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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캄보디아를 다녀왔다. 가족과 함께 떠난 휴가여행이었다. 행선지를 고민하다 어릴 적 즐겨보던 소년잡지를 떠올리곤 그곳으로 정했다.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솔직히 어릴 적부터 꼭 한번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에 아이들에게도 교육적 효과가 높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돈을 털었다. “물건을 사 주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세계의 문화현장을 보여주는 게 더 교육적”이란 판단이 깔려 있었다. 그렇게 앙코르와트의 본고장 캄보디아의 씨엠립에서만 4일을 보냈다.

 

물론 대단했다. 솔직히 상상하기 힘든, 믿기 어려운 고대의 유적을 만났다. 앙코르 와트란 석조 건축물 사원이 12세기 시절에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 정도만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앙코르와트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 시절 영국 런던이 7만명,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고려 개경이 10만명이 사는 도시였다면 앙코르와트를 둔 도시 ‘앙코르톰’의 거주인은 당시 100만명이었다. 더욱이 도시규모는 지금의 미국 LA와 맞먹는다. 그 시절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크메르제국이 건설한 도시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사원이 앙코르와트였다. ‘새발의 피’만 떠나기 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런 곳이 1860년 프랑스 고고학자 앙리 무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600여년 간 그저 버려지고 방치된 채 정글 속에 파묻혀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나 더 놀라운 광경은 다른 곳에서 펼쳐졌다. 길거리에서, 관광지에서, 음식점에서···. 곳곳에서 만나는 구걸 행렬이다. 이글대는 열대의 아스팔트 위를 그것도 맨발로 달려드는 그들의 행렬이 유독 눈에 박혔다. 갓난 애를 안고 애처로운 손길을 보내는 아낙네에서 목에 뱀까지 두르고 달려드는 5~6살 꼬마, 선착장에 카누를 갖다 대고 애원하는 일가족 등등. 접근법과 행색, 행동방식만 틀렸을 뿐 이들의 공통점은 ‘구걸’이었다. “1달러만 주세요”라는 말만큼은 영어든, 한국어든 농통했다. 며칠 지나며 생각하자니 마치 구걸에도 아마추어와 프로 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느껴질 정도였다. 몇 해 전엔 현지에서 ‘툼레이더’ 영화를 촬영하던 안젤리나 졸리가 그렇게 구걸을 하던 꼬마를 입양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캄보디아는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우리나라의 복구를 도와준 원조국가다. 앙코르톰이란 도시를 건설할 무렵의 크메르제국은 그 시절 이웃 라오스와 베트남, 태국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던 강성 국가였다. 수리야바르만 2세 왕 시절 앙코르와트란 최고의 문명과 최고의 건축기술을 선보였고, 이는 그 당시 어느 나라의 문명도 따라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선진기술이었다. 우리의 광개토대왕 격인 자야바르만 7세는 인구 10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명도시 앙코르톰을 건설했다. 37년 간 정복지 이웃나라의 주민을 끌어오고, 자국 국민을 동원해 만든 세계 최고의 대작이 그 앙코르와트이자 앙코르톰인 것이다.

 

 

그런데 그 제국의 화려했던 명성은 이제 영원하리라 보았던 석조의 문화유산으로만 남았다. 영광스런 제국의 지혜도, 자부심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조상의 위대한 업적 덕에 매년 400만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그곳을 다녀가고 있고, 그들은 그저 거기에 기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만나는 입국신고대의 세관공무원마저 ‘급행처리’를 명목으로 ‘1달러’를 달라고 요구할까? 프랑스와 일본·한국인들이 그 도시 곳곳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좀 큰 돈을 만지는 업종이면 여지없이 주인은 캄보디아가 아닌 외국인이었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이기만 해도 그들은 다른 신분이었다.

