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혜성이 정확히 지구를 정조준하고 풀 스피드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한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디비아스키 연구원(제니퍼 로렌스 분)은 곧바로 백악관을 찾아가 올린 대통령(메릴 스트립 분)에게 보고한다. 민디와 디비아스키는 즉각적인 범국가적 대응을 기대하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그 사실을 ‘국가기밀’로 분류하고 봉인해 버린다.
거대 혜성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봉인한 ‘국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지구를 완전히 파괴할 정도의 거대 혜성이 6개월 후에 지구와 정면충돌한다는 사실을 공표해 버리는 순간 온 나라가 패닉에 빠질 수 있어서다.
‘뱅크런’이 일어나고 전국에서 약탈과 방화가 벌어질 것도 자명하다. 혜성이 도착하기도 전에 지구는 종말을 맞을지 모른다. ‘국익’을 위해서는 이런 끔찍한 정보는 함부로 공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는 올린 대통령의 조치가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중간선거라는 ‘개인적 이유’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État, c'est moi)’라는 선언이 전제되지 않는 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민디와 디비아스키는 대통령의 함구령을 거부하고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 사실을 터뜨린다.
결국 디비아스키는 미시간 주립대학 캠퍼스에 테러진압부대처럼 들이닥친 무장경찰에 의해 아무런 설명이나 체포영장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체포된다. 그 후 9·11테러를 저지른 알 카에다 조직원처럼 모처로 연행된다. 무강경찰이 디비아스키를 이유 없이 연행하지만 교수든 학생이든 감히 나서지 못한다. 아마도 국가기관이 저렇게 요란스럽게 나서는 것은 모두 국익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국익이란 그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가 ‘국가의 도리(reason of state)’라는 말을 창안한 이래 너도 나도 상용하는 말이 돼버렸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국익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의하지 못한다. 독재국가의 국익이란 독재자 개인의 이익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서로의 특정한 이익을 국익이라 우긴다. 결국 ‘강자의 이익’이 국익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도 올린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이익’과 재벌기업 회장의 ‘경제적 이익’이 국익으로 둔갑한다. 궁색해지면 ‘낙수효과’라는 것을 들이대고 ‘참고 기다리면 나중에는 너희들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고 하지만 그것이 실현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나라 중장년층은 모두 암송할 수 있는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좋은 말씀이 현실에서는 웬만해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나라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될 만큼 융성해졌고 하는데, 민생은 그만큼 발전한 것 같지 않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연두교서에서 선포하고 명문화한 국민의 4가지 자유(말 할 자유·믿음의 자유·결핍으로부터의 자유·공포로부터의 자유)는 국익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모두 유보되거나 용도폐기된다.
국익이라는 것은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이며, 동시에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경우에 따라서 지배자들에게는 가장 편리한 궁극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어느 누구도 국익이라는 이름에 감히 쉽게 딴죽 걸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지배자들은 온갖 사적인 이익을 국익으로 둔갑시켜 나라와 국민을 팽개치고 자신들의 살길 찾기에 몰두한다.
1600년대 명목상으로는 루이 13세를 보좌했던 재상이자 추기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이13세와 프랑스의 ‘공동 왕’이었던 리슐리외(Richelieu)는 그 끔찍했던 ‘30년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본인의 믿음인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편에 서서 싸웠다. 국익을 위해서였다.
그의 공과功過를 떠나 그 사실만으로도 분명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리슐리외 본인의 개인적인 믿음은 저버렸지만 그가 책임진 프랑스의 국력과 국제적 지위는 대폭 신장됐다.
1972년 미국과 중공의 국교정상화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도 당시 미국민들이 강경한 ‘보수반공주의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닉슨 대통령이 주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인 닉슨이 ‘빨갱이 본진’과 화해하려는 것은 오직 국익을 위해서라고 국민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인 리슐리외가 개신교에 우호적인 ‘냄새’를 풍겼다면 리슐리외의 외교정책은 프랑스를 두 동강 냈을지 모른다. 닉슨 대통령 역시 평소 언행에서 좌파적 성향을 보였다면 그의 중공과의 국교정상화라는 정책은 미국사회를 쪼개놨을 것이다.
79주년 광복절 때 해묵은 ‘건국절’ 논란과 맞물려 또다시 ‘친일’과 ‘반일’ 논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군가는 국익을 생각한다면 ‘무식한 반일’은 그만 접고 일본과 손잡아야 한다고 하는데,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왠지 석연치 않고 찝찝하다.
중국은 멀리하고 일본과 잘 지내자는 것이 진정 국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본인들의 개인적인 이념적 혹은 정서적 성향을 국익으로 포장한 것인지 헷갈리기 때문인 것 같다.
리슐리외나 닉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대일(對日) 정책에서 뼛속까지 반일인 지도자가 국익을 위해 곰의 쓸개를 씹어 먹는 심정으로 과거는 접어두고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국민들을 설득한다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