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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3)

1604년 영국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체포돼 끔찍한 처형을 당했던 인물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화끈한 테러’를 저지르는 영화 속 의문의 사나이는 ‘V’라는 이니셜로만 통한다. 그렇다면 V가 의미하는 건 뭘까. victory(승리), vision(미래의 제시), victim(희생자), vestige(과거의 흔적ㆍ상처) 중 하나일까.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의 행적을 보노라면 그의 이니셜 V는 victory, vision, victim, vestige 모두가 될 수 있을 듯하다. V의 투쟁은 자유의 승리(victory)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억압된 체제에 의해 상처받은(ves tige) 희생자(victim)의 분노일 수도 있다. 다른 면에선 억압적인 체제를 부수고 진정한 자유를 향하는 비전(vision)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모두 V의 과격한 테러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명분들이다.

그런데 작가는 독자와 관객들의 다양한 해석과 상상을 원천봉쇄하기라도 하듯 V는 victory나 vision, victim이 아니라 ‘vendetta(복수)’를 의미한다고 제목에서부터 밝히고 들어간다(V for Vendetta). 살인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소설에서 살인자를 미리 밝혀놓고 시작하는 형식이다. 아마도 원작자 앨런 무어는 V라는 이니셜에 victory, victim, vision, vestige에 ‘+α’로 vendetta까지 넣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는 V가 행사하는 모든 폭력은 자유의 승리(victory), 부당한 체제의 틀 속에서 상처받은(vestige) 희생자들(victim)의 분노, 자유를 향한 비전을 위한 복수(vendetta)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벤데타’는 복수를 뜻하는 이탈리아 말이다. 이탈리아 원작이 아닌 이 영화 제목에 영어 ‘vengeance(복수)’를 쓰지 않고 굳이 ‘vendetta’를 동원했는지 궁금해진다.

 

우리말에서도 ‘보복’과 ‘복수’란 구분해야 할 개념을 혼용하는 것처럼 영어에서도 ‘revenge(보복)’와 ‘avenge(복수)’를 흔히 혼용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보복’은 자신이 당한 피해와 고통을 갚아주겠다는 감정적이고 사적(私的)인 마음이다. 정당하게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앙갚음하는 것이다. 반면 ‘복수’는 부당한 행위에 의해 발생한 피해를 응징하는 조금은 공적(公的)이면서도 정의로운 마음이다. 

아마도 작가는 ‘보복’과 ‘복수’라는 개념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벤데타’라는 이탈리아 말을 사용한 모양이다. ‘벤데타’는 명확하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응징을 의미한다. V가 가면을 쓰고 가이 포크스가 미수에 그친 의사당 폭파를 기어코 실현하는 건 가이 포크스의 죽음을 보복하려는 게 아니라 가이 포크스를 처형한 부당한 세력에게 정의롭게 복수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정치 보복(revenge)’ 논란이다. 새 정권은 그것을 전 정권 사람들이 저지른 불의를 정의롭게 응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새 정권 입장에선 합당한 ‘복수’일 것이다. 그러나 당하는 쪽에서는 그것을 ‘치졸한 정치 보복’이라며 부들거린다. 물러난 전 정권을 향한 칼날이 과연 ‘정의로운 복수’인지 ‘악랄한 보복’인지는 국민들도 헷갈린다. 

아마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정의로운 복수’를 다짐해도 어쩔 수 없이 사적이고 감정적인 ‘보복’이 섞여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보기에 따라선 거의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급의 악랄하고 치졸한 보복도 섞이는 듯하다. 
 

전 정권 사람들과 함께한 ‘민망하고 망측한 짓’도 자기 얼굴은 가리고 상대방의 얼굴만 드러내 세상에 까발리는 식이다. 이것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정의구현과는 거리가 멀다.

정권이 교체되면 전 정권의 잘못에 보복하는 것이 아닌 철두철미하고 제대로 된 정의로운 복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복수의 다짐들은 용두사미가 돼버리고 그 빈자리를 감정적인 보복들이 채우는 것 같아 개운치 못하다. 보복은 쉽지만 진정한 복수는 어렵기 때문인 듯하다. 

나를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정의로운 복수는 보복으로 변질되곤 한다. 영화 속 V가 완성하는 ‘복수’도 V가 거의 성자(聖者)의 마음과 슈퍼맨급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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