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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칼럼] 4·3이 생계수단? 후손에게 총과 죽창의 분열을 넘기려는 자들

“지금 말하지만 난 그 ‘폭도의 수괴’로 불렸던 이덕구의 아들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코흘리개이던 신촌초등학교 1학년 동급생이자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았던 벗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역시 지금 세상에 없다. 4·3사건이 종반전으로 치달을 무렵 어느 날 경찰의 손에 붙들려 갔고, 후일 들은 얘기지만 경찰관도 차마 그냥 총을 겨눌 수 없어 놓아주고 도망치게 한 뒤 총부리를 겨눴다고 한다. 너무도 아픈 우리네 역사다. 그 어린 영혼이 무슨 죄가 있다고 숨져가야 했는지 그 참담했던 제주의 시련이 아직도 마음을 후빈다.”

 

“삼양지서가 습격 당했을 땐 새벽에 군경 토벌대가 한 달 된 갓난애까지 포함해 전 주민을 신촌초등학교에 불러세웠다. 기관총이 내걸리고 전원이 몰살 당할 위기였다. 그런데 삼양출신인 한 경찰관이 ‘무고한 백성을 죽이려면 나를 쏘고 죽여라’고 맞섰다.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 사람 덕에 마을 사람 다수가 살았다. 하지만 군경 토벌대는 시도 때도 없이 마을 주민들을 신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불러 세워 연령대 별로 마을주민들을 세워 놓고선 어떨 땐 홀수 연령대, 어떨 땐 짝수 연령대를 지목하고 함덕지서로 끌고 갔다. 그렇게 끌려 간 마을 분들을 그후 다시 보진 못했다.“

 

“4·3사건은 우리 제주도민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줬다. 그 사건과 연결되지 않은 제주도민들이 드물었고, 그 모진 참극을 피해 밀항을 선택한 이도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본으로 간 우리 제주도민들의 친·인척들은 조총련계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다수였다. 만경봉호란 배 이름만 대면 떠오를 ‘재일동포의 북송문제’ 등이 내 가정사에도 있었다. 내 6촌 형제들이 일본에서 조총련으로 활동했고, 이들 중 일부는 북송 배를 탔다. 더욱이 아내의 한 형제도 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이런 가정사 탓에 난 ‘신원특이자’로 분류됐다. 물론 나를 진급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빌미로 쓰였고, 그런 이유로 난 ‘산 송장’ 같은 꼴로 전락하고 있었다. ‘신원특이자’ 핑계를 대면 난 그저 고개를 떨궈야 했다. 연좌제의 굴레로 난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 챌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층들과 달리 60대를 넘긴 노년층 제주도민들에게 이런 가족사는 사실 곳곳마다 있다. 차이가 있다면 등장하는 인물이 다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경우들이다. 그래서 노년층에선 이런 진술을 한 사람이 누구일지 어림잡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덤덤하게 수십년 전의 일들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정답은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다. <제이누리>에 연재 중인 그의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그가 쓴 내용 중 4·3사건에 대한 진술만 모아본 것이다.

 

막상 그의 진술을 모아 놓고 보니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그래도 명색이 제주도지사를 역임한 그의 경험과 기억이 이럴진대 너무도 평범한, 무지랭이처럼 살아온 우리 제주도민들의 험난한 가족사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 혹독하고, 더 참담한 일을 겪은 집안의 내력들은 조금만 더 파고들어 가면 숱한 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

 

그 4·3에 대해 <동아일보>1948년 11월11일자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서북청년단이 온 이후 섬주민들과 육지에서 온 사람들과의 감정은 격화되었다. ···(중략)··· 주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칼에 개의치 않고 떨쳐 일어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원인 없이는 행동도 있을 수 없다.”

 

3만명이란 것이다. 그 3만명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3만명과 다르다. 참고로 일제 강점기 시절의 통계자료와 1939년의 일제하 제주도청이 발간한 [제주도세요람], 그리고 해방 후 1948년 조선은행 조사부가 내놓은 [조선경제연표(3)]의 자료를 보면 의미 있는 결과를 얻는다. 제주도의 인구다. 1925년 20만5478명이던 인구는 1938년 20만3651명으로 소폭 줄었다. 그런데 일본의 패망 직전이던 1944년 인구가 21만9548명으로 불더니 종전(終戰) 후 밀려든 유학생과 징용노역 조선인 등 우리 동포들의 귀환 이후인 1946년 인구는 무려 27만6148명이나 된다. 1944년과 비교해 봐도 단 2년 만에 인구의 25.8%가 폭증한 것이다. 결국 그 3만명은 인구의 10%를 훌쩍 넘는다.