 

씁쓸하다 못해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하루 이틀이 지나며 풀리기 시작했다. ‘지식인의 전멸’ 때문이었다. 국가의 쇠락에 아무도 문제를 들먹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들먹일 만한 지식인은 이미 마치 ‘인종청소’하듯 사라진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우리가 영화로 익히 아는 ‘킬링필드’의 결과다. 그 잔혹하고, 끔찍했던 1970년대 초·중반 ‘광기(狂氣) 공산주의’의 악몽은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인간의 탈을 썼다고도 볼 수 없는 폴포트 정권의 만행은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런 결과를 낳았다. 1700만 인구 중 200만 인구를 무참히 도려낸 결과는 굶주린 백성으로 나라를 채웠고, 이제 다시 일어설 동력마저 앗아버렸다. 한 세대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오직 구걸만이 나라의 생계수단이 돼 버렸고, 찬란한 크메르제국의 유산은 주변국과 유네스코가 아니고선 현 상태를 유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는 2천년 전 영광을 일궜던 탐라국의 후예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그 먼 옛날은 아니더라도 십수년 전 제주보다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우리 후손들에게 만들어주고 있는가? 우리 후손들에게 떳떳하리만치 우리 삶의 현장을 치열하게 바꾸고 있는가? 많은 의문을 되뇌어 봤지만 솔직히 자문자답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1990년대 초 각종 경제지표에서 서울 다음으로 수위를 차지하던 제주는 지금 여러 지표를 보면 거꾸로 2등이다. 독특한 ‘궨당문화’로 특이한 선거결과를 보였지만 미안하게도 그 십수년 전에 비하면 제주는 전국 정치무대에서 ‘이상하다 못해 괴상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래도 두뇌는 최고’라고 자부하던 우리 청소년들의 학력도 전국 지역별 통계를 보면 그 정도완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주변에서 좀 잘나간다는 식당이나 가게들을 보면 여지없이 주인은 제주에서 태어난 적이 없는 분들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외치는 실용그룹이 개화와 개혁의 물결로 제주에 휘몰아치고 있는게 현실이다. 외지 출신은 물론 외국인이 제주에 와서 터 잡고 사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때도 아니다. 그들의 도전도 치열하다. 정상적인 현상이다. 태풍이 몰아치면 그저 내 감귤밭 걱정이나 하면 되던 시절이 아닌 것 같다. 고집스레 우악스럽고, 우직스러운 ‘전통고수’는 그래도 보고 있을만 하다. 그러나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말 그대로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데 그러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지금 제주엔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아닌 파정현사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그름이 옳음을 내쫓고 있는 것이다. 상식이 자꾸 부조리에 밀리는 형국이다.

 

 

지금의 캄보디아처럼 우리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어물쩡거리면, 매순간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있다면, 우리의 침묵이 당연시된다면, 더욱이 ‘음험한 기운’이 짱짱거리며 사는 사회라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구걸로 연명할 날이 올 수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고, 정의가 바로 서지 않는데 누가 희생을 감수하고, 누가 스스로를 단련해 미래를 대비할까? 간계와 술수만이 난무하는 세월이 길어질 수록 우리의 미래는 더욱 어둡다. 그리되면 우리 후손들이 너무 가엾다. 앙코르와트 처럼 기대어 먹고 살만한 찬란한 문화유적조차 만들어 놓은 게 없지 않은가?  조상이 물려준 것도 아닌 하늘이 내려준 자연유산만 믿고 손을 놓을 수도 없지 않은가? 하물며 그 자연은 곳곳에서 생채기가 나고 있다.

 

그 숱한 고난의 세월을 보낸 제주의 과거사는 오늘 다시 말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배웠거든 이제 미래로 가라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년시절 가난으로 괴로웠던, 빚 때문에 집안 살림이 막막했던 그런 기억은 대부분 갖고 있을 터다. 그러기에 캄보디아의 현실은 남의 일이 아니다. 머뭇거리는 순간 또 뒤쳐질지 모른다. 이러다 대한민국에서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외톨이 ‘왕따’ 섬이란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아니 벌써 그런 말이 횡행하고 있기도 하다. 후회하면 또 늦은 것이다. 그러나 후회라도 하면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 제주엔 고뇌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두뇌가 없는 게 아니기에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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