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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7)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진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그런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주요국은 영국뿐이다. 영화는 핵보유국 중에서 영국만 살아남은 이유를 영국이 미리 핵폐기를 선언하고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라고 설정한다.

 

 

핵전쟁 후 혼란의 시대. 영국의 실권을 잡은 ‘슈틀러’는 생존과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극단적인 파시스트 정책을 펼친다. ‘슈틀러 정권’은 모든 인권과 자유를 유보하고 개인을 국가에 종속한다.

국가가 독점한 언론 매체는 국가의 선전기구로 전락한 채 끊임없이 단결과 복종을 주입한다. 영화는 슈틀러 정권을 최악의 독재정권으로 묘사하지만 민망할 정도로 ‘저렴’하거나 ‘저급’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왜일까. 

슈틀러라는 최악의 독재자는 자신과 정권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단결을 부르짖는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적어도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해야 한다’는 일관된 신념과 원칙이 있다.

또한 슈틀러 총통과 그가 이끄는 ‘노스파이어’당은 적어도 핵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소련에 암담한 현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 사태를 막지 못한 영국의 전임 집권자나 집권세력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옳다는 것만 강조한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유색인종 ‘인권탄압’의 명분을 ‘미국에도 흑인 인권탄압이 있었다’ ‘어느 정권에나 부정부패는 있기 마련’이란 논리에서 찾지 않는다. 영화 속 독재자 슈틀러는 적어도 남탓만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슈틀러의 미덕이다. 워낙 강력한 독재체제인 만큼 굳이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거나 남탓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
 

 

기원전 400년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지배계급을 원망하고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고 기강을 확립해야 했다. 집권자들은 전쟁 패배의 원인을 국가의 신을 부정하고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소피스트 철학자들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소피스트의 ‘수괴’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운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난데없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문하생들은 그야말로 탈탈 털린다. 소크라테스의 제1제자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의 변론(Apology of Socrates)’은 그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법원의 법정 공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탓’하고 법정에 세운 자들을 향해 “저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척하다가 무식이 탄로났다는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질타한다. 

아테네의 몰락은 펠로폰네소스 패전 자체가 아니라 그 위기 상황을 정면돌파하는 대신 뜬금없이 소크라테스 발목을 붙잡고 ‘남탓’에 빠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겁하게 남탓하는 권력에는 희망이 없다. 

‘브이 포 벤데타’에 등장하는 독재자 슈틀러는 최소한 남탓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원전 400년 아테네의 ‘지질했던’ 지도자들보다는 나아 보인다.
 

 

요즘 우리나라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지도자들이 너나 없이 남탓으로 부들거린다. ‘그 사람들도 그랬는데 왜 우리만 문제 삼느냐’고 한없이 하향평준을 지향한다. ‘그들이 너무 망쳐 놓아서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도 한다. 

참으로 해괴한 논리다. 그럴 거면 왜 전임자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지 어리둥절해진다. 우리는 그들을 ‘저들’처럼 하지 말라고 불러왔는데 그들도 ‘저들’처럼 하겠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보여달라는데, 보여줄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한다. 딱한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법정 진술처럼 “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척하다가 무식이 탄로났다는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해괴하고 듣기에 민망한 ‘남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마르 무크타르(Umar Mukhtar)는 1912년부터 이탈리아의 식민지배에 대항해 20년간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리비아의 지도자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리비아 독립투사가 이탈리아군에 체포돼 고문당하고 처형됐다. 여기에 분노한 무크타르의 부하들이 무크타르에게 ‘저들이 저러는데 우리도 이탈리아 포로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자’고 압박했다.

무크타르는 끝내 거부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탈리아 놈들이 우리들의 스승인가. 왜 우리가 이탈리아놈들이 하는 대로 해야 하는가. 그럴 거라면 우리가 굳이 독립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그 ‘당연한 말’이 위대하게 느껴져 씁쓸해지는 요즘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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