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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8)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무정부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의 공동제작사 이름이 아예 Anarchos Production Inc.이다. ‘anarchos’는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무정부 영화사가 작심하고 제작한 무정부주의 영화인 셈이다.

 

 

400년 전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시도했던 가이 포크스처럼 ‘미래 어느 날’의 V 역시 ‘무정부주의자’다. 인간들이 국가라는 제도를 발명한 이래 그 존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는 뿌리가 깊다. 국가와 정부라는 건 사실 ‘필요악(必要惡)’이다. 수술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술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국가와 정부의 간섭과 자유의 제약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물리적 강제력을 맡기고 자신의 재산과 자유의 일부를 신탁(信託)한다. 그 ‘물리적 강제력’이 무서워서 내기 싫은 세금도 내고, 가기 싫은 군대도 가고, 지키기 싫은 법도 지킨다. 

국민들은 국가에 신탁한 물리적 강제력을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 믿음이 깨지면 국가나 정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러시아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 등 사회의 지배계급을 바꾸는 혁명기엔 무정부주의가 어김없이 세(勢)를 얻는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나 정부란 어쩔 수 없이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딴 것’ 없어도 상부상조를 통해서 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법과 사회체계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멍에에서 벗어나 타고난 사회성과 인간성을 발휘하면 진정한 자유와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무정부주의는 뿌리 깊고, 무정부주의자는 많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법정 스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는 데이비드 소로(David Thoreau),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도 무정부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마도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주제의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한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쓴 작가 올더스 헉슬리도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된다. 1950년대 미국 시민권 운동 역시 사상적 기반을 무정부주의에 두고 있다. 그만큼 국가와 정부의 권력이라는 건 ‘문제적’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평화적이고 온건한 무정부주의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폭력만이 역설적으로 완전한 평화를 가능케 한다’는 조제프 프루동(Joseph Proudhon)이나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계열의 폭력적 무정부주의는 1960년대 폭탄 테러와 도시 게릴라 활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영화 극본의 원작자인 앨런 무어(Alan Moore)는 톨스토이나 간디 계열의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바쿠닌 계열인 듯하다.

주인공 V는 통금 위반을 빌미로 이비(Evey)를 성폭행하려는 비밀경찰들을 제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퀴벌레 잡듯 죽여버린다. V의 복수는 이뿐만이 아니다. 정권의 나팔수 프로테로(Prothero)도 협박이나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죽여버린다. 강제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이끌었던 박사도 처단하고, 소아성애자 추기경도 요절낸다.

이 정도 폭력은 워밍업이다. 종국에는 국영방송국과 국회의사당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국가와 정부라는 것에 관계된 모든 것은 고쳐 쓸 수 없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확고한 듯하다. V가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400년 전 가이 포크스 역시 폭력적 무정부주의자였다. V는 가이 포크스가 이루지 못한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란 대업을 마침내 완성한다.
 

최근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정부 비판 시위 현장에 나타나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시위대의 모습이 왠지 불안하다. 그들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만을 위해 사용하는 국가와 정부를 가이 포크스나 V처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엎어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있는 듯하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은 몇년 전 ‘이게 나라냐?’는 말이 오가더니 새 정부 들어서 ‘무정부상태’라는 해시태그가 확산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나라냐?’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돼 ‘#무정부상태’가 된 모양이다. ‘나라 같지 않은 나라’를 마침내 없애버리고 드디어 무정부주의자들이 꿈꾸던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구현되는 무정부상태에 도달했다는 의미는 아닌 듯하다.

아마도 새 정부가 표방하는 ‘코로나19 과학방역’이라는 게 알고 보니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각자도생 방역’이 아닌가 싶고,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은 민생이 아닌 정쟁에만 동원되는 듯해서 ‘#무정부상태’를 주창하는 것 같다.

막강한 검찰권력은 민생과는 동떨어진 일에만 열중하는 눈치고, 미증유의 물폭탄 사태에도 대통령이 너무도 ‘담대하게’ 정시에 퇴근해버리는 모습에서 아예 무정부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국가와 정부가 권한만 있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무정부상태인 모양이다. 이런 상태가 우리사회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늘어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가장 선명한 국가주의적 색채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새 집권세력이 강력한 국가와 정부가 아닌 ‘무정부상태’라는 말이 나오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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