 

 

해방 후 제주엔 지식인들이 몰려왔다. 나라가 해방됐으니 나라를 재건하고자 서둘러 귀국행 배편에 몸을 실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이들이 다수였다. 4·3을 거론하며 만나는 무장대의 총수 ‘이덕구’만 하더라도 유학파였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그럴 때가 아닌데 그들은 총과 죽창을 들고 무장을 하는 무리수를 뒀고, 그들은 정부의 군·경 토벌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그렇게 패배했다. 대한민국 제주도란 섬에서 벌어진 ‘준(準) 내전적 상황’의 결과인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미국과 소련이란 두 강대국이 냉전체제로 치달을 무렵 한국전쟁이란 남북 간 대리전이 벌어지기 이전 제주란 공간에서 벌어진 제1차 대리전이자 ‘내전’의 소용돌이에 모두가 휘말린 것이다. 군·경 토벌대만 잔혹했고, 입산 게릴라였던 무장대는 선량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전후처리 문제가 불거져 강대국 간 분쟁의 싹이 틀 무렵 제주에서 우리끼리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그 안타까운 현장에 선량한 양민이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뀐 지도 모르고, 다가 올 정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도 없는 그들은 해안에서, 중산간에서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영화 <지슬>이 주목했던 그 양민들처럼 그들은 그저 “잠시 이러다 말겠지···”라고 낙관하다 어이 없게 내몰리고, 어이 없게 쫓기다 그렇게 숨져가야 했다.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이고, 그리고 할아버지이자 할머니가 저승에서, 아니면 이승에서 가슴 속 깊이 품은 사연이다.

 

1948년으로만 놓고 보더라도 자그마치 6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수만명이 영문도 모르고 총살 당하고, 죽창에 찔리고, 절벽에서 밀려 바다에 빠져 숨지고서도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린 지금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지금도 우린 “항쟁이냐? 폭동이냐?” 논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도 우린 선거철 4·3유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정치인들과 정당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다. 그 때의 아픈 영혼을 위무하기 위해 그렇게 애써 만든 ‘4·3평화재단’의 일꾼 자리는 지방선거 승리자의 전리품이 돼 버렸다. 그리고 4·3의 아픔이 다가올 때만 되면 앵무새처럼 ‘대통령의 위령제 참석 요구’만 반복하고 있다.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4·3을 다시 음미한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산간마을 잔비(殘匪)가 소탕되고 난 뒤인 1954년 한라산 백록담엔 계엄총수인 제주도경찰국장에 의해 ‘한라산개방 평화기념비’가 세워졌다.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은 2008년 문을 열었다. 위령제단 등을 갖춘 공원은 지금도 조성을 끝내지 못했다. 모두가 ‘평화’란 명분을 내세워 세워지고, 건립되고, 조성 중이지만 그 4·3은 아직도 우리에게 ‘평화’롭게 다가오지 않고 있다.

 

“4·3을 생계수단화 하는 이들이 있다. 한마디로 4·3을 팔아 먹는 것이다. 제주도민 모두의 아픔이자 역사자원을 사유화하려는 준동인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그런 광경을 목도한다. 더욱이 그 마저도 모자라 정치의 계절이 오면 4·3을 정치판의 소재로 활용, 정파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을 보며 몹시 마음이 괴롭다.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요 추악한 행태다.”

 

일흔을 넘긴 노(老) 정객 신구범은 지금의 4·3을 자신의 회고에서 그렇게 적고 있다.

 

65년을 넘긴 아픔 속에서 우린 무얼 해야 하나?

 

최소한 천추의 한이 된 제주의 시련사가 정치판, 선거판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상의 한을 망각하고 ‘떡고물’만 쳐다보는 이들이 우리 제주사회에선 깨끗이 정리됐으면 좋겠다. 더욱이 달을 보면 될 텐데 기어이 손가락만 쳐다보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벗어났으면 좋겠다. 갈등과 분열을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물려줘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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