, 가파도에는 우 목장을 설치했다. 이후 1823년(순조 23년) 제주 위유어사 조정화가 우도와 가파도에 있는 목장이 제구실
▲ 지두청사에서 바라본 톨칸이와 바다 풍경 우도는 제주본토에서 바라볼 때 소를 닮은 데서 비롯되어진 지명으로 제주어로는 소섬 또는 쇠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듯 역사와 환경을 반영한 지명이 우도에 더러 있는데, 드렁코지와 돌칸이, 검멀레와 비와사폭포 등이 그것이다. 또한 도처에 우도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비도 있어, 우도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드렁코지: 종달리의 만세코지와 우도 드렁코지 사이의 거리는 대략 3km이다. 오래전부터 본도의 사람들은 테우인 떼배를 타고 이 곳을 통해 처음으로 우도에 들어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97년 유한명 목사가 말 200필을 우도에 방목한 이후 우도국유목장에 있는 말들을 사육하기 위해 목자인 말테우리들이 이곳을 통하여 왕래하였다. 그 이전부터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하여 제주본토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우도에 상륙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어인 코지는 코같이 돌출되어 바다 쪽으로 뻗은 곶을 지칭하는 말이다. 물이 들어도 잘 잠기지 않지만 물이 빠지면 여와 연결되는 곳이 코지이기도 하다. 우도에서는 코지 대신에 봉오지라고도 부르는데, 설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름을 붙인 득셍이코지, 길쭉한 진코
▲ 1845년 경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해장성이 헐린 모습. 위의 해녀항쟁에서 보듯 하도리(옛 지명은 별방)와 우도는, 지리적으로는 3km 정도 떨어진 바다 건너 이웃마을이고, 가장 넓은 바다를 가진 어촌마을이며, 역사적으로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별방진과 관련이 깊은 사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왜구는 당시 무인도였던 우도에 상륙하여 주변 마을들을 노략질하였다. 지미봉수대와 종달연대 그리고 한동리의 왕가봉수대 등을 통해 교신했던 김녕방호소는 하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김녕포구에서 수전선이 출발하면 왜구선은 멀리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1510년 우도를 잘 관찰할 수 있는 해안가인 하도리 바닷가에 특별한 방어진지가 필요하여 진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어진 별방은 옛날 하도리의 이름인 바, 특별의 別과 방어의 防자가 합쳐 별방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도리 바닷가에 위치한 별방진은 길이 1000여 미터, 높이 4미터로 복원중이나 당시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내성 곳곳에서는 당시의 성담인 기단석의 일부도 볼 수 있다. 1697년 이후 우도에는 국유목장이 들어서고 말을 방목
▲ 해녀의 노래비 바로 그때 바다를 건너 온 우도해녀 300여 명과 성산읍 시흥리의 해녀들이 만세를 외치며 합세하였다. 이에 힘입어 주재소 안에 들어선 20명의 해녀대표가 다구치 도사와 협상하여, 지정판매 절대 반대·조합재정 공개 등 8개의 합의사항이 발표되었다. 해녀들은 도사의 약속을 재차 확약 받고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도사는 형사들에게 해녀의 배후를 체포하도록 명했다.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제주 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표했다. 결국 세화리의 문도배와 김시곤, 종달리의 한양택과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과 강관 순, 하도리의 오문규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호송 하던 차를 1500여 해녀들이 막아섰다. 돌과 빗창으로 자동차를 막아선 해녀들은 체포된 청년교사들을 탈출시키기에 이르렀다. 경찰에서는 무장경관들을 편성하여 현장에 급파시키나, 이웃 마을 해녀들도 속속 모여들어 세화리는 전시상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에 놀란 경찰은 해녀를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었다. 다음 날 옷에 도장이 찍힌 해녀 100여 명
▲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제주출신 고희영 감독이 최근 제작한 영화 ‘물숨’은 우도해녀의 삶을 다룬 다큐이다. 고희영 감독은 물숨을 제작하기 위해 우도에 7년을 투자하였다 한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욕심을 자르고,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을 진솔하게 영상에 담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감독은 해녀들의 물질이 아무리 힘들어도 바다에서 위로받고 바다를 원망하지 않는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명화를 우도학생들이 못 본다면 그것 또한 아픔일 것이다. 고희영 감독은 나의 고교 제자이다. 여러 여건이 충족되어 우도 학생 모두는 학교에서 그들의 할머니, 고모, 이모, 삼춘들인 우도해녀의 삶을 화면으로 감상하는 기회도 가졌다. 우도출신 강영수 수필가는 ‘바다에서 삶을 캐는 해녀’라는 제목으로 우도해녀의 삶을 소재로 작품화하기도 했다. 해녀들은 물때가 되면 바다 속에 있는 자그마한 여를 부여잡고 정직하게 삶을 캐어 올린다는 대목에선 공감하는 바가 크다. 제주해녀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제주도는 유네스코 등재를 신청했고, 드디어 2016년 11월 유네스코 인
▲ 우도 중앙 포젯동산에 있는 김석린 진사 안내판 최근 우도에서는 신석기 패총, 동굴유적, 고인돌, 탐라시대 유물 등 다양한 역사문화유적이 출토된 바 있다. 천진항 근처 패총에서는 신석기 후기에서 말기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연대 측정결과 3600년과 32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료들을 통해 우도에는 약 3500년 전부터 해산물 등 수렵채집 집단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시적인 고기잡이 돌그물인 원담, 옛 포구인 개, 마을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방지하는 방사탑, 옛 등대인 도대불 등이 산재해 있다. 해안가 도처에는 해신당과 포제단, 불턱도 남아 있으며, 특히 1845년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와 환해장성이 여러 곳에 원형으로 남아있다. 우도는 제주 본섬과 같이 말의 고장으로, 유한명 목사가 1697년 말 200필을 우도에 방목한 것이 시초이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그리도록 한 탐라순력도 41화폭 중 하나인 우도점마(牛島點馬)는 우도에서 방목되던 말을 점검하는 풍속도이다. 당시 우도에는 260여 필의 말이 방목되고 있었다. 이후 1823년 제주에 큰 가뭄이 들자, 이를 위무하
제주 도처는 설문대할망이 심혈을 기울인 설치예술품의 전시장이다. 신들의 고향인 제주에는 368개의 오름이 있고, 우도에는 쇠머리오름과 알오름이 이웃하고 있다. 신화는 소원이 실린 바람이다. 바람이 극진하면 이루어지듯 제주 선인들은 신화에 바람을 실었다. 1만8000 신들을 모셔와 바람을 실어 소원을 이루어왔던 것이다. 제주선인들은 설문대할망이 제주 본섬을 창조하고 나서 우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천지왕(옥황상제)의 딸인 설문대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상세계에서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측은지심이 생긴 설문대는 옥황상제인 아버지를 졸라 거친 섬을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겠다며 제주섬에 내려왔다. 거인이 밟은 제주섬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기우뚱 거리곤 했다. 설문대가 거보를 옮길 때마다 섬은 흔들려 사람들과 동식물들은 정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설문대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흔들리지 않은 섬을 만드는 것이었다. 섬을 균형 있게 해줄 중심축을 만들기 위해서는, 은하수를 끌어들일 만 큼 높은 한라산(漢拏山)을 쌓아야 했다. 거친 바람도 막아주고 수 많은 동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